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아더의 제안에 안나와 지니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지니. 이거 입어봐요.”
“치마네요? 그런데….”
말을 흐린 지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이렇게 짧아요?”
“요즘 유행하는 패션인데, 지니 씨는 몸매가 좋으니깐 잘 어울릴 거예요!”
“음… 안나. 이건 어울리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짧….”
“패션에 짧고 긴 게 어디 있어요! 일단 한 번 입어봐요!”
안나의 강요에 못이긴 지니가 결국 그녀가 권한 치마를 입었다.
“…….”
훤히 드러난 제 맨다리에 지니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런 옷이 요즘 패션이라고?’
차라리 벌거벗고 다니는 게 낫지 않나?
허나 눈앞의 안나가 워낙 좋아하니, 차마 안 입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허, 허헉! 너무 예뻐요, 지니!! 그대로 입고가요!”
결국 안나가 권한 옷으로 환복한 지니가 응접실로 나왔다.
쇼파에 앉아 커피를 들이켜던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 지니 그런 옷을 입을 거면 그냥 벗는 게 낫지 않아요?”
“…….”
지니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안나가 말했다.
“공자님! 무슨 소리예요! 이게 요즘 패션인데!”
“…요즘은 헐벗는 게 유행이에요?”
“헐벗는 게 아니라 패션이라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잘 어울리네요. 그럼 갈까요?”
아더의 말에 지금이라도 환복을 할까 고민하던 지니가 움찔 놀랬다.
“…어울려요?”
“어울리죠. 지니 씨 얼굴이면 안 어울리는 게 이상한데.”
지니가 다시 한번 움찔 놀랬다.
그 사이 아더는 문을 열고서 바깥으로 향했다.
“센트럴 공원으로 가죠 공자님! 거기가 요즘 가장 핫한 피크닉 장소에요!”
“좋네요. 거기로 가시죠.”
그렇게 저택을 나선 세 사람은 안나의 제안에 따라 센트럴 파크란 곳으로 향했다.
“오… 좋은데요?”
“아케인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이래요, 공자님.”
안나의 설명과 함께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와아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부모들이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다.
푸른 하늘에 맑은 햇살에 비추는 그 광경은, 그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웠다.
‘…흠. 그러고 보니 이번 주는 어머니한테 연락을 못 드렸네.’
매주에 한 번씩 연락을 드리고 있는데 이번 주엔 의뢰를 수행하느라 깜빡하고 말았다.
‘돌아가서 드려야겠네. 아이린 목소리가 듣고 싶기도 하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돗자리를 편 안나가 도시락을 꺼내 들고 있었다.
“피크닉에는 샌드위치죠!”
그녀의 외침과 함께 아더와 지니도 적당히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레 수다가 시작됐다.
“방학 되면 어디 놀러라도 가죠 공자님! 해변도 좋고, 아니면 계곡으로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안나가 그 수다를 주도했고, 지니가 적당히 그 수다에 맞장구쳤다.
아더는 그런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간간이 질문을 던졌다.
“놀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집에 한 번 들러야 하지 않을까?”
“아 본가도 당연히 들러야죠! 아니면, 가주님과 아이린 님이랑 같이 가도 되고요!”
그 모습을 훔쳐보던 행인들이 이를 악물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잘생기고 예쁜 놈들이 아주 깨소금이 쏟아지는구나!”
‘더럽고 치사한 세상!’
가족 단위로 오는 센트럴 파크인 걸 고려하면, 아더의 일행은 확실히 이상한 구성조합이었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런데 모두 미남미녀?
하나만 있어도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시선을 안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눈치챈 아더가 옆에 있던 지니를 향해 속삭였다.
“지니. 저기 우리를 바라보는데, 해적이나 칠황의 일원일까요?”
깜짝 놀란 지니가 시선을 돌렸다.
“…….”
아더의 말대로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있었다.
허나 아더가 말한 바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냥 부러워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그렇게 느낀 이유는 제 다리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남자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많이 받아본 시선이라, 딱히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나랑 있는데 그런 티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 가서 제 외모가 떨어진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왜 아더 바이에른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아더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흠… 계속 쳐다보는 걸 보니 뭔가 있는 모양이네요.”
“…?”
“잡아서 심문을 좀 해봐야겠어요. 안나가 있는데, 괜히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고.”
이 말에 화들짝 놀란 지니가 소리쳤다.
“공자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네! 그러니깐 제발 사고 좀 치지 마세요!’
아더가 눈을 끔뻑이고,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던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고요? 우리 공자님 사고 쳤어요?”
둘의 반응에 표정을 수습한 지니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런 거 아니니깐, 어쨌든 사고 치지 마세요. 아시겠죠?”
“…뭐, 움직이지는 않을 건데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예뻐서 바라보는 거니깐요.”
“…?”
아더가 입을 벌렸다.
옆에 있던 안나도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지니… 그 말 좀 재수 없었어요.”
지니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적당한 이유를 대지 않았으면 아더 바이에른은 사고를 쳤을 것이다.
‘절대로 그건 안 되지!’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
그 나들이를 그런 식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 * *
짧은 휴식을 끝낸 아더는 집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일단 중간고사니깐, 그것부터 좀 끝내놓고….’
그다음은 방학이니깐 그 시간에 맞추어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 놈씩 차근차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여 나가야지.’
때마침 수도로도 돌아가니, 타이밍이 매우 좋았다.
아케인에도 적지 않은 원수들이 거주 중이었지만, 역시 수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놈씩 죽인다는 가정하에… 세상에. 몇 놈을 죽일 수 있는 거지?’
제 계획 대로만 된다면, 케인과 칸 마드리드를 제외하고서는 원수들을 대부분 죽일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쉽지 않을 거지만… 지금이라면 가능은 할 것 같은데?’
그만큼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의미였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아더는 아케인 대학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시험기 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거리에 있는 수많은 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더는 오늘 첫 시험이 있을 제왕학 수업으로 들어갔다.
“…….”
침묵이 내려 앉아있는 교실의 풍경이 낯설다.
아더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 빈자리로 찾아가 앉았다.
‘호오….’
수업 시작 전 항상 잡담을 떠들던 무리까지도 오늘은 머리를 감싸 맨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흠… 나도 저렇게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 시험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바이에른의 피에 새겨진 또 하나의 능력.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기억력 덕에 시험 준비를 일찍이 끝마친 것이다.
‘하지만 남들 다하는데 또 안 하고 있으면 눈에 띄겠지. 교과서라도 펼쳐놓자.’
결정을 내린 아더가 가방을 열어 교과서 몇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을 때였다.
교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으아아악!”
난데없이 괴성에 침묵 중이던 교실이 화들짝 놀랬다.
“누, 누구야?”
“어떤 미친놈이 갑자기 비….”
“…레온 마드리드 황자님?”
괴성을 지른 사람은 레온이었다.
그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와,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한 채 교실 정중앙에 서 거칠게 호흡했다.
“후우후우!”
그렇게 한 차례 괴상한 심호흡을 한 차례 한 그가 아더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질문했다.
“황자님 드디어 미치셨어요?”
“누가? 내가?”
“네. 당신이요.”
레온이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다.
“흠… 하긴, 미칠 만도 하지.”
“…?”
“오늘 중간고사를 위해 일주일 밤샘을 했어. 보통 사람이면 3일 내로 쓰러져야 하는데 나는 무려 일주일을 버텼단 거네.”
아더가 감탄했다.
“그렇군요. 드디어 미치신 거네요.”
“후후… 그런데 아더 바이에른.”
“네?”
“자네 뭔 사고를 치고 다닌 건가?”
레온의 물음에 아더가 씩 미소 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르는 척 하지 말게. 자네 때문에 뒷골목이 지금 완전 박살이 났어.”
“흠… 박살까지 났어요?”
“거의 그 정도지.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세. 교수님이 들어왔군.”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들어온 제왕학 교수가 시험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긴말 필요 없겠죠?”
“…….”
“바로 시험 시작합니다. 부정행위를 하는 즉시 퇴출이며, 시험을 끝낸 학생은 먼저 나가셔도 됩니다.”
짧은 설명을 끝마친 교수가 들고 있던 시험지를 조수에게 건네주었다.
“…….”
침묵 속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학생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으아아악!”
‘A는 모르더라도 F만! F만 아니면 돼!’
‘재수강만 면하자 제발!’
그 소리 없는 간절한 바람 속에서 아더도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흐음….’
잠시 턱을 쓰다듬던 아더가 펜을 집었다.
‘생각보다 난이도가 쉬운걸?’
약 1000페이지 정도에 달하는 서적 한 권이 이번 시험 문제 범위였는데 시험지에 적힌 문제들은 그 범위에 크게 벗어나는 것들이 없었다.
‘벗어나는 게 있어도, 관점만 약간 달리한 정도고… 이 정도면 엄청 쉽네.’
방긋 미소 지은 아더가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반면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은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머리를 감싸 맸다.
‘이런 미친!!!’
‘20명이나 되는 왕족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라고?’
‘거기다 그들의 업적까지도 서술 기입해야 해?’
‘어떻게 이딴 게 문제라고 나오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탄식.
그러한 상황 속에서 레온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이 울려퍼질 때, 제왕학 교수의 눈이 치켜 떠졌다.
“…아더 바이에른 학생?”
“네.”
“벌써 시험을 끝마치셨어요?”
교수의 물음에 아더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모두 끝냈습니다.”
제왕학 교수의 시선이 가늘어졌지만, 곧 말없이 아더의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수고했고, 뒷문으로 나가시면 돼요.”
“네 교수님.”
대답을 한 아더가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학생들이 놀라 중얼거렸다.
‘벌써 다 풀이했다고?’
‘…그게 가능한가?’
‘백지로 낸 거 아니야?’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을 보던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누군가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이 제왕학 교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레온 마드리드 학생?”
“네 교수님.”
“절반이 백지인데, 정말 이대로 내실 거예요?”
레온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게 제 최선입니다.”
“…….”
“다음 학기 때 또 뵙겠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레온이 시험을 마치고 교실을 나왔을 때, 아더는 오늘 있을 마지막 시험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흠… 그러고 보니 오늘 검술 수업도 시험이 있구나.’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엘린을 떠올렸다.
‘…3년만의 재대결인가? 재밌겠네.’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 승패는 변함이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