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126화 (126/265)

제126화

밤이 내려앉은 B구역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아더와 윌렛은 그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이번에 떠나면, 꽤 오래 떠나있을 건가?”

“글쎄요? 아마 아케인 대학 방학이 끝나면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럼 한두 달 정도 있다 돌아오겠군.”

이 말과 함께 윌렛이 시가를 꺼내들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더가 시가의 끝을 살며시 잡았다.

윌렛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뭐하는 거야?”

아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술도 끊었는데, 담배도 끊으면 좋지 않겠어요, 어르신?”

“…갑자기 잔소리를 한다고?”

“윌렛 어르신, 볼 때마다 흰 머리가 많이 늘어나서요.”

“…….”

“나이도 있으신데, 몸에 안 좋은 것들은 이제 멀리하셔야죠.”

윌렛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흰머리가 누구 때문에 난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 때문인데요?”

“됐네.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이번에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윌렛이, 손에 들린 시가를 다시 품속으로 넣었다.

“쥴리랑 오늘 외출했다면서?”

“아… 네. 둘이서 저녁도 먹고 좀 돌아다녔어요.”

“많이 좋아하지?”

“그래보이던데요?”

“그러게 좀 자주 오지 그랬나.”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 걸 두고 핑계라 하는 거야.”

“…쩝. 할 말이 없네요.”

대화는 끊이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를 떨던 윌렛과 아더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사이엔가 B구역 끝에 다다라 있었기 때문이다.

윌렛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돌려 아더를 바라봤다.

“이번에 떠났다, 아케인에 돌아오면 술이나 한잔 하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르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미성….”

“어른이 주는 술은 먹어도 돼.”

“…?”

“어른이 주는 술은 먹어도 된다고. 그렇게 다들 술을 배워 가는 거야.”

아더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사이 윌렛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때는… 좀 더 진득하게 이야기 해보자고 아더 바이에른.”

윌렛의 말에 아더가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그 상태로 잠시 윌렛을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아더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어요, 어르신.”

아더가 윌렛의 손을 마주잡았다.

“다음 아케인에 돌아오면,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죠. 그 때 어르신에게 술도 배울게요.”

* * *

윌렛과의 만남을 끝마친 다음 날, 치즈이 교수를 만나기 위해 아케인 대학으로 향했다.

바이에른 전용 리무진을 타고 학교의 입구에 도착한 아더는 놀라 중얼거렸다.

“와… 왜 이렇게 한산하지?”

항상 학생과 교수들로 북적거리던 거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무리 방학이라 하지만, 이 넓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치즈이 교수님한테 미리 연락해서 약속을 잡지 않았다면 못 만날 수도 있었겠는데?’

생각과 함께 치즈이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지식의 탑]으로 향했다.

“오… 아더 바이에른… 학생.”

연구실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치즈이 교수가 활짝 웃으며 아더를 반겨주었다.

반대편에서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있던 치즈이 교수의 개인 조교도 까닥 고개를 숙였다.

아더는 두 사람을 향해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요…. 어서 와요….”

평소와 다름없이 말을 늘어트린 치즈이 교수가 자리를 권했다.

아더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자 치즈이 교수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강의가 종료되고… 처음 만나는 건가요?”

“네. 정확히는 실험 발표가 끝나고 난 뒤에요.”

“오호… 그렇군요. 맞아요. 실험 발표가 끝난 뒤 날이… 저희가 마지막으로 만났었죠.”

이 대화를 시작으로 아더와 치즈이 교수가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었다.

논문을 정리하던 조교가 그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독특한 친구네. 황금같은 방학 기간에 왜 치즈이 교수님을 찾아오지?’

비단 깐깐하기로 소문난 치즈이 교수라서 그런 게 아니라, 방학 중에 교수를 찾아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설마 학점 때문에 찾아온 건가?’

조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종종 그런 학생이 있기는 하지만, 깐깐한 치즈이 교수에게는 통하지 않은 얄팍한 수였다.

오히려 기존에 받았던 점수보다 더 깎아내려 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조교는 다시 제 일에 집중하려는 순간이었다.

치즈이 교수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더 바이에른 학생? 혹시 다음 학기부터… 제 조교를 해볼 생각 없습니까?”

조교의 펜촉이 꺾였다.

고개를 든 그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치즈이 교수를 바라보았다.

‘무, 뭐? 조교를 권한다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치즈이 교수가 직접 나서서 조교를 구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 사람을 들이는 데 엄청나게 까다로워서 직접 조교를 뽑는 일이 거의 없다 들었는데….’

지금 조교 자리에 앉은 자신조차, 이곳으로 발령이 나지 않았더라면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 탓에 조교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드, 드디어… 후임 조교가 들어오는 건가?’

다른 교수님들 같은 경우에는 조교만 3~4명을 대리고 있었다.

엄청난 학생 수에 비해 교수의 숫자가 너무 적어,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조교들의 수가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치즈이의 교수의 조교는 자신 혼자뿐이다.

덕분에 퇴근도 하지 못하고 매일 같이 밤을 지새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치즈이 교수가 새로운 조교를 뽑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그 치즈이 교수님 조교를 저 친구가 과연 하려나?’

문득 든 생각에 조교가 신음을 흘렀다.

생각해보니 그 치즈이 교수의 조교를 저 잘생긴 청년이 수락 할 리가 없었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치즈이 교수님 조교를 누가 하려 하겠어?’

조교인 자신조차 학위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때려 쳤을 것이다.

그만큼 치즈이 교수의 조교는 힘든 일이었다.

그 때 아더의 입에서 놀랍게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조교요?”

“네… 연구도 같이 하고 여러 자료도 볼 수 있고… 조교가 된다면 아더 바이에른 학생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흠… 이야기만 들어보면 매력적인데요?”

조교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지, 진짜 치즈이 교수의 조교 자리를 수락한다고?’

혹시 저 잘생긴 청년,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 걸까?

신입생으로 보이는 데 그 귀중한 시간에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무슨 상관이야! 나야 후임 조교만 들어오면 좋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아더의 대답에 그의 표정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제가 개인 시간이 별로 없어서… 너무 좋은 기회인데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교수님.”

아더의 말에 치즈이 교수의 표정도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흠… 그렇군요. 하긴, 조교 자리를 맡으면 많은 시간을 뺏기니깐….”

“죄송해요 교수님…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괜찮습니다…. 배움이란 것도 결국 뜻이 섰을 때 해야 하는 법… 굳이 시기가 많지 않은 데 억지로 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활짝 웃은 치즈이 교수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럼 그렇지. 치즈이 교수의 조교 자리를 어느 미친놈이 수락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조교가 다시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만약 저 친구가 안 들어오면, 새로운 조교가 들어오는 데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할 까?'’

6개월? 1년?

아니 어쩌면 조교 직에 있는 동안 평생 후임 조교가 안 들어올지 몰랐다.

까탈스러운 치즈이 교수의 성격.

험난하기로 소문난 치즈이 교수의 조교 생활.

지금 호기심을 보인 청년을 놓치면,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었다.

그 순간, 조교의 펜촉이 다시 한 번 꺾였다.

‘그, 그럼 앞으로 남은 조교 생활 3년 동안… 평생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고?’

연구 과제 때문에 밤을 새느라 일어나는 피부 트러블.

밥을 제 때 챙기지 못해, 매일 같이 달고 사는 위장약.

거기다 몇 달 전 부터 빠지기 시작한 머리털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조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 다른 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찾아온 '탈모'만큼은 그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혼도 못했는데 탈모?’

입을 벌린 조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수님!!”

“…?”

“제가… 제가! 저 친구의 몫까지 일하겠습니다! 그러니 임시 조교 자리라도 줘보는 건 어떨까요!”

그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치즈이 교수의 눈이 커졌다.

아더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치즈이 교수의 조교가 황급히 설명했다.

“시간을 뺏기는 게 문제면,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 보는 겁니다! 그러다 적성에 맞으면 조금 더 일을 맡겨보는 거고! 일단 시작이 중요하니깐….”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치즈이 교수가 질문했다.

“자네가… 아더 바이에른 학생의 몫까지 책임진다고요?”

“네! 어차피 지금도 하는 일이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오호…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군요. 그런데 일루나 조교?”

“네?”

“자네가… 그렇게 후임 조교에… 관심이 많을 줄 몰랐습니다.”

일루나라 불린 조교가 인상을 팍 일그러트렸다.

‘당연히 관심이 많지!! 관심이 없을 수가 있겠냐!’

이 젊은 나이에 탈모가 오는 중인데!

하지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일루나 조교는 애써 입가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안 그래도 혼자 연구하기 적적했는데, 후임 조교가 들어오면 저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흠… 그건 그렇군요. 그럼 아더 바이에른 학생.”

치즈이 교수가 시선을 돌려 질문했다.

“학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더가 잠시 고민하다, 눈빛을 반짝였다.

‘흠… 시간을 뺏기지 않으면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안 그래도 치즈이 교수의 강의는 많은 영감을 주고 있었다.

기회만 된다면 그의 밑에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배워보고 싶었다.

고민하던 아더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일까지 도맡아 해주신다면…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조교.”

치즈이 교수가 탄성을 터트렸다.

“오… 그렇습니까?”

“네. 언젠간 치즈이 교수님이랑 같이 연구도 한 번 해보고 싶었고요.”

아더의 말에 일루나 조교가 흘려나오려는 감격의 눈물을 애써 감추었다.

그 사이 치즈이 교수는 크게 만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당장, 교수 회의에 이 사실을 알려… 아더 바이에른 학생이 제 조교가 되었다는 걸 알려야겠군요.”

살며시 미소 지은 치즈이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다음 학기… 잘 부탁드립니다. 아더 바이에른 학생.”

아더도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 * *

치즈이 교수와의 만남을 끝낸 아더는 만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교라… 뭔가 기대되는데?’

사실 대학에 들어왔지만, 그간 대학에서 해야 할 마땅한 일들을 하지 못한 아더였다.

‘친구들끼리 놀러가거나… 아니면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취미를 공유한다던가.’

물론 그보다 더 값진 일들을 했기에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학기부터 조교를 맡게 되면, 알찬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학, 그것도 아케인 대학에서 조교 활동이라니.

이 얼마나 건전하고, 대학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일이라 말인가?

그 탓에 오늘 있었던 결정에 다시 한 번 만족한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을 때였다.

앞좌석에 앉은 운전기사가 슬며시 질문했다.

“공자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의 질문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더가 대답했다.

“레버쿠젠 가문의 자택으로 가주세요.”

“예, 레버쿠젠 가문의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리무진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더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엘린만 만나면, 모두 다 만나는 건가?’

아더의 눈꼬리가 살며시 휘었다.

‘엘린은 뭐하고 지내려나….’

대학에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

이번 생에 들어와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

그런 그녀를 떠올리며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게 내달리던 리무진이 멈추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공자님.”

아더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전에 보았던 꽃에 휩싸인 아름다운 저택이 보였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저택의 광경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릴 때, 마당을 쓸던 시녀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더 바이에른 공자님?”

“네. 안녕하세요?”

“…혹시 아가씨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린 만나러 왔는데, 혹시 안에 있나요?”

시녀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아가씨께서 며칠 전에 제국으로 떠나셨어요.”

“네?”

“홀란 레버쿠젠 각하께서 급히 호출하셔서… 경황도 없이 떠나셨어요.”

아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설마 엘린이 벌써 떠나버렸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더가 당활 할 때, 시녀가 살며시 웃었다.

“…후후.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마세요.”

“…?”

“아가씨게서, 편지를 남기셨거든요. 혹시 아더 바이에른 공자님이 찾아오시면 드리라고.”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그 사이 종종걸음으로 저택으로 들어간 시녀가 꽃모양으로 장식된 편지 한장을 조심스럽게 들고왔다.

편지를 받아든 아더가 정갈한 필체로 적힌, 첫 인사말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아더 바이에른에게]

“…?”

잠시 눈을 끔뻑인 아더가 중얼거렸다.

“저기 시녀님?”

“네?”

“이거 정말 저한테 온 편지 맞나요?”

시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공자님 편지가 맞답니다. 며칠을 고민해서 쓰신 편지에요.”

그녀의 말에 아더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거….’

아더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러브…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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