제172화
아더의 고백에 세 사람은 입을 벌렸다.
“허어….”
이안 도르문트.
케인 도르문트가 그토록 아끼던 장남을 죽인 범인이 설마 아더였다니?
그 탓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가장 아끼던 아들을 잃어버린 케인 도르문트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범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자 그는 결국 아케인을 정복해 그 분노를 쏟아냈다.
그 치열한 전쟁사는 역사 길이 남을 복수의 서막이라 불릴 정도였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시발점이 된 범인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그 탓에 세 사람은 몹시 당황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설명에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을 죽이지 않았으면, 제가 죽었을 거예요.”
아더의 설명에 따르면, 이안과 칼을 맞대었고 그 과정에서 이안을 죽였다.
만약 이안이 살아남았다면, 자신이 대신 죽었을 거란 이야기도 함께해주었다.
자연스레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아더를 죽인 이안이 이해가 가면서도, 여전히 놀란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미묘한 기류 속에서 요넬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네 어머니.”
아더의 확신에 찬 대답에 요넬이 고민하다, 눈빛을 빛냈다.
“그렇다면 새 가주의 취임식을 더는 망설이면 안 되겠구나.”
요넬이 단호히 선언했다.
“도르문트도 이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가문의 정비를 끝내야 해.”
이 말과 함께 요넬이 제국의 수도를 떠나, 바이에른 영지 [에덴]으로 향할 것을 천명했다.
“바이에른의 역대 가주들은 모두, 에덴에서 취임식을 올렸으니 이번에도 에덴으로 향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문 내부가 크게 들썩였다.
“들었어? 이번에 제국 수도에 있는 바이에른 사람들 전부가 에덴으로 향한다는 걸?”
“에덴? 그 곳은 갑자기 왜?”
“…듣기로 새 가주의 취임식 때문이라던데?”
“뭐!? 새 가주의 취임식? 그럼 요넬 바이에른 각하가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오신다는 말이야?”
그 속에서 가신들이 아더의 이름을 언급했다.
“아더 바이에른 공자가 돌아왔으니, 그 자리를 물려주려는 모양이야.”
“허허…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나?”
“하지만 다르게 보면… 자격 자체는 충분해. 아더 바이에른 공자는 그 케인 도르문트를 이긴 사내잖아?”
“듣기로 소드마스터에 근접한 칼잡이라지? 바이에른의 검의 가문이니, 그 자체만으로 가주의 자격은 증면한 셈이군.”
덕분에 한동안 조용하던 바이에른 가문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이에른 가문의 직할영인 [에덴]으로 향하는 것은 아주 오래만이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문이 들썩이는 사이 아더는 레온과 지니를 만났다.
“이 친구.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구만?”
“잘 지냈어요? 공자님?”
두 사람의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에 제국의 수도를 떠나게 됐어요.”
“…제국의 수도를? 갑자기 왜?”
“에덴으로 가서 취임식을 올려야 되거든요.”
“……!”
아더의 대답에 두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취임식이라면 설마….”
“네. 어쩌다 보니 바이에른의 새 가주가 되었어요.”
레온은 탄식을 터트렸고, 지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젠가 아더가 바이에른의 가주.
즉 제국의 새로운 공작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급작스럽게 그 자리에 오를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만 놓고 보면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결과기도 했다.
“…그렇군. 다가올 전란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거지 아더?”
레온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저 혼자 할 수 없으니까요.”
“흐음… 그럼 나도 준비를 해야 되겠어.”
“레온이 무슨 준비를 해요?”
“무슨 준비를 하긴? 자네를 도와 전쟁을 치를 준비지.”
이 말과 함께 레온이 씩 웃었다.
“그럼 잠시 동안 이별하자고 아더. 상황이 정리되면, 에덴으로 향하겠네.”
작별 인사를 남긴 레온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아더가 빤히 지켜보던 떄, 지니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 그럼 앞으로 아더 바이에른 공작 각하라 불러야 되는 건가요?”
“아직 취임식도 안 했으니깐, 공자님이라 부르세요.”
“…뭔가 안 믿기네요. 공자님이 진짜 공작이 된 다니.”
“저도 잘 안 믿겨요. 그런데 지니.”
“네?”
“언제 가문으로 들어오실 거예요?”
“…….”
“제국 수도 구경은 실컷 했으니, 슬슬 합류하셔야죠.”
아더의 제안에 지니가 망설였다.
‘어우… 이걸 가야돼 말아야 돼?’
바이에른 가문에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바이에른은 제국에서도 가장 지체 높은 가문.
그리고 자신은 뒷골목을 전전하던 마피아이자 깡패다.
신분의 격차가 나도 어느 정도 나야지, 이 정도가 되면 감히 범접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탓에 대답을 망설이는 그 때, 아더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지니.”
“……!”
깜짝 놀란 지니가 물러서려 하자, 아더가 그녀의 뒷덜목을 잡았다.
얼떨결에 퇴로가 막혀버린 지니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 때 아더가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지니가 필요해요.”
“…….”
“그러니 다른 데 가지 말고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아더의 말에 지니가 달싹이던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요. 도와드릴 테니 제 목 좀 놔 주세요 공자님.”
“진짜죠?”
“그럼 진짜죠!”
아더가 씩 웃으며, 물러났다.
그렇게 지니까지 가문에 합류시킨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떄였다.
아더는 가부좌를 틀고서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내리쬐는 햇빛.
바이에른 가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인기척.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되새기며 받아들이던 아더가 눈을 떴다.
때마침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안나가 보였다.
“공자님. 준비 다 끝났어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질문했다.
“이제 떠나는 건가요?”
“네. 짐은 물론이고, 바이에른 사람들 모두가 이사 준비를 끝냈습니다.”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가보죠. 바이에른 영지 [에덴]을 향해서.”
* * *
바이에른이 제국을 떠난다는 소식은 금방 제국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바이에른 직계는 물론이고, 바이에른 저택을 관리하던 고용인들마저 모조리 수도를 벗어났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바이에른 직계가 종종 제국의 수도를 떠난 적이 있지만, 이렇게 고용인들마저 다 대리고 떠난 것은 이례적이었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쏠렸다.
“들었어? 바이에른이 이번에 수도를 떠나 에덴으로 향한다더군!”
“에덴? 갑자기 왜 에덴으로 향하는 거야?”
“…바이에른 가신 전원이 에덴으로 향하는 거면 그것 밖에 없지 않나?”
“그게 뭔데?”
“새 가주의 취임식 이 사람아-!”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이 새 가주의 등장을 예고했다.
“바이에른이 일개 고용인들마저 대리고 제국의 수도를 떠나는 경우는 단 하나 밖에 없지! 바로 새가주의 취임식!”
그 탓에 제국의 수도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만약 이 예측이 맞다면, 제국의 새로운 공작이 탄생하는 셈.
그것도 무려 바이에른의 새가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최근 도르문트의 위세이 밀렸다지만, 바이에른은 제국을 대표하는 가문이었기에 모두가 이번 일을 두고 크게 떠들어 되었다.
그 사이 제국의 수도를 떠난 아더가 멈추어 선 거대한 철마에서 내렸다.
와와왕-!
황금빛으로 물든 평야가 보였다.
추수 절이라 그런지 몰라도, 몇몇 농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광경을 아더가 잠시 지켜보던 때,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요넬이 속삭였다.
“에덴의 밀은 제국을 넘어 대륙 제일이란다.”
요넬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인자하게 웃고 있는 요넬이 보였다.
“그 덕에 제국은 물론이고, 타 왕국의 귀족들마저 에덴의 밀을 수입하려 들지. 에덴으로 만든 빵은 그 맛 자체가 다르거든.”
그녀의 설명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안 사실이네요. 에덴이 밀이 유명하다니.”
“후후… 아더 너는 여기 처음 와보지?”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곳에 와본 건 처음이에요.”
요넬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올 기회가 자주 없긴 했지. 하지만 아더. 가주가 된다면, 이제 이곳은 네 땅이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눈에 새겨두고 잘 익혀두거라.”
그녀의 말에 아더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철마에서 내린 바이에른 가신들이 분주히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절대 빠트리거나 잃어버리면 안 돼요! 모두 중요한 것들이니 실수를 하시는 분들은 가차 없이 감봉입니다!”
안나의 매서운 지휘 아래, 수도에서부터 가져온 짐들이 차곡차곡 기차에서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더는 멀찍이 서서 황금빛 밀 밭 너머.
우뚝 솟은 거대한 고성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바이에른의 성이구나.’
듣기로 초대가주가 지은 성이라는 모양이었다.
‘흠… 초대 가주면 천사인가?’
흰 수염은 제 핏줄이 천사라 말했다.
그렇다면 초대가주는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천사가 말이 되나 그게?’
고민하던 아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와서 천사니 악마니 안 믿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건 그렇고… 참 신기하네. 어째서 에덴에 한 번도 들릴 생각을 못했을까?’
이번 생도 그렇고 저번생도 그렇고 바이에른의 영지면 한 번쯤 와볼 법도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 요넬이 다가와 말했다.
“아더. 가자꾸나.”
“벌써 짐정리가 끝났나요 어머니?”
“우리는 가서 영지민들한테 인사도하고 에덴을 관리인들을 먼저 만나야지”
요넬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가시죠 어머니.”
이 말과 함께 기차역 앞에서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탔다.
한창 농사일을 하던 농부들이, 그 마차를 발견하고서 수군거렸다.
“…? 저 마차가 웬일이래?”
“공작님이 오실 때말고는 저 마차가 나오는 일은 드물지 않나?”
“…설마 예고도 없이 공작님께서 오신건가?”
그 속에서 밀밭 한가운데 위치한 고성에 도착한 마차가 곧바로 내성으로 향했다.
“여기 밀 팔아요-!”
“맛 좋은 사과도 판답니다!”
“질 좋은 육고기도 있어요!”
내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흥겨운 시장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에덴의 시장을 구경하는 사이,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헐레벌떡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고, 공작 각하! 마중을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긴 수염이 인상적인 40대 중년의 남성이었다.
요넬은 그와 안면이 있는 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헤이치 1급 관리사님. 기차가 이렇게 일찍 도착 할 줄은 전혀 몰랐군요.”
“아이고… 그래도 공작 각하를 마중 나가지 못하다니요.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요넬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고성을 관리하는 관리직이었던 모양이었다.
헤이치란 이름을 가진 그 관리사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요넬과 담소를 나누다,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분이.”
“예 맞습니다. 제 장남입니다.”
요넬이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저를 대신해 차기 가주에 오를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헤이치가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헤이치. 요넬 각하를 대신해 바이에른 영지민을 관리하는 1급 관리사입니다.”
그의 말에 아더가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반가워요. 아더 바이에른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이야….”
말을 흐린 그가 해맑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신 분이네.’
인상으로만 보면, 참으로 선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 탓에 아더의 마음속에 헤이치란 사내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선하게 웃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오른쪽 눈에서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어… 아뇨.”
손을 내저은 아더가 두 손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제 눈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쉽사리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뭐지? 갑자기 왜 눈이 아픈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아더가 고민하던 그 때, 아케인의 시장.
안젤리나 베이비가 떠올랐다.
동시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의 특별한 혈통.
[오망성의 눈동자]도 함께 떠올랐다.
‘오망성의 눈동자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혈통. 즉 지금 오른쪽 눈에서 통증이 느껴진다는 건….’
말을 흐린 아더가 헤이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헤이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좋아 보이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다니….’
동시에 아이린의 약혼식에 마주쳤던 가문의 수호기사 하루덴이 떠올랐다.
그런 중요한 직책에 앉아있던 사람, 그것도 기사가 사실은 도르문트의 배신자였단 사실도.
한숨을 푹하고 내어 쉰 아더가 비스트를 꺼내들었다.
“……!”
난데없는 권총의 등장에 두 사람이 움찔 놀랐다.
그 사이 아더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요, 헤이치 씨. 잘 가세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헤이치가 눈을 끔뻑였다.
“…어?”
그는 제 뚫린 미간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대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요넬이 입을 벌렸다.
“……?”
뭐지?
무슨 일어난 거지?
비현실적인 상황에 요넬의 사고가 잠시 정지되었지만 곧 현실을 직시했다.
아더가 1급 관리사 헤이치의 미간에 총알을 박았다.
“…아더!!! 이게 무슨 짓이니!”
그녀의 외침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 눈앞의 이 사람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질 나쁜 거짓말을.”
“거, 거짓말이라니? 갑자기 헤이치 씨가 왜 거짓말을….”
요넬이 너무나 당황해, 아더가 추가 설명을 하려 할 때였다.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졌던 헤이치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끄응…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걸 보니 바이에른 핏줄이 확실히 맞으시군요.”
요넬과 아더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피를 철철 흘리는 헤이치가 인상을 왈칵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는 사람의 미간에 대뜸 총알을 박다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아더 바이에른 공자님?”
헤이치의 질문에 아더가 당황해 질문했다.
“…당신 정체가 뭐에요?”
미간에 박힌 총알을 쏙 빼낸 헤이치가 투덜거렸다.
“그걸 먼저 물어보고 제 미간에 총알을 박았어야죠. 공자님.”
아더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헤이치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