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아더의 오해는 타당한 것이었다.
어느 누가 친구에게 편지를 남기는 데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언을 붙인단 말인가?
누가 보더라도 러브레터라 의심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탓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안절부절했지만 곧 오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더 설렌 거 아니지?]
편지에 적힌 엘린의 첫 인사말.
아더는 눈을 끔뻑였다.
“어라?”
머리를 긁적인 아더가 재빨리 다음 문장을 읽었다.
[제국 북부는 편지를 남길 때,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꼭 붙이거든.]
[그래서 나도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적기는 했는 데 혹시 설렌 거 아니지?]
아더가 탄식을 터트렸다.
‘엘린… 이 무서운 여자.’
설마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하지만 기분은 그렇게 썩 나쁘지 않았다.
아더는 은은한 미소를 띈 체 다음 문장을 읽었다.
[대련 끝나고, 또 찾아오겠다 해놓고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엘린의 추궁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대련 끝나고 엘린 찾아가기로 했는데, 그 뒤로 얼굴 한번을 못 봤으니.’
입맛을 쩝 다신 아더가 편지를 계속 읽어내려갔다.
편지의 양은 상당했는데, 그 때마다 엘린의 마음도 이리저리 변했다.
처음에는 대련이 끝난 뒤, 찾아오지 않은 자신에 대한 서운함.
그다음은 어수선한 지금 상황에 대한 걱정.
마지막은 끝까지 얼굴을 보고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엘린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구나.’
생각과 함께 아더가 그녀가 남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처음에 심술을 부려서 미안해.]
[하지만 이해하지? 아더가 먼저 잘못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사랑하는 아더 바이에른에게 라는 말을 봤을 때 어땠어?]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낼 때 꼭 감상을 넣어 보내줘 기대하고 있을게.]
아더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당연히 떨렸죠 엘린.”
당신 같은 멋진 사람에게, 사랑하는 말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잠시 고민한 아더가 서랍을 뒤적거려, 새하얀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흠… 첫 인사말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생각해보니 이렇게 편지를 적는 건 처음이다.
궁리하던 아더는 곧 눈빛을 반짝였다.
[사랑하는 엘린 레버쿠젠에게]
첫 문장을 완성한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당할 수 없죠 엘린. 당신도 당해봐요.”
그 다음은 쉬웠다.
처음에는 사과를, 중간에는 설명을, 마지막에는 엘린과 마찬가지로 그리움을 담았다.
그렇게 편지를 완성한 아더는 중얼거렸다.
“아쉽네… 엘린이랑도 얼굴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말을 흐린 아더가 곧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뭐, 다음 학기에 보면 되니깐.”
방학이 끝나면 어차피 아케인 대학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때 엘린과 오늘 있었던 아쉬움을 털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가 편지를 밀봉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들! 수도로 올라온다고!?]
아더는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 요넬 바이에른의 목소리에 살포시 미소지었다.
“네 어머니. 내일 수도로 올라가요.”
* * *
전화를 받은 요넬은 어쩔 줄 몰라했다.
[나 때문에 너무 먼 길 오는 거 아니니?]
그녀의 질문에 아더가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어차피 편하게 기차 타고 가는 건데 먼 길이라니요.”
[그렇지만… 또 장거리 여행은 많이 피곤하잖니?]
“피곤하다고 어머니 얼굴은 안 볼 수 없죠. 아이린도 보고 싶고.”
아더의 말에 요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린 바꿔줄까?]
“아이린이요? 저야 좋죠.”
수정구 너머, 요넬의 목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아더는 미소를 띤 채 그 기다림을 즐겼다.
잠시 후, 한 소녀의 목소리가 수정구 너머로 울려 퍼졌다.
[오빠?]
아더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응 아이린.”
[진짜 오빠야?]
“응 진짜 오빠야?”
[…으아아앙!]
갑작스러운 아이린의 울음소리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그 사이 수정구 너머로 요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린. 오빠 조금 있으면 올 거라니깐.]
[그치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어머니.]
[씁! 오빠가 어디 놀러 간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떼를 쓰는 거니! 바이에른의 공녀가 그러면 안 돼!]
둘의 대화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린… 날 많이 보고싶어 했구나.’
하긴, 이때쯤 아이린은 유독 자신을 많이 따랐다.
보통의 남매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지만, 아이린과 자신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우리 둘 다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니깐.’
그래서 보통 남매보다 서로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다.
물론 지금의 자신은 예전과 달리 훨씬 성숙해졌기에 그렇지 않았지만, 아이린은 다를 것이다.
그 탓에 아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보고 싶네… 아이린도 어머니도 보고 싶어.’
그렇게 오래 떨어져 지내게 아닌 데, 막상 돌아간다 생각하니 예상치 못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아더는 그 감정을 즐기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응?]
“선물 뭐 사갈까?”
아더의 질문에 아이린이 훌쩍이는 목소리 그대로 대답했다.
[…그냥 오빠 보고 싶어.]
“그래? 그러면 빈손으로 가도 돼?”
[…응. 그냥 오빠만 와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요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물은 됐으니깐, 몸 조심히 올라만 오너라 아더. 그게 우리한테는 최고의 선물이니깐.]
그녀의 말에 아더가 방긋 웃었다.
“아! 어머니 선물은 준비되어있어요.”
[…내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네. 들으면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수정구 너머, 요넬이 눈을 끔뻑였다.
‘우리 아들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잠시 고민한 요넬이 눈빛을 빛냈다.
‘설마 이번 아케인 대학 중간고사 시험을 잘 본 건가?’
지금 당장 떠오르는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탓에 요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후… 그래? 그럼 아주 기대를 하고 있어야겠구나.]
“그럼요.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 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중, 요넬이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이런… 이제 업무를 처리하러 가봐야겠구나.]
아더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그 감정을 티를 내지 않았다.
요넬도 아쉬워하는 마당에, 자신도 아쉬워해버리면 수정구의 통화를 끊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럼 며칠 뒤에 뵐게요.”
아더의 말에 요넬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아들.]
“네?”
[항상 사랑해.]
요넬의 말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어….”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아더가 머리를 긁적이다, 간신히 대답했다.
“저도요 어머니.”
아더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저도 너무 사랑해요 어머니.”
* * *
아케인을 떠나는 당일.
휴가를 떠났던 지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검은색 선글라스에 웬 야자수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복장이에요 지니?”
“해괴한 복장이라니요, 공자님. 휴양지에 갔다 왔는데, 이 정도 복장은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지니 패션센스는 꽝이네요.”
지니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트렸지만, 이미 몸을 돌린 아더였다.
분주히 짐을 싸고 있는 안나가 보였다.
“이것도 챙겨주기고, 저것도 꼭 들고가야 해요! 이건 공작 각하 선물! 이건 시종장님 선물….”
그 어느 때보다 열의가 넘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아더가 지켜보던 때, 지니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떠나시는 거예요?”
“그렇죠?”
“아케인 수도?”
“네.”
지니가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양지에 조금 더 있다 오는 건데 아쉽네요.”
“왜요?”
“공자님이랑 안나가 떠난 이 집에 저 혼자 있어서 뭐 해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무슨 소리예요, 지니. 지니도 같이 가야죠.”
“…네?”
“저희 집 메이드잖아요. 가서, 어머니에게 인사도 드리고 집안 분들에게 정식으로 소개도 해야죠.”
아더의 설명에 지니가 놀라 입을 벌렸다.
“지, 진심이세요 공자님?”
“……? 그럼 진심이죠.”
지니가 입을 다물었다.
‘나, 나 같은 뒷거리 출신을 정말로 바이에른 공작가에 데려간다고?’
바이에른 가문쯤 되는 유서 깊은 공작가면, 메이드 조차 신분과 능력을 따져서 뽑지 않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고민에 지니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두 귀를 쫑긋거릴 때, 아더가 선언했다.
“그러니깐 얼른 그 해괴한 야자수 셔츠 좀 벗고 짐이나 정리해요. 나중에 뭐 빠트렸다 하지 말고.”
등을 떠밀린 지니가 제방이 있는 위층으로 얼떨결에 올라갔다.
그 사이 바이에른 가문의 사람들과 안나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끝났어요, 공자님! 이제 출발하면 돼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으로 출발하죠, 다들.”
이 말과 함께 위층에서 후다닥 내려온 지니를 끝으로 바이에른 가문 사람들이 마차와 리무진에 올라탔다.
저택에 홀로 남은 아더는 고개를 돌려, 텅 빈 집안을 바라보았다.
“…….”
잠시뿐인 이별이라지만,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 탓에 아더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저택을 바라보던 때, 안나가 소리쳤다.
“공자님 이제 출발해야 해요! 얼른 오세요!”
안나의 외침에 아더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바이에른 가문의 깃발이 휘날렸다.
펄럭-!
그 깃발과 함께 저택을 떠난 바이에른 가문의 긴 행렬이 아케인의 역으로 향했다.
뿌우우우-!
때마침 제국의 수도 행 열차가 도착했는지 긴 경적소리가 들렸다.
아더가 그 경적소리를 들으며 리무진에서 내리자, 기관사로 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이번 여행을 맡은 기관사입니다. 아케인은 즐거우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아더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네. 너무 즐거웠어요.”
“다행이군요.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기관사의 안내에 따라 VIP실로 안내되었다.
탁 트인 좌석에, 널찍한 통유리에서 보이는 전경이 일품이었다.
같이 따라 들어온 지니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저 이런 좌석 처음 앉아봐요.”
옆에 있던 안나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후후 지니. 벌써 이렇게 놀라면 곤란해요. 수도에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게 많으니깐!”
“…진짜요 안나? 저 태어나서 제국 수도는 처음 가봐요.”
“그럼 엄청 기대해도 좋아요! 아케인도 크지만, 제국 수도는 훨씬 더 크니깐!”
지니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안나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커피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응? 그래주면 좋지.”
“샷 다섯 개 추가해서 말이죠?”
“오늘은 특별히 세 개 더 추가해줘.”
안나가 작게 입을 벌린다.
‘언제 봐도 놀랍단 말이지… 커피에 샷 8개를 넣어서 마실 수가 있나?’
생각과 함께 안나가 몸을 돌렸다.
맞은 편에 앉은 지니가 탄성을 터트렸다.
“공자님 열차가 출발해요!”
그녀의 말에 아더도 시선을 돌렸다.
뿌우우우-!
긴 경적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더는 점점 멀어지는 아케인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처음 올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자연스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윌렛 어르신을 만나 여러 의뢰를 수행한 일.
예니카 헤이즐이란 광신도 수장을 만난 일.
레온이라는 어딘가 음침한 제국의 황자를 만난 일.
하나하나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벤트이자 추억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새로운 인연을 쌓았다.
앞으로 그 인연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크게 만족한 아더였다.
‘거기다 원래 목적도 충분히 달성했고.’
아케인에 온 가장 큰 목적은 복수를 하기 위해 새로운 혈통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허나 새로운 혈통들을 모으는 걸 넘어, 이안 도르문트 라는 전생에 죽이지 못했던 원수의 목을 베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뿐일까? 원숭이, 아레스 아레키스, 함부르크 에디슨. 이번 생에 꼭 죽여야 할 사람들도 죽일 수 있었지.’
복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원래의 목적도 달성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아직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더는 아케인을 떠나기 전 만났던 사람들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예니카도 다시 만나고 싶고, 윌렛 어르신한테 술도 배우고 싶어. 치즈이 교수님의 조교 생활도 기대되고 쥴리에게 혈통을 가르쳐줄 것도 기대 돼.’
거기다 아케인에는 아직 수많은 원수들이 남아 있었다.
그 탓에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대되네. 아케인에 다시 돌아오면, 또 무슨 일이 펼쳐질까?’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흰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른 노인이 앞에서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아더의 인사에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는군?”
그의 질문에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이번에는 당황하고 있어요.”
“그래? 표정은 안 그래 보이는데?”
“진짜에요. 이때 흰수염 씨가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흰수염이라 불린 노인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들어 올렸다.
지켜보던 아더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비어있던 흰 수염의 안구에 새로운 두 눈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더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오… 눈 새로 맞추셨네요?”
“자네를 위해 아끼던 걸 특별히 꺼내왔지.”
“저를 위해서요? 에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네. 나도 슬슬 시간이 없고, 때가 되었거든.”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때요? 무슨 때요?”
흰수염이 빙그레 웃었다.
“대가를 받으러 왔네. 바이에른의 작은 천사여(天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