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이안 도르문트.
케인 도르문트의 3명의 아들 중 장남이자 가장 뛰어난 후계자라 평가받는 사내.
그와의 얽힌 인연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케인 도르문트. 그자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게 이안이지.’
지난번의 삶에서 가장 많이 부딪치고 가장 많이 싸웠던 사내.
그리고 바이에른의 멸문에 가장 앞장섰던 흉수.
마지막에 제 가슴팍에 칼을 꽂은 남자.
그 탓에 이안이란 인간은 이번 삶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였다.
그만 없었더라면, 바이에른의 멸문 당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머니인 요넬과 여동생인 아이린이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원수가 제 발로 아케인에 들어왔다고?’
아더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과 함께 세상이 반전됐다.
한동안 제정신이었던 제 머리가 다시 어딘가 삐끗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묘한 느낌을 즐기며 아더는 중얼거렸다.
“얼른 보고 싶다.”
첫사랑이란 감정이 이런 것일까?
몸이 막 떨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얼른 이안을 보고 싶고, 그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아더는 그 기묘한 감각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케인 교정을 거니는 이안을 발견한 순간, 아더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이안이 저 멀리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주름살만 없어졌을 뿐, 지금의 그는 자신이 아는 그 이안과 똑같았다.
그 탓에 아더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잘 지내셨어요, 이안?”
떨림과 설렘.
그리고 흥분을 담아 건네는 인사였다.
* * *
이안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아더 바이에른이라고?”
그의 질문에 아더가 웃었다.
“네 아더 바이에른이죠. 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못 알아보는 건가요?”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이 맞다기 보다는, 저런 말을 하는 아더 바이에른의 모습이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벙어리가… 정말 저 사내라고?’
훤칠한 체구에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이목구비.
지금 아더 바이에른의 모습에서는 벙어리 시절의 아더 바이에른을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탓에 이안이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아더가 입을 열었다.
“반갑네요.”
“…?”
“당신을 이곳에서 보니 너무 반가워요.”
아더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이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너하고 나하고 인연이 있던가?”
“인연이야 많죠. 아, 이번에는 처음 만나는 거였던가?”
“…?”
“어쨌든 저희 가문이랑 그쪽 가문이랑 인연이 많잖아요. 안 그래요?”
이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아더는 웃었다.
그 기묘한 대치 속에서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케인 물이 좋기는 한가 보군….”
말을 흐린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벙어리가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도대체 뭘 하면 그 벙어리가 이렇게 되는 거지?”
그의 질문에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이안은 그런 아더의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다렸다.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아더가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참기 힘드네. 이것 참.”
“…?”
“이걸 해 말아? 아으….”
말을 흐린 아더가 웃었다.
“이안. 당신은 어때요?”
“…뭐?”
“가슴과 머리. 이 둘이 각자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에 따라요?”
이 말에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그게 뭔… 개소리지?”
“저는요. 예전이었다면 보통, 가슴이 시키는 쪽으로 했거든요?”
“…….”
“하지만 지금의 저는 머리가 시키는 쪽도 가끔 따라요. 그리고 보통 머리가 시키는 쪽이 결과가 더 좋더라고요.”
아더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품속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고 가슴이고, 그딴 거 다 신경 쓰지 않고 싶네요.”
“…?”
“제 느낌대로 판단하려고요. 뒷일은 뭐 알아서 되겠죠.”
이 말과 함께 품속으로 파고든 아더의 손이 비스트의 손잡이를 움켜잡았을 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이안 도르문트 아닌가!”
그 목소리에 이안도 아더도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레온 마드리드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안이 놀람을 감추지 않으며 인사했다.
“…위대한 핏줄에 예를 갖춥니다.”
“어이쿠.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말게! 예의는 무슨… 그런데 자네 언제 아케인에 왔는가?”
“며칠 전에 가문의 일로 들어왔습니다. 황자.”
“그래? 그래서 도르문트 사람들이 교정 내에 보였던 모양이군!”
“…도르문트 사람들이 말입니까?”
“저기서 자네 이름을 아주 고래고래 부르고 있던데? 어서 가보게!”
표정을 굳힌 이안이 황급히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문득 멈춰 선 그가, 나란히 붙어 있는 레온과 아더를 잠시 바라보았다.
“…꽤 어울리는 친구를 사귀셨습니다. 황자.”
“아아… 이 친구 말인가? 좋은 친구지!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해도!”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꾸벅 허리를 숙인 이안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레온이 한숨을 내어 쉬며 지켜보던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뒷덜미에서 느껴졌다.
“음… 이게 뭐하는 거예요, 황자님?”
아더 바이에른의 기괴한 총.
비스트였다.
레온은 목울대를 출렁이며 대답했다.
“말리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서 저자를 죽였을 거 아닌가?”
“그랬겠죠.”
“그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글쎄요. 그건 미래의 제가 알아서 하지 않았을까요?”
레온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쌌다.
‘괜히 말해줬군… 이안, 그자가 여길 왔다고.’
설마 이렇게 대놓고 쳐들어와 이안 도르문트를 향해 총을 겨눌 거라고는 레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아더 바이에른이 미친놈이라 해도, 교정 내에서 이안에게 덤벼들 거라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
‘내 예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는 걸 항상 간과하는군. 후우.….’
그리고 지금 그 미친놈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레온은 일단 이 사태부터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느끼고 있지? 내가 잘 말렸다고?”
아더가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요. 지금 제 머리는 황자님을 칭찬하는데 가슴은 당신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
“그리고 전 보통 가슴이 시키는 쪽으로 따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더의 말에 레온은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립구만… 아더 바이에른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총을 겨누더니 지금도 총을 겨누는 사이라니.
한결같은 아더의 모습에 레온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날 죽이면 이안 저자를 보낸 게 의미가 없지 않나?”
“…….”
“걱정 말게. 곧 기회는 올 거야. 자네가 저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아더가 잠시 고민하다 비스트를 집어넣었다.
“그 기회 안 오면 황자님을 죽일 거예요.”
“…?”
“이번에는 진짜 진심이에요. 그러니깐, 잘 협조하세요, 황자님.”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웃었다.
레온은 그 미소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지?”
“농담 같아 보여요?”
“…….”
레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흠. 뭐, 못 죽인 건 아쉽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네.’
만약 레온이 제때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이안과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뒷일은 어떻게 될까?
‘수습 못 하겠지. 이안을 죽인다 쳐도, 케인 도르문트 그 자가 바이에른 본가로 쳐들어가 버릴 테니깐.’
과거였다면 모를까.
아직은 가문이 버젓이 건재했다.
그래서 아더는 지금은 레온의 말대로 참기로 했다.
‘지켜야 할 게 생겼으니깐, 더는 내 뜻대로 행동 할 수는 없어.’
그 지켜야 할 게 가족이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탓에 아더는 지금의 상황이 썩 만족스러웠다.
이안이 죽을 기회는 아직 남아있고, 상황도 복잡해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안이 예니카를 쫓는다면, 결국이 도시에 계속 남아있을 테니깐 소리소문없이 죽일 기회는 여전히 있다는 거잖아?’
언제까지고 과거의 미친놈이었던 아더 바이에른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이제는 정상인 아더 바이에른의 방식으로 복수를 해야 했다.
‘그래야 가문도 지키고 끝내지 못한 복수도 더 수월하게 할 테니깐.’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얼어 붙어있는 레온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후후후… 고마워요, 레온.”
“…?”
“생각해보니 잘 말려주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밥이나 드시러 가실까요? 저희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아더의 제안에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이 상황에서 밥이라고?
‘허허… 이 자식… 진짜 미쳤구나.’
느끼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깨닫는다.
아더 바이에른은 진짜 미친놈이었다.
* * *
아케인이 들썩였다.
그 첫 번쨰 요인은 역시나, 아케인의 정문 앞에 대기 중인 500명의 도르문트의 군사 때문이었다.
“들었어? 이번에 도르문트 군대가 아케인으로 들어올 수도 있대!”
“뭐!? 외국의 군대가 들어오는 건 법률상으로 안 되는 거 아니야!?”
“듣기로, 아케인 대학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더라고… 무려 도르문트 백작가의 보물을 잃어버렸다던데?”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고, 아케인 대학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세상에… 그 예니카 헤이즐 때문에 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아케인 시에서 저걸 가만히 방관 할 리가 있나?”
“도르문트 백작도 한성격 한다는데… 제국하고 아케인의 전쟁?”
그 수군거림과 함께 뒷거리 인간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르문트 군대까지 왔다라… 도대체 그 광신도가 훔쳐 달아난 게 뭐길래 그러는 거지?”
“듣기로 도르문트의 아주 중요한 가보라던데?”
“가보? 흐음… 그럼 그 광신도만 잡으면 만 골드에 달하는 현상금에 도르문트의 가보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거 아니야?”
얽히고 얽힌 이해 사정과 함께 여러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레온이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어수선한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우리 목표는 예니카 헤이즐이 아니니깐.”
레온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희 목표는 이안 도르문트죠.”
“그래. 하지만 아더 바이에른. 그 이안 도르문트를 쫓기 위해서는 예니카 헤이즐을 일단 쫓아야 해.”
“…왜요?”
“이안 도르문트가 예니카 헤이즐을 쫓을 거거든.”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예니카를 쫓는 이안을 쫓자? 흠… 그냥 이안을 암습하면 안 돼요?”
“자신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데 저 군대 속에 있는 이안을 흔적 없이 죽일 수 있겠나?”
“저 군대도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죠.”
“…미안하네. 내가 잘못 말했네. 흠흠! 일단 암습이 안 되는 이유는 분명 흔적이 분명 남을 거야. 그렇게 되면 그날 물러선 이유가 없어지는 거네.”
레온의 설명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네요.”
“그렇지. 그러니깐 우리는 예니카 헤이즐의 흔적을 일단 쫓을 필요가 있네. 그래야 예니카를 쫓는 이안을 죽일 기회가 있을 테니깐.”
아더가 고민하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예니카 흔적을 찾는 게 먼저네요?”
“아니지.”
“…?”
“그 예니카 흔적을 같이 쫓을 팀이 필요하지. 이번 일은 솔직히 말해서 우리 둘이서 감당하기가 힘들어.”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외부인을 끌어들이자?”
“비상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전력. 혹시 뭐 그런 쓸만한 사람 알고 있나?”
“글쎄요… 제가 보기보다 친한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
“흠… 누가 있지… 아! 한 명 있다.”
“누군가?”
“상급 정령술사요.”
“…?”
“그리고 총잡이기도 하죠.”
레온의 입이 벌어졌다.
상급 정령술사에 총잡이?
‘총잡이는 그렇다 치고, 상급 정령술사를 알고 있다고?’
마법사보다 귀하다 평가받는 게 정령술사인데 그 정령술사가 상급의 경지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궁전 마법사급의 전력이 들어온다는 말이잖아?’
그 탓에 레온은 믿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 사람을 자네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혹시 뭐 전쟁범죄자 이런 사람인가?”
“아뇨? 제가 그런 흉악한 사람과 왜 친하겠어요?”
“…그럼 정상적인 사람인데 총잡이에 정령술사라고?”
“네. 거기다….”
말을 흐린 아더가 웃었다.
“저희집 메이드이기도 해요.”
“…?”
“저랑 아주 각별한 사이인데, 부탁하면 아마 들어줄 거예요. 이 정도면 괜찮죠? 레온?”
아더의 질문에 레온이 당황했다.
‘저, 정령술사에 총잡이에 메이드?’
레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공자님?”
단지 사람이 아니라 엘프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