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128화 (128/265)

제128화

흰 수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눈을 뜬 채로 굳어진 안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 이 커피… 맛이 제법 독특하군?”

아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흰 수염 씨 커피 좀 즐길 줄 아시네요.”

“뭔가 특별한 비법이라도 들어간 겐가?”

“샷을 8개 정도 넣었어요.”

“샷을? 흠… 그러니깐 이런 맛이 나는 거군. 내 나중에 참고하겠네.”

그는 커피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아예 잔째로 들고 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런데 대가를 받으러 왔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응? 설마 기억 못 하는 건가?”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흰 수염이 혀를 차며 설명했다.

“자네가 바이에른 혈통에 진짜 능력을 깨우치면, 대가를 받으러 온다 하지 않았나.”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 맞네요. 그랬죠. 진짜 능력을 깨우치면 대가를 받으러 오신다고.”

“이제 와서 발뺌하면 안 돼. 자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다고.”

“저 때문에 힘드셨다고요?”

“그럼! 자네가 사고를 한두 개 쳤어야지… 내 생에 이렇게 고개를 많이 숙여 본 건 처음이라고!”

흰 수염의 투정에 아더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흠… 나름 얌전히 있는다고 있었는데, 사과드릴게요. 그런데 흰 수염 씨?”

“응?”

“제가 바이에른 혈통에 숨겨진 몇 가지 능력을 깨우치긴 했는데, 이게 진짜 전부인가요?”

아더의 질문에 흰 수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가 뭘 깨우쳤는데?”

“음… 일단, 제가 흡수한 혈통 능력이 성장하는 방법을 깨우쳤죠.”

“그건 깨우친 게 아니라, 얻어걸린 거 아닌가?”

“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흰 수염의 말대로 흡수한 혈통 능력이 성장 하는 방법은 지니와 우연히 있다, 깨우친 것이었다.

그 탓에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 감시라도 했나요?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흰 수염이 어깨를 으쓱였다.

“감시라기보다는, 별을 바라본 거지.”

“별이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저 하늘 위의 별들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

아더가 흰 수염을 따라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사들이 변명할 때 곧잘 하는 말이네요.”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가래 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자네 말투는 언제 들어도 독특하군.”

“제 말투가요?”

“그래. 뭐, 이거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래서 또 뭘 깨우쳤는데?”

아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피를 마신 상대방의 기억을 빼앗는 능력?”

흰 수염이 박수를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흰 수염 씨가 노리던 바이에른의 능력이 기억을 빼앗는 거였어요?”

“아니! 빼앗는다는 거!”

“…?”

“바이에른 혈통의 진짜 힘은, 혈통을 흡수하는 게 아니야! 빼앗는 거지!”

아더의 눈이 커졌다.

“빼앗는 거요?”

“그래. 이제 바이에른 혈통의 힘이 뭔지 감이 잡히나?’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바이에른 혈통 능력의 힘이 빼앗는 거라고?’

그럼 혈통과 기억 말고도 뭔가를 더 빼앗을 수 있다는 건가?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흰 수염씨는 이 능력으로 뭘 얻고 싶은 거지?’

머리를 긁적이던 아더가 질문했다.

“흰 수염 씨 원하는 게 대체 뭐에요?”

아더의 질문에 흰 수염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말해 주면 재미없지 않겠나?”

“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어허. 모든 답은 스스로 찾아내기에 가치가 있는 법이네.”

“오… 그건 공감 가는 말이군요. 그럼.”

아더가 비스트를 치켜들어 흰 수염의 미간을 겨누었다.

예고도 없이 겨누어진 총구에 흰 수염이 눈을 끔뻑였다.

“으잉?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긴요. 제 몸을 노리려는 사악한 흑마법사를 죽이려 하고 있죠.”

“오… 그건 또 잘도 기억하고 있는 군.”

“흰 수염 씨 같은 분한테 노려지는데 어떻게 기억 못 하겠어요?”

흰 수염이 혀를 내밀었다.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색의 혀가 뱀처럼 휘어져 입술을 핥았다.

“자신 있나?”

“자신이야 있죠.”

“날 죽일 자신이?”

“네.”

아더의 대답에 흰 수염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재미있군…. 처음 만났을 때의 자네는 나에게 겁을 먹어 검도 뽑지 못했거늘….”

말을 흐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더의 총구도 그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그때 흰 수염이 제안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장소를 바꾸는 거 어떤가?”

“장소를 옮기자고요?”

“우리 둘이 부딪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부 죽을 텐데 괜찮겠는가?”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흰 수염 씨… 배려심이 상당히 깊으신 분이었군요?”

“그럼. 조금 있으면 다 내게 될 것들인데.”

“…?”

흰 수염이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입꼬리만큼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더는 저 괴팍한 표정이, 웃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네 몸을 빼앗으면, 다 내 손에 들어올 것들인데 굳이 해칠 필요 있겠는가?”

이 말과 함께 흰 수염이 지니의 뾰족한 귀를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손길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착한 흑마법사는 없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턱짓했다.

“가시죠. 흰 수염 씨. 묻힐 무덤 정도는 선택할 권리를 드릴게요.”

* * *

흰 수염을 따라 문을 넘은 아더는 눈을 치켜떴다.

그도 그럴 게, 흰 수염을 따라 도착한 곳이 매우 익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기… 칠황의 지하도시 아니에요?”

아더의 질문에 흰 수염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맞아. 자네, 여기에도 한 번 왔다 갔었지?”

“네. 그런데 여기 도시, 흰 수염 씨 거였어요?”

“응?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고블린들한테 흰 수염 씨 카드 보여 주니깐 바들바들 떨더라고요.”

흰 수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수집한 노예들 중 한 명이지. 도시를 관리하는 데 필요하다길래, 바란스한테 몇 마리를 쥐여준 기억이 있군.”

“오… 흰 수염 씨 손을 안 뻗친 곳이 없군요.”

“당연하지. 괜히 천년을 살았겠는가? 애초에 아케인의 지하 세력 전부가 내 작품인데.”

아더의 눈이 커졌다.

“아케인의 지하 세력이요? 그럼 칠황과 해적 모두, 흰 수염 씨 작품이에요?”

“그렇지.”

“오호…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아무리 나라 할지라도 이 세상 전부를 읽을 수는 없어. 그러니 종자들이 필요하지.”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하… 그 종자가 칠황과 해적이었군요.”

“맞아. 그들은 제힘으로 그 세력을 일궜다 생각하겠지만, 전부 내 작품이지.”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흰 수염 씨… 제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그렇지? 그러니깐 순순히 몸을 내놓는 거 어떤가?”

“앗. 그건 죄송해요.”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지하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아더는 그 뒤를 따라가며, 텅 비워진 지하도시를 구경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흰 수염은 지하도시에 세워진 거대한 탑을 지나, 작은 쪽문 앞에 멈추어 섰다.

아더도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사이 흰 수염이 쪽문의 고리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흰 수염은 그 문 너머에 있는 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지켜보던 아더는 머리를 긁적였다.

‘천년을 산 흑마법사라 해도, 다 똑같구나.’

그의 제자인 프라킬도 이런 지하실로 가지고 있었는데.

어깨를 으쓱인 아더가 흰 수염을 따라 지하실로 들어갔다.

뚝뚝…

빛 한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사방이 분간되지 않았다.

허나 아더도 흰 수염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 더 이상 시각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감각을 가진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흰 수염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타오른 횃불 두 개가 어둠을 잡아먹었다.

아더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기괴한 문자와 아주 오래된 벽화가 새겨진 거대한 광장이었다.

세월의 흔적을 직격으로 맞았는지 그림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그때 흰 수염이 입을 열었다.

“태초에 신이 내려왔다는 성역이지.”

“…신이요?”

“그래.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이, 처음으로 지상으로 내려온 성역.”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흰 수염 씨 종교를 믿었군요?”

“글쎄. 종교보다는 전설과 구전을 믿는 편이지.”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달라. 종교는 없는 것을 지어낸 거지만, 전설과 구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엮어낸 이야기니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여기서 싸울 건가요?”

“천사와 악마가 싸우려면, 역시나 신 앞에서 싸우는 게 좋지 않겠는가?”

흰 수염이 말이 끝난 순간, 아더의 비스트가 불을 뿜었다.

탕-!

예고 없이 쏘아져 나간 총탄이 흰 수염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아니, 명중한 것처럼 보였다.

“오?”

탄성을 내지른 아더가 흰 수염의 뒤통수를 손 마디 하나의 거리만큼 남겨 두고 멈춘 비스트의 탄환을 흥미 깊게 바라보았다.

“독특한 마법이네요?”

“내 주특기지.”

몸을 돌린 흰 수염이 허공에 멈춘 총탄을 휙,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순순히 몸을 넘겨줄 생각은 없는 거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요.”

“그 해야 할 일 내가 해주지.”

“…흠. 글쎄요? 제가 직접 하지 못하면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도 맞군. 하지만 어차피 빼앗길 바에야, 나하고 거래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방법도 있죠. 흰 수염 씨를 죽이는 방법이요.”

“…자네 정말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겐가?”

“왜 못 죽여요?”

아더가 마검을 뽑아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흰 수염 씨.”

“…”

“그건 당신도 다르지 않아요. 천년을 살아왔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죠.”

흰 수염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넨 참 묘한 데서 날카롭군… 그래. 그럼, 덤비게.”

흰 수염이 손을 까닥거리며 도발했다.

아더는 그 손짓에 따라 마검을 준 손에 힘을 주었다.

치잉-!

한 차례 거칠게 떨린 마검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지팡이를 짚은 흰 수염은 그 일격을 아주 느릿하게 피했다.

“혈통뿐만이 아니라, 재밌는 검도 손에 넣었군.”

이 말과 함께 흰 수염이 지팡이를 두들겼다.

그 순간 광장이 뒤흔들리더니,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흰 수염을 향해 뛰어들려던 아더가 멈칫했다.

“오…? 저건?”

“내가 여태 모은 것들이지.”

흰 수염의 말과 함께 광장에서 난 통로로, 고블린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만 얼핏 수백 마리.

그 탓에 아더의 시선이 가늘어질 때, 흰 수염이 설명했다.

“자네가 봤던 것들이랑, 좀 다를 거야. 저놈들은 꽤 굶주린 상태거든.”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린 흰 수염이 손짓했다.

그 순간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이 울부짖었다.

끼루루룩-!

도열해 있던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이 일제히 아더를 향해 뛰어들었다.

초록빛 난쟁이들의 그 거침없는 돌격에, 아더가 비스트를 치켜들었다.

쾅-!

울려 퍼진 총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고블린들이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죽은 고블린들을 뛰어넘고 기어코 아더를 향해 덤벼들었다.

끼루루룩-!

고블린들이 손에 들린 무기를 휘둘렀다.

아더도 손에 들린 마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고블린들의 무기는 물론이고, 그들의 머리 수십 개가 종이 마냥 잘려 나갔다.

하지만 죽은 고블린보다 산 고블린들이 더욱 많았다.

그것들이 결국 아더의 몸을 물고 할퀴고, 때리고 어떻게든 죽이려 들었다.

물론 아더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흰 수염이 흥미롭게 지켜볼 때, 아더의 주변으로부터 서 있던 고블린들이 갑자기 폭사했다.

“…?”

흰 수염이 눈을 끔뻑였다.

뭐지? 왜 갑자기 고블린들이 저렇게 죽어 나간 거지?

그때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쾅-!!

거친 폭음과 함께 아더를 향해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움찔 멈추어 섰다.

끼루루룩-!

한 박자 늦은 비명과 함께 고블린들이 몸을 뒤틀더니 그대로 즉사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아더를 향해 덤벼들었던 고블린 전부가.

그 광경에 정신을 차린 흰 수염이 놀라 중얼거렸다.

“번개? 허허… 이거 생각 못 했군.”

그의 말에 고블린의 피가 묻은 소매를 탁탁 털어내던 아더가 말했다.

“슬슬 제대로 가 볼까요?”

흰 수염의 눈꼬리가 휘었다.

“제대로 가 보자고?”

“네. 지금까지 준비운동 아니었어요?”

흰 수염이 눈이 끔뻑여졌다.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을 죽인 게 준비운동이라고?

아더의 표정을 살펴보던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정말 재밌군. 바이에른 혈통만 아니었다면, 진짜 거두어들이고 싶을 정도로.”

아더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이라도 친구로 남을 수 있어요. 흰 수염 씨.”

“그건 내가 사양하지.”

웃음을 멈춘 흰 수염의 두 안광이 붉게 타올랐다.

“그럼… 자네 말대로 제대로 시작해 보지.”

이 말과 함께 신전이 뒤흔들렸다.

그 이변에 아더의 눈이 치켜떠질 때, 흰 수염이 서서히 날아올랐다.

“죽이지는 않겠네. 그러니 열심히 발버둥 치면서 깨닫게나. 때로는 이겨낼 수 없는 [운명]이라도 것이 있다는 걸.”

흰 수염의 경고에 아더가 웃었다.

“혀가 기네요, 흰 수염 씨. 잔말 말고 덤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