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를 맞았는데 아무렇지 않네?’
원숭이의 저주는 그 테이큰조차 힘들어하던 저주가 아니었나?
그 탓에 아더가 의아해할 때였다.
제 흉부로부터 갑작스러운 빛이 터져 나왔다.
우웅-!
눈을 치켜뜬 아더가 가슴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흰수염이 건네주었던 검은 색 카드가 집혔다.
“오…?”
그 검은색 카드에서 밝은 빛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 카드가 저주를 막아준 건가?’
믿기지 않은 데 상황은 그래 보였다.
되돌아온 원숭이의 저주는 분명, 심장을 두들겼다.
허나 그 안쪽으로 파고들기 전, 이 검은 색 카드가 막아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지만, 아더는 납득 하고서 입꼬리를 올렸다.
‘흰수염 씨 카드라면 그럴싸한데?’
원숭이도 80년을 수련한 대단한 흑마법사지만, 흰수염은 무려 천년을 수련한 흑마법사다.
마법사의 강함이 수련한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걸 고려하면 둘 사이에는 아득한 격차가 있었다.
‘그런 흰수염의 카드라면, 원숭이의 저주를 한 번쯤은 막아낼지도 모르지.’
이런 아더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파아앗-!
빛을 내던 검은 색 카드가 불에 타 없어졌다.
그와 동시에 뿜어져 나온 검은 색 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지켜보던 아더는 탄성을 터트렸다.
“진짜네…. 흰수염 씨 카드가 저주를 흡수했던 거였어.”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쩝… 흰 수염 씨한테는 매번 이런 순간에 도움을 받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흰 수염도 순수한 의도로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나한테 대가를 받으러 올 테니깐 그때 한 번에 계산해 드려야겠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시선을 돌렸다.
원숭이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야? 왜 멀쩡한 거지? 분명 쓰러져야 하는데 어째서….”
원숭이의 말에 아더가 칼을 휘둘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도르문트 기사가 그 일격에 쓰러졌다.
“컥!”
짧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린 그를 뒤로한 채 아더가 걸어 나왔다.
넋을 놓고 있던 원숭이가 흠칫 놀랬다.
“지, 진짜 아무렇지 않다고?’
원숭이의 말에 아더가 대답하는 대신 비스트의 방아쇠를 당겼다.
쾅-!
불이 뿜은 총구와 함께 원숭이가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탄환이 원숭이가 조금 전 서 있던 자리를 박살 내 버렸다.
“…시발! 뭐야 저놈 대체!”
거친 욕설을 내뱉은 원숭이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여유는 이미 날아간 뒤였다.
그는 흉측한 미간을 더욱 구기며, 지팡이를 짚었다.
‘젠장! 내가 상대할 놈이 아니야 저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린 원숭이가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려던 순간이었다.
공간 도약을 통해 그의 앞에 나타난 아더가 방긋 웃었다.
“어딜 가려고요?”
“……!”
입을 벌린 원숭이가 경악했다.
그와 동시에 내려찍어진 아더의 검이, 원숭이의 베리어와 거칠게 격돌했다.
파지직-!
검기과 베리어 사이에서 거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불꽃만 튀었을 뿐, 베리어는 아더의 검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금이 간 베리어가 부서지고, 원숭이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끼에에에엑!!”
원숭이의 입에서 괴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사이 마무리를 짓기 위해 아더가 칼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원숭이의 마법이 갑작스럽게 완성됐다.
파앗-!
시전 된 텔레포트 마법과 함께 원숭이가 사라졌다.
쩍!
아더의 마검은 애꿎은 바닥만 박살냈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중얼거렸다.
“이 와중에 텔레포트라니, 역시 원숭인가.”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는 게 그 별명과 똑 어울렸다.
그때 레온이 허겁지겁 다가와 머리를 감싸 맸다.
“젠장… 설마 그 상태에서도 마법을 쓸 줄이야. 완전히 당해버렸군.”
레온의 말에 아더가 눈을 흘겼다.
“레온.”
“응?”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
아더의 타박에 레온이 당황했다.
“오, 왜 또! 이번에 뭘 못했는데!”
“분명 제가 기사를 마크하고 원숭이는 레온이 맡기로 했잖아요.”
정곡을 찌른 아더의 말에 레온이 변명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
잠시 아더의 눈치를 본 레온이 우물쭈물 사과했다.
“…미안해. 나도 최선을 다했는데, 저 놈의 마법이 더 빨랐어.”
아더는 그런 레온을 더 이상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전 이대로 이안을 죽이러 가야 하니, 원숭이는 레온이 맡아주세요.”
“…킁. 할 말이 없군. 이렇게 된 이상 원숭이는 내가 마무리 짓겠네.”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죠?”
“못하더라도 해야지. 자네는 이대로 이안을 방해하러 가야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원숭이는 내가 마무리 짓겠네.”
레온의 말에 아더가 잠시 고민하다,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의 눈이 커졌다.
“…지팡이?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레온의 질문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전에 죽인 마법사한테서 빼앗은 거예요. 이거 빌려줄 테니깐, 이번에는 원숭이를 꼭 죽여 오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아더가 비스트를 위협적으로 까닥였다.
레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반드시 죽일게. 그런데 이 지팡이를 마법사한테서 빼앗았다고?”
“네. 상급 불의 정령이 깃든 지팡이에요.”
“…상급 불의 정령? 지, 진짜야!?”
“네. 원숭이를 죽이는 데 도움을 줄 거에요.”
아더의 말에 레온의 입이 벌어졌다.
‘정말로 이 지팡이가 상급 불의 정령이 깃든 지팡이라고?’
만약 사실이라면, 수천 골드를 호가하는 엄청난 아티펙트였다.
‘아니… 이런 물건은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데 도대체 누굴 죽인 거지?’
레온이 잠시 고민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이 지팡이가 어디서 났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도망친 원숭이 쪽이 더 급하고 중요했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흑마법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레온이 지팡이를 받아들며 말했다.
“잘 쓰지 아더. 원숭이는 꼭 죽이겠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요, 레온.”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자리를 벗어나려다 멈칫했다.
‘아더 바이에른이 이안 도르문트를 죽이는 걸 내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군.’
말을 흐린 레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내가 실수한 거니, 떼를 쓸 수도 없고… 원숭이로 만족해야지.’
이안을 죽이는 현장에 있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원숭이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레온이 몸을 돌렸다.
“자… 그럼 가볼까.”
사악한 짐승을 사냥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광신도들의 도시를 습격한 뒤, 이안은 후방에 남아있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피의 성배… 그 물건이 뱀파이어한테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 성배와 얽힌 전설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적합한 주인이 성배를 가질 경우, 영생을 거머쥘 수 있다던가.
드래곤에 필적하는 주문을 얻을 수 있다던가.
너무나도 허무맹랑해, 전설이라 치부되는 소문들이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전설이라 불리는 것 중에서 가끔 진짜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일은 원숭이와 도르문트 기사들에게 맡겨 두고 성배부터 직접 회수하기로 했다.
성배가 있는 곳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피의 성배는 뱀파이어들의 성물… 그렇다면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곳에 숨겨뒀겠지.’
이안은 곧바로 이 기형적인 도시에서 가장 거대한 신전으로 향했다.
끼이이익…
신전에 도착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던 대문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쪽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 이런 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이안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툭. 툭. 툭.
그를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일직선의 통로였다.
그 통로에 이안과 10명의 기사들의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향을 헤맬 걱정이 없었던 탓에 규칙적인 소음이었다.
그런 것치고, 통로에 내려앉은 눅눅한 어둠 때문에 한 치 앞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이안과 기사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눅눅한 어둠이, 끈적해지고 기이한 웃음소리가 이따금 귓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이변 속에서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또 대문인가?’
잠시 턱을 쓰다듬은 이안이 검을 뽑았다.
스릉…
도르문트가 약탈한 어느 왕가의 보검.
그 칼날 자체가 검기와 같다 알려진, 명검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이안은 잠시 자세를 고쳐잡고서, 그 명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직-!
이안의 일격에 어둠이 갈라지고 대문이 반으로 쪼개졌다.
잠시 검을 턴 이안이 반으로 갈라진 대문을 넘었다.
그 순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기 있었군.”
작은 제단 위, 이 먼 북방으로 오게 한 원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피의 성배, 뱀파이어들의 보물이었다.
이안이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겨 성배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짙은 피비린내가 신전 내부를 감쌌다.
“……!”
흠칫 놀란 이안이 물러섰다.
그런 그의 곁을 10명의 기사들이 둘러쌌다.
그 사이 이안이 시선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호수? 그런데….”
피로 된 호수라고?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성배 뒤편에 있던 호수에서 하나의 인영이 떠올랐다.
벌거벗은 여자였다.
“…….”
잠시 당황한 이안이 입을 다물 때, 피의 호수에서 빠져나온 여자가 손뼉을 쳤다.
짝-!
그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그녀의 몸에 세련된 검은 수도복이 둘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이 침묵을 깨고서 질문했다.
“…네년이 그 뱀파이어의 공주인가 보군.”
이안의 질문에 예니카 헤이즐이 눈을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호위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답다….’
적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지만, 눈을 뜬 여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백옥 같은 피부나, 회색빛이 감도는 머리칼.
오똑한 코에 앵두 같은 입술.
여신이 있다면, 지금 눈앞의 여자를 칭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 예니카 헤이즐이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도르문트의 공자여.”
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 알아?”
“저희 일족의 성물을 훔쳐 간, 도둑놈을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이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군. 도둑놈이 주인을 보고 도둑이라 하다니.”
“양심이 없는 것도 도르문트의 상징이죠.”
“…그런 말을 도르문트 일족 앞에서 함부로 지껄여도 되겠나?”
“왜 안 되겠습니까?”
말을 흐린 예니카가 웃었다.
“지금부터 당신을 죽이고 일족의 원한을 갚을 건데.”
이 말과 함께 피의 호수가 거칠게 진동했다.
쿠크크크-!
안 그래도 피비린내가 가득하던 공간이, 이제는 코끝이 아릿해질 지경이 되었다.
그 심상치 않은 이변에 도르문트의 기사들이 흠칫 몸을 떨 때 이안이 중얼거렸다.
‘마법? 아니… 이건 혈통이군.’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데 마력이 안 느껴지면 혈통밖에 없었다.
그 탓에 이안의 표정이 살며시 굳어질 때, 피의 호수가 범람했다.
콰쾅-!
동시에 쏟아져 나온 피의 물결이 창으로 변했다.
“…!”
깜짝 놀란 도르문트 기사들이 검기를 발현했다.
이안도 상념을 멈추고, 예니카 헤이즐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이안과 예니카가 격돌하려던 순간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그 총성과 함께 이안을 향해 쏘아져 나간 피의 창들이 단번에 흩어졌다.
깜짝 놀란 예니카가 입을 벌렸고, 이안도 눈을 치켜떴다.
그 사이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려 착지한 사내가 총과 칼을 예니카와 이안을 향해 겨눴다.
“어허. 새치기하면 안 되죠.”
“……?”
“차례가 있어요, 차례가. 그러니 두 분 다 싸움을 멈추고 물러나 주세요.”
이 말에 예니카가 눈을 치켜떴다.
“…공자님?”
“오랜만이에요 예니카.”
짧게 인사한 아더가 몸을 돌렸다.
잔뜩 긴장한 10명의 도르문트의 기사와 놀란 표정의 이안이 보였다.
아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드디어 만났네요. 너무 만나고 싶었어요, 여러분.”
아더의 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이안이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넌 또 누구지?”
“흠? 못 알아보시겠어요, 이안?”
아더의 질문에 이안의 미간이 살며시 모았다.
“검은 십자가인가?”
“검은 십자가요? 아니에요.”
“검은 십자가를 쫓아 이곳에 온 용병인가?”
“용병은 맞는 데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네 놈이?”
이안의 질문에 아더가 웃었다.
“하하…….”
“…?”
그 난데없는 웃음에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지… 저놈은?’
그 사이 아더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미치겠네. 그냥 너무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아.”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아티펙트의 효능을 해체했다.
그 순간 흐리멍덩하던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숨겨져 있던 본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더 바이에른?”
“네 맞아요. 아더 바이에른이에요 이안. 이제야 절 알아봐 주시네요.”
이안이 당황해 말을 흐렸다.
“네가 여긴 어떻게….”
“왜 왔긴요. 너무 당연한 걸 묻는 거 아니에요?”
아더가 마검을 치켜들어 이안을 향해 겨눴다.
“당연히 당신을 만나러 왔죠. 죽음마저 뛰어넘고서.”
아더의 말에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저게 무슨… 헛소리지?’
날 만나러 이 먼 북방까지 왔다고?
그런데 죽음을 뛰어넘었단 소리는 또 무엇인가?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였다.
아더가 탄성을 흘렀다.
“아….”
신음에 가까운 탄성과 함께 아더의 시야가 반전됐다.
세상이 일그러지고, 모든 게 뒤섞였다.
그 일그러진 세상을 지켜보던 아더는 알 수 있었다.
참고 있던 정신병이 마침내 터져 버렸다는 사실을.
하지만 아더는 참지 않았다.
‘이안 앞인데 굳이?’
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을 것이다.
허나 이안의 앞에서는 괜찮았다.
그는 자신을 미쳐버리게 만든 사람이니깐.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줄게요, 이안.”
길었던 인내가 끝나고, 복수의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