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스스로를 슈가 하이빈이라 밝힌 여인을 바라보던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이 사람이 바란스의 딸이라고?’
외모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지만, 바란스는 솔직히 말해 인간의 형태를 많이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슈가 하이빈은 누구나 눈길을 줄 법한 미인이었다.
아무리 닮은 구석을 찾아보려 해도, 어디 하나 닮은 곳 없는 두 부녀를 아더가 번갈아 바라볼 때 윌렛이 중얼거렸다.
“프라임 왕국의… 세자빈? 그럼 지금 저희보고 왕족의 일원을 호위하란 소리입니까?”
바란스가 방긋 미소 지었다.
“왜? 겁나나?”
“…왕족과 엮여 좋은 일이 없으니 솔직히 말해 겁나는군요.”
“크하핫-! 그 천하의 [귀신]이 겁을 먹어?”
바란스가 뭐가 웃긴지 한참을 웃음을 터트리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윌렛, 잘 생각해 보게. 왕족과 엮여 좋은 일은 없지만, 제대로 엮이기만 한다면 항상 큰 보상이 따르지.”
“…….”
“임무는 아주 간단해. 내 딸아이를 프라임 왕국 수도, 카운의 기차역까지만 호위해 주면 되네. 시간상으로는 딱 3일 걸리는 일이지.”
윌렛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 정도면 칠황의 인력을 투입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평소였다면 말이야.”
“……?”
“조만간 해적 놈들과 전쟁이 있을 거야. 그래서 밖으로 빼낼 여유분의 병력이 없어.”
윌렛의 눈이 치켜 떠졌다.
그건 옆에 있던 보니도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라고?’
‘그 해적과 칠황이… 갑자기?’
숙련된 브로커들답게,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내의 놀라움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바란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케인의 뒷거리를 양분하는 두 세력이 맞부딪친다는 소리니.
물론 언급한 전쟁이, 단순히 분쟁인지 아니면 전면전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방식이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사이 차를 호로록 들이켠 바란스가 다시 설명했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놈들과의 대립이 길어지면서 우리 조직 내부에 쥐새끼들이 너무 늘었어.”
“…….”
“이제 해적 놈들보다 같은 편인 놈들이 더 의심스러울 정도야. 그래서 이번 암시장의 진행도 고블린을 대량으로 사들여 맡겨 버렸지.”
정신을 차린 윌렛이 질문했다.
“제 좁은 식견으로는 잘 모르겠군요. 지금 이 시기에 갑자기 전쟁이라니….”
바란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놈들이 선을 넘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
“우리는 봐줄 만큼 봐줬네. 이제는 말이 아닌 피로 대화해야 할 때지.”
윌렛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바란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뭐…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샜지만, 이제 이해가 되겠지? 내가 왜 굳이 이런 쇼를 벌여 브로커와 용병들을 섭외했는지?”
“…….”
“전쟁이 터지면, 해적 놈들은 슈가를 가장 먼저 노리겠지. 적군의 가족은 전쟁에서 가장 유용한 패니깐.”
침묵하던 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흘러가는 상황은 알겠네요. 그런데 바란스 님?”
“말하게.”
“용병과 브로커들이 의뢰를 수락하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바란스가 방긋 웃었다.
“자네들 목숨을 보수로 할까?”
“……?”
“농담이네. 재미없었나 보군. 음… 딱히 생각해 놓은 건 없는데 뭘 원하나?”
보니가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어떤 거라도 되나요?”
“때마침 암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내 구해다 주지. 용병 한 명당 한 명씩 말하게.”
“…다른 용병으로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 이야기가 많이 퍼져 나가서 좋을 게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내 딸아이를 데리고 프라임 왕국으로 떠나는 거야.”
보니가 턱을 쓰다듬었다.
‘수긍하는 척을 했지만, 너무 구멍이 많은데?’
지금까지의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말이 안 되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 탓에 보니는 고민했지만, 솔직히 말해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죽겠지. 그걸 믿고 바란스도 저렇게 나오는 거일 테고….’
말을 흐린 보니가 힐끔 카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부터 대화에 끼지 못한 그는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카셀.”
“…왜 부르지, 보니?”
“당신 판단에 맡길게요.”
“내 판단?”
“네. 의뢰를 받아들일 거예요?”
카셀이 턱을 쓰다듬다,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의뢰주가 눈앞에 있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
“하지만 의뢰 보상은 협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신가?”
카셀의 질문에 바란스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뭘 원하지? 젊은 칼잡이?”
“사람에 대해 찾고 있다.”
“…사람? 흠. 까다로우면서도 어려운 부탁이군.”
바란스가 턱을 쓰다듬다 질문했다.
“들어는 줄 수 있는데, 시간이 걸릴 거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전쟁을 치를 거라. 그냥 물건이나 돈은 안 되나?”
“그럼 지금 전시장에 걸린 칼들 중 한 자루를 가져가도 되나?”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마음대로 가져가게.”
카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사이 윌렛이 힐끔 아더를 바라봤다.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저요? 흠….”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할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재밌는 구석이 많았다.
일단 바란스가 여태 한 말 중에 태반이 거짓이라는 게 제일 재밌었다.
‘저 슈가라는 사람이 딸이라는 거하고… 해적과 전쟁을 치를 거라는 건 진심 같은 데 나머지는 전부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유의 말투나 표정.
그런 것들이 바란스의 얼굴에서 묻어나왔다.
‘얼굴이 두 개라 착각이라 생각할 수도 없고.’
고민하던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때마침 시간이 널널하기도 하고, 사건도 재밌어 보였다.
거기다 바란스 정도 되는 사람이 주는 보수는 생각이상으로 좋을 것이다.
‘흠...그럼 보상을 어떤 걸 받는 지가 중요하겠네.‘
고민을 끝낸 아더가 질문했다.
“전 최상급 영단을 받고 싶은데요.”
“……?”
“혹시 가능한가요, 바란스 님?”
바란스가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최상급 영단? 그런 게 왜 내 손에 있겠나? 설마 일부러 퍼트린 그 헛소문을 믿는 겐가?”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이네, 저거.
그 탓에 조금 더 몰아붙여 볼까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굳이 지금 시비를 걸 필요는 없지.‘
지금은 바란스가 최상급 영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딱 이 정도만 염두에 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돈으로 주세요.”
“얼마를 원하나?”
“한… 천 골드 정도?”
윌렛의 눈이 치켜떠졌다.
옆에 있던 보니와 카셀도 다르지 않았다.
“던… 농담이 너무 심하군.”
그 이유는 아더가 부른 천 골드라는 액수가, 일류 용병.
업계 최고라 불리는 S등급 판정을 받은 용병들이 받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아더가 선을 넘었다 판단한 윌렛이 만류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바란스가 입을 열었다.
“좋네. 천 골드.”
“……!”
“자네 실력을 보니, 그 정도 액수를 부를 만하더군. 선수금으로 500골드. 일을 마치면 500골드를 넣어 주지.”
윌렛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지, 진심이십니까, 바란스 님?”
“내가 농담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윌렛이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바란스가 아더와 카셀.
그리고 제 딸인 슈가를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오늘 중으로는 떠나 주게. 프라임 왕국 카운 역으로 향하는 티켓은 내가 준비해 주지.”
* * *
바란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윌렛이 아더를 향해 물었다.
“정말 할 건가?”
“네?”
“이 의뢰 받아들일 거냐고.”
그의 질문에 아더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흠… 하지만 저희가 안 받아들여도 되는 거였나요?”
“…그건 무슨 소리야?”
“만약 제가 거절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죽지 않았을까요?”
아더의 대답에 윌렛이 놀란 듯 살짝 입을 벌렸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자네가?”
“엇! 그 눈빛 뭐예요 윌렛 어르신!”
“아니… 자네가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을 몰라서 말이야.”
아더가 입술을 내밀고서 투덜거렸다.
“전 항상 정상적인 사고만 하는데요?”
윌렛이 입을 다물었다.
그 후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한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의뢰, 뭔가 이상해.”
“…….”
“어쩌면 이 상황 전체가 거짓일지 몰라.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란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군요.”
“맞아. 했던 말 중에 진실도 섞여 있겠지만 거짓도 섞여 있겠지. 그럼 자네는 뭘 해야겠는가?”
“…의뢰 완수?”
“반은 정답이네.”
“나머지 반은 뭔가요?”
윌렛이 바란스의 딸.
슈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차하면 혼자라도 도망칠 준비.”
“……?”
“굳이 자리에 남아서 의리를 지켜 줄 필요 없어. 용병이 의리를 지킬 때는 정상적인 의뢰를 받았을 때뿐이니까.”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흠… 도망치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그렇게 되면 바란스 님이 화내지 않을까요?”
“그건 내가 처리하지.”
“…윌렛 어르신이요?”
“그런 일을 처리하라고 있는 게 브로커야. 자네는 이번 의뢰에서 자네 목숨이나 어떻게 부지할지나 궁리하게.”
윌렛의 진지한 조언에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어요, 어르신.”
그 후 바란스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3장의 티켓이 있었다.
“오늘 밤 열차야. 당장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뒀네.”
아더가 그 티켓을 대표로 받아 들며 말했다.
“따님분 짐은 없나요?”
“준비해 놨지.”
이 말과 함께 슈가가 작은 가방을 내보였다.
다시 시선을 돌린 아더가 바란스를 향해 말했다.
“일단 선수금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바란스 님?”
바란스가 카드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500골드가 들어 있을 걸세. 만약 일을 끝마치면 이 계좌로 500골드를 더 넣어 주지.”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좋네요. 그럼 바로 출발해도 될까요?”
“나야 빠를수록 좋지.”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슈가와 카셀이 따라 움직였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바란스가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나, 윌렛.”
윌렛이 침묵을 깨고서 대답했다.
“이제 슬슬 말씀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이 쇼를 벌인 진짜 이유가 뭡니까? 제가 알고 있기론….”
말을 흐린 윌렛이 눈빛을 빛냈다.
“바란스 님에게 따님은 없는 걸로 아는데?”
바란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오호. 언제 내 뒷조사까지 했나?”
“이 바닥 생태를 외워 두는 건 브로커의 기본 소양이죠.”
“흠… 그래. 그래도 자네한테는 설명을 해 두는 게 좋겠지.”
바란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슈가는 내 딸이 맞네.”
“……?”
“그리고 자네가 의심하는 해적과의 전쟁도 맞아. 정확히는 슈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전쟁이지.”
윌렛이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씀?”
“다시 말해 줘야 하나?”
바란스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칠황과 해적. 이 두 세력의 싸움의 원인이 바로 저 아이란 말일세. 이 쇼가 일어난 게 슈가 때문이란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