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88화 (88/265)

제88화

지하도시.

검은 보름달을 벗어나 아케인 기차역으로 향하던 때, 카셀이 입을 열었다.

“던.”

“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요?”

“임무 말이야. 뭔가 계획을 세워 놔야 되지 않겠나?”

이 말에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계획이라… 그런데 계획을 세울 게 있나?’

호위라는 게 사실 별로 할 게 없었다.

그저 의뢰인의 옆에 24시간 주구장창 붙어 있으면서 신변만 지켜주면 되니.

‘다른 말로 하자면, 의뢰인의 신변을 어떻게 해서든 보장해야 하는데….’

지금 의뢰는 허점이 너무 많아 어떤 식으로 호위를 서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뢰인의 상대방이 해적이라는 거 외엔 뚜렷한 단서도 없고, 언제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이 질문을 카셀에게 돌려주었다.

“카셀은 뭐 세워 놓은 계획 있어요?”

“음… 내가 보기엔 이게 가장 중요해.”

“어떤 건데요?”

카셀이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다.

“저 아가씨를 누가 밀착 마크 할 건지.”

“……?”

“호위 임무의 기본이잖아. 의뢰인의 수발들어 주고, 신경 써 주는 거. 솔직히 말해… 난 이 부분에서만큼은 자신이 없네.”

카셀의 솔직한 대답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카셀, 연애 경험이 없군요?”

“……!”

깜짝 놀란 카셀이 입을 벌렸다.

“그, 그렇게 티 났나?”

“딱 보면 알죠.”

“…그럼 자네는 연애 경험이 풍부한가?”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카셀의 상상에 맡길게요.”

그 자신만만한 미소에 카셀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던, 이 자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그 후 아더의 얼굴을 잠시 훔쳐보던 카셀은 저도 모르게 납득해 버렸다.

‘…젠장! 좀 생겼잖아!’

가끔 삐뚤어진 미소만 제외하면, 아더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미남이었다.

‘칼도 나와 비슷하게 쓰는데, 얼굴도 잘생겨? 무슨 이런….’

그렇게 카셀이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끼는 사이, 아더가 힐끔 시선을 돌렸다.

처음 등장했을 때를 제외하고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슈가 하이든이 보였다.

아더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슈가 씨?”

“…네?”

“짐을 들어 드릴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슈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 사양하면 좀 곤란한데요.”

“……?”

“기차 시간이 아슬아슬해서요. 이제부터 뛰어가야 하는데, 그 가방 들고 뛸 수 있겠어요?”

슈가가 잠시 눈을 끔뻑이다, 슬그머니 손에 들린 가방을 내밀었다.

그 가방을 받아 든 아더가 손짓했다.

“10분 안에 타야 돼요. 안 그럼 다음 기차를 타야 하는데, 다들 이 야밤에 기차역에서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싶진 않겠죠?”

그 후 내달리기 시작한 세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오… VIP 룸이구만.”

말을 흐린 카셀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옆에 있던 아더도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바란스 씨가 양심은 있나 보네요. 이런 좋은 방을 잡아 주고.”

이 말과 함께 VIP들에게만 제공되는 특별 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일단 의뢰인, 슈가 씨는 개인실 하나를 혼자 쓰시고 거실을 저희 둘이 쓰죠. 그리고 슈가 씨는 지금부터 쉬어도 돼요. 표정을 보니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슈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그럼 먼저….”

말을 흐린 그녀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셀이 혀를 찼다.

“어렵구만. 호위 대상이 여자에 저렇게 숙맥이라니.”

“왜 그게 어렵다는 거예요?”

“이것저것 질문을 좀 해서 정보를 얻어 놔야 되지 않나?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데.”

그의 말에 아더가 웃었다.

“흠… 제가 보기엔 아마 물으면 답해 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카셀이 숙맥이라, 못 하는 거고.”

카셀이 입을 다물었다.

뾰로통해진 그의 표정에 아더가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야간 경계는 어떻게 할까요?”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카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게요. 아무래도 저보다 경험이 더 많아 보이시니깐.”

카셀이 씩 미소 지었다.

“흠흠! 그럼 교대로 돌아가면서 하지. 일단 내가 먼저 설 테니깐 자네도 좀 쉬고 있다가, 24시간 중 6시간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생각했다.

‘참 쉽네, 이 남자.’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아더는 의욕에 찬 카셀 덕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

* * *

밤새 경계를 선 카셀 덕에 푹 자고 일어난 아더가 중얼거렸다.

“운디네… 좀 씻겨 줘.”

[알겠어요, 아더.]

이 말과 함께 운디네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청량한 기운이 몸 전체를 스윽 훑더니, 잠기운은 물론이고 자고 일어났을 때의 특유한 찝찝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운디네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 운디네.”

[별말씀을요. 아더.]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흠… 카셀은 잘 거고, 슈가 씨는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던 아더는 데려가기로 마음먹고, 슈가가 있는 방문을 두들겼다.

“저 슈가 씨. 아침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질문에 한 박자 늦은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 나갈게요. 잠시만요.”

한 발자국 물러서자 방문이 열렸다.

아더는 가볍게 손짓했다.

“가실까요?”

“네, 가시죠.”

기차 내부에 마련된 간이식당 안에 들어갔다.

벌써 몇몇 사람들이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토스트와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아더와 슈가도 적당히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종업원이 다가왔다.

“뭐로 드릴깝쇼?”

“전 커피하고 토스트. 슈가 씨는요?”

“저도 똑같은 걸로 할게요.”

종업원이 다가온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아더도 슈가도 깰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아더는 창밖을, 슈가는 시선을 내리깐 채 제 손을 내려다볼 때였다.

조금 전 사라졌던 종업원이 다시 나타났다.

“여기 주문하신 토스트 두 개와 커피 두 잔이요.”

아더가 시선을 돌려 커피를 먼저 들이켰다.

싸구려 커피 특유의 달달하면서도 쓴맛이 느껴졌다.

그때 맞은편에서 똑같이 커피를 들이켜던 슈가가 침묵을 깼다.

“뭐 하나 여쭤봐도 되나요?”

찻잔을 내려놓은 아더가 대답했다.

“그럼요. 뭐든 물어보세요.”

“급한 상황이 아니면, 제 방문은 가급적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방문을요?”

“네.”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흠… 그건 곤란한데요.”

“왜죠?”

“일단 슈가 씨는 호위 대상이고, 해적분들한테 노려지고 있죠.”

“…….”

“그런 상황에서 호위 임무를 맡은 저희가 슈가 씨 방문을 마음대로 열지 못하면 안 되겠죠?”

슈가가 잠시 침묵하다 툭 내뱉었다.

“저 유부녀인데요.”

“알죠. 세자빈이시잖아요?”

“그런 사람의 방문을 마음대로 여시겠다고요?”

아더가 웃었다.

“못 열건 또 뭐 있겠어요?”

“……?”

“전 의뢰를 받았고, 그 의뢰를 해결할 뿐이죠. 그 과정에서 슈가 씨가 세자빈이라는 건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슈가가 눈을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제 특기 중 하나죠. 음… 그럼 저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물어보세요.”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슈가 씨가 왜 해적분들한테 노려지는 거예요?”

“…….”

“아무리 해적분들이라도 타국의 왕족을 건들면 위험하잖아요. 그런데 왜 노려지는 거예요, 슈가?”

슈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정직하고 날카로운 질문이네요.”

잠시 고민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프라임 왕국의 사정에 관해 알아요?”

“사정이요?”

“네. 지금 프라임 왕국은 왕위 계승 때문에 아주 복잡한 상황이에요.”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뭐 내분이라도 났나요?”

“네. 내분이 났어요.”

“……?”

“차기 계승권을 가지기 위해 2왕자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덕분에 왕실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 꼴이 말이 아니게 됐죠.”

그녀의 말에 아더가 눈을 끔뻑이다 탄성을 터트렸다.

“흠… 혹시 그 2왕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해적?”

“…맞아요. 그래서 제가 해적 놈들에게 노려지는 거죠.”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롭네, 이거….’

아케인의 뒷거리를 대표하는 두 세력.

해적과 칠황이 프라임 왕국에서 각자 다른 지지 세력의 뒷받침이 되어 다툼을 벌이고 있을 줄은 아더로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두 세력의 크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흠. 그래서 바란스 씨가 전쟁을 한다고 했구나.’

마침내 이번 의뢰의 큰 줄기를 이해한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굳이 왜?’

큰 줄기는 이해가 갔지만, 지금의 상황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칠황, 거기다 바란스 쯤 되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수족이 있을 텐데 왜 용병들에게 의뢰를 맡겨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고민하던 아더는 불쑥 질문했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슈가 씨는 바란스 님의 따님 맞나요?”

“…네?”

“전혀 안 닮아서요. 슈가 씨는 바란스 님의 따님 맞나요?”

슈가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표정에 어린 당혹감을 읽어 낸 아더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무례하시군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슈가가 식당을 빠져나가 버렸다.

지켜보던 아더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흠… 대체 뭘까.”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커피를 들이켰다.

“슈가 씨, 아무리 봐도 바란스의 딸이 아닌 것 같은데?’

* * *

시간이 지나고 저녁.

잠에서 깨어난 카셀이 비척비척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던?”

그의 질문에 상념에 빠져 있던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없었어요. 그보다 잘 잤어요?”

“…꿀잠 잤지. 흔들리는 기차의 감각이 좋더군.”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아더가 슈가의 방문을 가리켰다.

“그럼 저녁 좀 먹게, 슈가 씨 좀 불러 줄래요, 카셀?”

아직 남아 있는 잠기운에 눈을 비비던 카셀이 흠칫 놀랬다.

“내, 내가? 의뢰인에 관해서는 자네가 하기로 했잖아!”

“아. 사실 좀 다퉜거든요. 그러니 이번만 카셀이 좀 해 주세요.”

카셀이 눈을 끔뻑였다.

‘조금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그때 방문이 덜컥 열렸다.

카셀과 아더가 동시에 시선을 돌리자, 머리를 땋은 슈가가 잠옷 바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저녁 먹죠.”

“…….”

이 말에 카셀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고, 아더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삐진 거 아니었어요, 슈가 씨?”

“…안 삐졌고요. 저녁 안 먹으면 저만 손해일 것 같아서 나왔어요.”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선택이었어요. 저녁은 스테이크라 하더라고요.”

슈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카셀은 그런 슈가의 눈치를 보았다.

아더는 방문을 열고서 대기 중인 웨이터를 향해 말했다.

“3인분으로 저녁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웨이터가 사라졌다.

다시 방문을 닫은 아더는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 분위기 속에서 카셀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눈치를 보았다.

‘도, 도대체 뭘 했길래 분위기가 이래?’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열어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탓에 계속 눈치만 볼 때, 노크 소리와 동시에 음식이 들어왔다.

카셀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냄새가 아주 좋은걸! 맛나겠구만!”

“…….”

호응하지 않는 두 사람의 반응에 카셀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사이 다가온 요리사가 준비해 온 요리들을 하나둘 세팅했다.

그 속에서 슈가가 요리와 함께 나온 와인을 마시기 위해 잔을 집었을 때였다.

아더가 슈가의 손을 소리 나게 때렸다.

쨍그랑-!

와인 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카셀이 경악해 입을 벌렸다.

그사이 슈가는 미간을 모으며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품속의 비스트를 꺼내 요리사의 미간을 겨누었다.

“…이런 X발!”

욕설과 함께 요리사가 똑같이 총을 꺼내 들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탕-!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머리가 사라진 요리사가 쓰러졌다.

슈가와 카셀이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때 아더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슬슬 시작이네요. 하필 잘 시간에 찾아왔네, 해적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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