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117화 (117/265)

제117화

예니카 헤이즐이 눈을 떴다.

“…….”

잠시 말없이 어둠에 잠긴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 묻어 있던 질척한 피들이 후두둑 떨어져나갔다.

그 속에서, 숨을 고르던 예니카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물.

성배의 제물로써 손색이 없는 이들이 마침내 도시에 모였다.

일부러 도르문트 쪽, 흑마법사에게 위치를 노출시킨 게 좋은 한수가 되었던 것 같았다.

‘성배를 위한 제물…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 안에 있어야 하니깐.’

예니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일족의 성물을 강탈한 도둑놈들에게 복수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올라갔던 입꼬리는 다시 내려왔고, 희미한 표정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의식의 부작용 중 하나였는데, 감정이라는 것을 점차 느끼지 못하게 된 그녀였다.

‘나라는 존재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그것이 무섭기도, 떨리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예니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에 묻어있던 남은 피들이 떨어져나갔다.

그 벌거벗은 상태로 호수를 빠져나온 예니카는 단상으로 향했다.

“…….”

피의 성배.

뱀파이어 일족의 보물이 옅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성배를 조심스럽게 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단번에 입술에 상처를 냈다.

주르륵…

흘러내린 피가 한 방울씩 성배에 담겼다.

그 순간 성배를 쥐고 있던 예니카의 손이 작게 떨렸다.

제 피를 먹어치운 성배의 떨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니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늘을 만드신 아버지여. 땅을 만드신 어머니여. 내려주신 양식을….”

시작된 기도문과 함께 그녀의 입술로부터 새하얀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그녀의 영, 영혼.

또 다르게는 예니카 헤이즐이라는 인간을 상징하는 무언가였다.

그 예니카 헤이즐이 곧 천천히 성배로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기도문이 끊기며, 그녀의 입에서 썩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아….”

짙은 한숨을 토해낸 그녀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어… 이제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내 영혼을 바친다면….”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예니카가 몸을 돌려 다시 피의 호수로 향했다.

풍덩-!

힘없이 쓰러진 그녀가 호수로 내려앉았다.

질척이는 어둠이 그런 그녀를 심연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예니카는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다시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나있을 것이다.

굴레도 저주도 속박도.

모든 것이 말이다.

살며시 미소지은 예니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더가 비스트와 마검을 치켜들었다.

철컥.

비스트가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원숭이의 곁을 지키던 다섯 명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그들 중 가장 가장 노련한 기사가 아더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방심하지 마라. 휠이 죽은 건 우연이 아니다.”

조금 전 아더의 칼에 죽은 기사의 이름을 언급한 그가 곧바로 검기를 발현했다.

위윙-!

그걸 시작으로 나머지 네 명의 기사도 검기를 발현했다.

지켜보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 시작부터 검기라니, 똑똑한데요?”

무명의 칼잡이 앞에서 방심 할 법도 한데, 처음부터 곧바로 전력을 드러내다니.

괜히 도르문트 소속 기사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눈앞의 기사들이 검기를 꺼내들었음에도 이 대결에서 패배할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효율적으로 죽이느냐, 힘을 얼마나 아낄 수 있느냐.’

조금 뒤, 이안과 맞붙을 때를 고려하면 저들을 최대한 빠르게 제압하는 게 중요했다.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검기를 발현했다.

파앗-!

솟구쳐 오른 붉은 빛 검기에 아더를 노려보던 기사들이 흠칫 놀랬다.

그건 원숭이도 다르지 않았다.

‘뭐야? 5서클 이상의 경지를 이룬 칼잡이었다고?’

조금 전 나선 기사가 죽였을 때만큼의 충격이 원숭이를 휩쓸었다.

그도 그럴 게, 저 흐리멍덩한 인상의 사내의 나이가 도르문트의 천재 기사라 불리던 하얼빈보다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놈 정체가 뭐지? 바이에른의 미친놈? 미친놈은 그렇다 치고 설마 내가 아는 그 바이에른 소속인가?’

도르문트가 제국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기 전, 가장 유서 깊고 명망 높았던 가문.

설마 눈앞의 사내가 그 바이에른의 소속일까?

곰곰이 고민하던 원숭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고 있기론 바이에른에 저런 기사는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저런 기사를 바이에른이 이곳에 보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바이에른의 미친놈이라 소개한 저 놈의 정체는?

던져진 질문과 함께 원숭이의 미간이 모아질 때,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아더의 손에 들린 비스트가 불을 뿜은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일대다수의 전투가 시작됐다.

챙-!

교차되는 6개의 검 그리고 검기.

아더는 자신을 짓누르는 그 엄청난 압박 속에서 테이큰의 혈통 능력을 일으켰다.

그 순간 다섯 자루의 검이 밀려났다.

“……!”

기사들이 눈을 치켜 뜬 사이, 아더가 공간도약을 사용했다.

“뭐? 텔레포트라고?’

다섯 명의 기사 중 가장 노련한 기사가 놀라 중얼거렸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난 아더가 예고 없이 검을 휘둘렀다.

챙-!

나머지 4명의 기사가 그런 아더의 검을 막아냈다.

아더가 입맛을 쩝 다셨다.

“에이… 대장부터 죽이고 시작하려 했는데 쉽지 않네.”

아더의 말에 나머지 4명의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리가 물로 보이냐!”

이 말과 함께 4명의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 일격들을 아더가 마검으로 모두 쳐냈다.

그와 동시에 여섯 개의 검기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빛의 알갱이가 어지럽게 주변을 수놓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나도 끼어들고 싶은데, 저 흑마법사를 견제해야 하니.’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건 원숭이였다.

‘도르문트의 흑마법사로,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한 마법사.’

하지만 그 소문에 비해, 엄청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기도 했다.

‘듣기로 80년을 수련한 마법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은 실력이라니깐….’

80년의 마법사면 궁중 마법사 급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 탓에 레온이 원숭이를 견제하느라 싸움에 참전하지 못할 때, 갑자기 벼락이 내리쳤다.

“……!”

깜짝 놀란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당황하는 다섯 명의 기사가 보였다.

“무, 뭐야? 갑자기 벼락이 왜 여기로 내리쳐?”

그 때 아더가 비스트를 치켜들었다.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한 명의 기사가 왼팔을 잃었다.

“…으아아악!”

한 박자 늦게 울려 퍼진 비명과 함께 아더가 자리에서 뛰어 올라 빙그르르르 돌았다.

그 광경에 기사 중 한명이 거칠게 소리쳤다.

“죽여 저 개새끼!”

그 외침과 함께 네 자루의 검이 아더를 노리는 순간, 땅 밑에서부터 무언가 솟아올랐다.

“……!”

상급 땅의 정령.

노움의 능력이 발동된 것이었다.

하지만 급박한 전투 탓에 노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기사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건 또!”

“텔레포트에 벼락에… 저 자식 설마 마검사였던 거야?”

지금 기사들의 눈에는 아더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벼락을 내리치고, 흙으로 된 벽을 소환하는 마검사.

마법과 칼을 동시에 다루는 그 기이한 존재로 말이다.

그 탓에 기사들이 당황을 감추지 못할 때, 왼팔을 잃은 기사 앞에 도달한 아더가 마검을 치켜들었다.

“…컥!”

그의 가슴팍에다 마검을 찔러 넣은 아더가 웃었다.

“일단 한 놈.”

이 말에 가슴팍에 검을 찔린 기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개새끼! 한 놈한테 당해봐라!”

왼팔이 잘린 기사가 마검을 잡더니 제 가슴팍에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다.

눈을 치켜뜬 아더가 당황한 그 때, 왼팔을 잃은 기사가 마지막 힘을 짜내 일격을 휘둘렀다.

썩둑.

비스트를 들고 있던 아더의 왼팔이 그 순간 잘려나갔다.

그 광경에 뒤늦게 아더를 향해 달려들던 4명의 기사가 눈빛을 빛냈고 원숭이가 두 주먹을 쥐었다.

“…새끼! 끝났군!”

다시 여유를 되찾은 원숭이가 거칠게 소리쳤다.

“웬만해서는 더 잘라내지 말고 생포해와!”

원숭이의 명령에 남은 4명의 기사들이 비릿하게 웃으며 칼을 치켜들었다.

그 사이 아더는 잘린 제 왼팔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흠… 역시 기사는 기사라는 거네요. 마지막 순간에 설마 제 칼에 파고들어 왼팔을 잘라내 줄이야.”

이 말과 함께 피식 웃음을 터트린 아더가 마검에 관통된 채 죽어버린 기사를 발로 밀었다.

그 후 바닥에 떨어진 제 왼 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잘 끼워야 나중에 부작용이 없을 텐데….”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잘린 외팔을 집어 들어 잘린 단면에 슥슥 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아더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

그건 원숭이도 다르지 않았다.

“…뭐야 저 놈?”

갑자기 잘린 왼팔을 잘린 단면에 왜 가져다 되는 거지?

저런다고 붙을 상처가 아닌데?

그 때, 아더가 잘린 왼팔을 붕붕 휘둘렀다.

“……!”

깜짝 놀란 원숭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부, 붙었어? 잘린 팔이?”

원숭이의 경악과 함께 아더가 완벽히 붙은 제 왼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아직 삐거덕 거리긴 한데, 뭐 나쁘지 않네.”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고개를 돌려 4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다들 왜 그런 표정이세요?”

“…….”

“꼭 못 볼 걸 본 표정인데, 뭐 문제 있었나요?”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그들조차, 지금의 광경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때 원숭이가 소리쳤다.

“너, 너!! 정체가 대체 뭐야!”

그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바이에른의 미친놈이라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비스트를 재장전했다.

이곳에 오면서 미리 만들어두었던 검은 탄알이 장전된 것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가볼까요 여러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이를 으득 갈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비스트를 치켜들었다.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4명의 기사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 * *

레온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다 죽였어?”

아직 여섯 명의 기사 중 마지막 기사가 남아있기 했지만, 그마저도 위기에 몰려 있었다.

“…크아아악!”

아더 바이에른이 정말로 혼자서 다섯 명의 도르문트 기사를 전부 압도한 것이다.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았음에도, 쉽사리 믿기가 힘들었다.

그건 맞은편에 있던 원숭이도 다르지 않았다.

‘저, 저 새끼 대체 뭐야!’

불현듯 나타난 칼잡이

그 무명의 칼잡이가 도르문트 기사 여섯 명을 전부 죽였다.

그 사실은 도르문트의 흑마법사인 원숭이의 입장에서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르문트 기사가 어떤 존재들인가?

흔치 않은 5서클 칼잡이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천재들이다.

그런데 그 천재들이 변방의 칼잡이에게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못하고 전부 썰려나간 것이다.

그 탓에 원숭이의 표정이 일그러진 그 때, 마지막 칼춤을 추던 아더와 시선이 마주쳤다.

“……!”

깜짝 놀란 원숭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 새끼… 날 보고 웃고 있어?’

그런데 그 웃음이 광기에 차 있었다.

마치 선물 상자를 눈앞에 둔 아이처럼 말이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원숭이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시발… 이런 데서 쓸 저주가 아닌데 어쩔 수 없군.’

생각과 함께 원숭이가 황급히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레온이 눈을 치켜떴다.

“……!’

고개를 돌린 레온이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쥔 원숭이가 무언가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표정을 굳힌 레온이 곧바로 제 능력을 일으켰다.

“…크악!”

원숭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확히는 그의 신체가 레온의 혈통 능력에 의해 쪼그라든 것이다.

하지만 원숭이는 몸으로 반으로 접힌 상태에서도 주문을 외우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미간을 모은 레온이 결국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원숭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동시에 지팡이를 거칠게 내려찍은 그가 소리쳤다.

“아브라만다 카다브만다라!”

그 외침과 함께 지팡이로부터 정체불명의 검은 광선이 쏘아졌다.

마지막 남은 기사를 상대하고 있던 아더가 그 광선에 눈을 치켜떴다.

“오 마법이네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폴짝 뛰어올라, 광선을 피했다.

그 광경에 레온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그 때, 원숭이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크하하하! 피한다고 피해지는 마법이 아니다 이놈아!”

원숭이의 외침에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 순간, 지나쳤던 검은 광선이 방향을 꺾어 다시 되돌아왔다.

깜짝 놀란 레온이 소리쳤다.

“아더 피해!! 저 주문 뭔가 이상…!”

허나 그 외침이 아더에게 닿기 전, 검은 광선이 먼저 아더의 몸에 닿았다.

쾅!

거친 폭음과 함께 아더가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숭이가 가래가 낀 목소리로 소리쳤다.

“크하하하! 아무리 강한 칼잡이라도 괴물조차 죽인 마법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테지!”

이 말과 함께 원숭이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 순간, 흉측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 있는 기괴한 외형이었다.

인간 보다는 말 그대로 원숭이에 가까운 그가 주름 진 입꼬리를 씰룩이며 선언했다.

“끝이다 미친 칼잡이.”

원숭이의 말에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흉부를 바라보았다.

두근!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

그 안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더는 고민하다 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

누군가에게서 건네받은 검은색 카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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