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케인 도르문트가 술을 들이켰다
쓰디쓴 양주가 식도를 활활 불태웠다.
케인은 그 감각을 억지로 이겨내며 끝내 잔을 비웠다.
그리고 아직 남은 술을 무덤에 흩뿌렸다.
촤악-!
주인이 없는 무덤이 술에 적셔졌다.
케인은 그 앞에 털썩 쓰러져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지독한 피로와 공허가 밀려와 가슴을 두들겼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겨우 이겨낸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모든 게 끝난다.”
제국의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2황자 칸 마드리드는 예정대로 황태자가 되었다.
도르문트 가문은 그 보답으로 제국의 수호가문이 될 것이다.
당최 계획했던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이다.
아마 큰 변수가 없다면, 제 이름과 도르문트는 역사에 길이 남는 상황.
하지만 왜일까.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남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모든 걸, 손에 넣었음에도 오히려 더 심한 갈증을 느꼈다.
케인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만 날 놔주거라 아들아.”
“…….”
“난 최선을 다했다… 이 아비마저 데려갈 것이냐?”
무덤은 대답하지 않았다.
버럭 화를 낸 케인이 칼을 뽑아들었다.
“널 찾기 위해 대륙 전역을 뒤졌다!”
“…….”
“그것도 모자라 금단의 마법에까지 손을 댔다! 하지만 널 찾지 못했다!”
씩씩, 콧김까지 내뿜으며 화를 내던 케인이 검을 휘둘렀다.
초월자의 경지를 앞둔 칼잡이의 일격이 허공을 베어냈다.
쉬익-!
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을 휘둘렀음에도 무덤은 답이 없었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케인이 털썩 쓰러졌다.
손에 쥐어져 있던 칼이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두 눈을 감싼 케인이 오열했다.
“아아… 아들아.”
“…….”
“7년 전에 너는 죽었지만 여전히 날 괴롭히는구나.”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도대체 어떤 한이 있어서, 아비인 자신을 이토록 괴롭히는 걸까.
말이라도 해주면 그 한을 풀어주겠지만 주인이 없는 무덤은 답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에 케인이 거친 괴성을 내지를 때였다.
제 주인 칸 마드리드가 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아들을 다시 만나고 싶으면 깨어난 바이에른의 혈통을 내게 가져와라.]
그 기억에 발작을 멈춘 케인이 중얼거렸다.
“하하. 정말 미치겠군….”
대체 바이에른의 혈통이 뭐길래, 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특별한 혈통이라 해봐야, 고작 혈통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제 주인, 칸 마드리드는 오랫동안 바이에른 혈통에 집착해왔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자가 겨우 혈통 하나에 말이다.
‘그렇다면… 바이에른의 혈통에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단 소리 아닐까?’
고민하던 케인은 눈빛을 번뜩였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제 주인, 칸 마드리드는 신이다.
그 신의 휘광 덕에 자신은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의 말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번 주에 있을, 제 막내 아들과 바이에른 가문의 공녀의 약혼식.
그 약혼식만 끝나면, 바이에른의 유일한 혈족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된다.
만약 제 주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혈족을 이용해 바이에른의 혈통을 일깨우면 그만이고, 그게 아니라면 바이에른 가문을 집어삼키면 되었다.
‘결국 어느 쪽이건… 조금 있으면 모든 게 결판이 난다.’
생각을 끝마친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갔다오마, 아들아.”
“…….”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마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케인도 대답을 바란 것을 아니었기에 몸을 돌려 무덤을 빠져나갔다.
모든 것을 결정지을 약혼식이 이제 단 이틀 남은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 * *
아이린은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의 인생이 이토록 꼬인 것일까.
그 원인을 곰곰이 고민하던 그녀는 곧 어렵지 않게 답을 떠올렸다.
‘오빠… 아더 바이에른이 사라졌을 때부터.’
남들에게는 손가락질 받는 벙어리 공자.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상냥했던 사람.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을 지켜주던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야위었고, 도르문트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
케인 도르문트는 바깥에서 조금씩, 가문을 갉아 먹었다.
가문과 연이 닿아있는 귀족들을 한두 명씩 제 편으로 만들었고, 그 다음은 바이에른의 사업장을 건드렸다.
인맥과 돈줄을 잃어버린 귀족 가문은 아무리 명예가 드높더라도 그 권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바이에른은 조금씩 무너졌고, 결정타는 어머니.
요넬 바이에른이 쓰러진 일이었다.
아더 바이에른이 사라지고 난 뒤, 조금씩 시름시름 앓던 그녀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진 것이었다.
휘청이던 가문의 유일한 기둥이었던 그녀까지 쓰러지자 케인 도르문트는 숨겨왔던 발톱을 꺼내 들었다.
가문의 모든 사업장을 비롯한, 자금줄.
그걸 넘어 바이에른의 영지마저도 집어삼키려 한 것이다.
주인을 잃은 바이에른은 그걸 넋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주인의 부재는,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공작가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어머니와 내 사람들을 지키려면 이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어.’
그녀의 결단 덕에, 케인의 야망은 잠시 멈췄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공작가의 후계자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렇게 가문의 영지를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길 위기에 다시 한번 처했을 때, 케인 도르문트가 독이 든 성배를 건네왔다.
‘내 셋째아들 빌 도르문트와 결혼하면 모든 것을 돌려주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당장 가문과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픈 어머니를 길바닥에 내앉게 할 수는 없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몸뚱이를 파는 게 최선이라 여기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눈물이 터져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케켁 아이린-!”
약혼 상대인 빌 도르문트.
오빠가 사라진 뒤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
그 소름끼치는 시선은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었고, 그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과 이제 며칠 뒤면 약혼을 맺게 되는 것이었으니.
그 탓에 아이린은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오빠. 오빠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린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독한 고독감이 자연스레 그녀를 감쌌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고독감이었다.
그 외로움 속에서, 아이린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져 내릴 때였다.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더 바이에른은 살아있다.]
무너져 가던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내리쬈다.
* * *
두 가문의 약혼식이 공식적으로 발표가 됐다.
제국의 실세로 자리매김한 도르문트.
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바이에른.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두 가문의 약혼식장에 수많은 귀족들이 방문했다.
“허허…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오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바이에른과 도르문트의 약혼식이라니.”
“두 가문이 힘을 합치면, 그 어떤 가문도 이제 감히 대적하지 못하겠군요. 무려 바이에른과 도르문트지 않습니까?”
파티 장에 참석한 귀족들은 이런저런 견해를 쏟아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중얼거렸다.
“힘을 합치긴 개뿔.”
“…….”
“협박 당해서 하는 약혼식을 요즘은 힘을 합친다 표현하나봐요. 안 그래요 공녀님?”
그녀의 질문에 아이린이 넋을 놓고 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렇죠?”
“…공녀님?”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아이린이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 안나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아이린을 다독였다.
“비록 저 간악한 도르문트 계략에 의해 약혼을 하는 거지만, 잠시뿐이에요.”
“…….”
“가주님께서 다시 일어나시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참아보죠. 저도 옆에 있을 테니깐.”
그녀의 말에 아이린이 당황했다
따뜻한 위로였지만, 집사장인 안나가 약간의 오해를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아닌데?’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아이린은 어젯밤, 제 책상에 놓여있던 한 장의 편지를 떠올렸다.
[아더 바이에른은 살아있다.]
단 한 줄의 문장.
하지만 그녀가 받은 충격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오빠가… 살아있다고?’
대체 어떻게?
7년 전, 사라진 아더 바이에른을 찾기 위해 요넬과 바이에른은 대륙 전역을 뒤졌다.
하지만 찾기는커녕, 그와 관련된 작은 단서 하나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아더 바이에른이 갑자기 살아있다니?
아이린은 제 손톱을 살짝 깨물며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미친놈이 공작가의 공녀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겠는가?
저 케인 도르문트도 이런 일은 꾸미지 않을 것이다.
그 탓에 아이린이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낯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공녀. 오래만입니다?”
깜짝 놀란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빛이 나는 금발과, 그 금발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태닝된 건강한 피부를 가진 사내가 코앞에 서 있었다.
아이린은 잠시 눈을 끔뻑이다 소리쳤다.
“레온 오라버니-!”
한 때, 제국의 칠 황자.
지금은 제국 제일의 바람둥이로 소문난 레온이 그녀의 외침에 씩 미소지었다.
* * *
안나가 반가움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소리쳤다.
“황자님! 언제 오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레온이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인사했다.
“오! 안나!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네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똑같죠. 황자님은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죠. 너무 잘 지내서 요즘 뱃살이 이만~하게 나왔답니다.”
레온의 말에 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 불리시는 분에게 뱃살이라니… 무척 안 어울리네요.”
“어휴. 바람둥이라뇨.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늑대라고 불러주시죠.”
레온의 넉살에 안나가 다시 한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린이 눈빛을 반짝였다.
‘레온 오라버니… 오늘도 멋지시구나.’
찰랑거리는 금발.
건강미 넘치는 태닝 된 피부.
거기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합쳐지니, 이런 미남이 또 없을 수가 없었다.
아이린은 그런 레온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와주셨구나… 일이 바쁘셔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레온은 바이에른에 남은 몇 안 되는 은인이었다.
7년 전, 아더 바이에른이 사라지고 난 뒤 모두가 바이에른을 외면할 때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 바로 레온 마드리드였다.
거기다 그는 스스로를 아더 바이에른의 절친한 친우라 소개하며, 아케인 대학의 선배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혼자였던 아더에게 이런 든든한 친우가 있는 줄 몰랐던 아이린은 물론이고 요넬도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그렇게 연을 맺은 지 7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레온은 바이에른 가문을 최대한 보살폈고, 아이린은 그런 그를 아더 대신해 오빠처럼 따랐다.
‘…여자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만 빼면, 진짜 친절하신 분.’
그 탓에 레온을 바라보던 아이린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었을 때였다.
안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레온이 움찔 몸을 떨었다.
“…킁.”
“…?”
“뭔가 쓸데없는 오해를 산 거 같은데… 이거 위험하군.”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레온 오라버니?”
레온이 손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떤 미친놈이 쓸데없는 오해를 해서 말이죠.”
“…?”
아이린이 눈을 끔뻑였다.
그 모습에 레온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그 때, 바이에른의 수호기사.
하루덴의 거친 외침이 파티장에 울려퍼졌다.
“케인 도르문트 각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외침에 아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간이 왔구나.’
이 파티의 주인공이 도착했으니, 이제는 더는 무를 수가 없었다.
빌 도르문트.
제국 최고의 바보와 약혼식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 탓에 아이린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때였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레온이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공녀.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이제 모든 게 다 잘 풀릴 겁니다.”
레온의 말에 아이린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어젯밤 편지. 잘 받으셨습니까?”
“…!”
아이린이 경악해 입을 벌렸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레온이 방긋 미소지었다.
“때가 왔습니다. 바이에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이 말과 함께 레온이 멀어졌고, 그 빈자리를 바이에른의 가신들이 채웠다.
“공녀. 이제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
그들의 재촉에 아이린이 더는 묻지 못하고 상석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귀족들한테 둘러싸인 케인 도르문트가 보였다.
입꼬리를 올린 레온이 중얼거렸다.
“흠… 배우들은 다 도착했고, 이제 쇼가 열릴 일만 남은 건가?”
이 말과 함께 레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니 준비하게 아더 바이에른. 자네의 복귀식. 어디 한 번 성대하게 치러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