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아케인으로 떠나는 첫날.
마력 엔진을 탑재한 기차 안에서 만난 흰 수염은 검은 카드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검은 종탑으로 가서 이 카드를 내밀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걸세.’
굳이 그와 만날 이유가 없었던 터라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었는데, 윌렛이 언급한 검은 종탑 덕에 기억을 떠올린 아더였다.
‘설마 그 검은 종탑이 이 검은 종탑인가?’
턱을 쓰다듬던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종탑이 그렇게 흔할 리도 없고, 뭔가 연관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케인에서 열리는 최고로 큰 암시장.
대륙을 지배하는 암흑가 조직.
바보가 아닌 이상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윌렛 어르신은 암시장을 칠황이 관리한다고 했는데…. 흠.‘
흥미를 느낀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릴 때였다.
지켜보던 윌렛이 눈길을 좁히며 물었다.
“왜 또 그렇게 웃어?”
“네?”
“자네가 그런 식으로 입꼬리를 올릴 때마다, 불안해 죽겠는데 이번에 왜 또 그렇게 웃는 거야?”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 제가 기분 나쁘게 웃었나요?”
“그건 아닌데… 뭔가 불길해져서 말이지.”
“그럼 제가 불길하게 웃었다는 건가요?”
윌렛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 됐네. 그냥 넘어가지.”
“이렇게 대화를 끊어버린다고요, 윌렛 어르신?”
“설명해 봐야 나만 손해일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선물을 하나 주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윌렛이 서랍을 뒤져, 은으로 각인된 패 하나를 건네준다.
“어… 이건?”
“C등급 용병 패네.”
그의 설명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그도 그럴 게 며칠 전에 D등급 용병 패를 받았기 때문이다.
용병의 등급을 쉽게 올릴 수 없는 걸 고려하면, 지금 받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잘못 건네주신 거 아니에요?”
“아니 맞아. 용병 협회에서 자네 등급을 조정했어.”
“조정이요?”
윌렛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 사건을 두고, 자네의 등급이 D등급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
아더가 탄성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오… 의뢰도 해결 안 했는데 등급이 올라간다고?’
그 깐깐한 용병 협회에서 의뢰를 해결도 안 했는데 등급을 올려 주다니.
저번 생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에 아더가 문득 고민했다.
‘그럼 앞으로 이런 사고를 몇 번 더 치면 또다시 등급이 올라가려나?’
용병 생활을 당분간 계속할 거라면 아무래도 등급이 높은 편이 좋았다.
등급이 높은 용병은 높은 보수뿐만이 아니라 양질의 의뢰를 받을 수 있으니깐.
‘그리고 양질의 의뢰에는 좋은 혈통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그때 윌렛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뭔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만두게. 지금의 자네는 더 이상 눈에 띄어서는 안 돼.”
그의 조언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생각 안 했는데요?”
“…그럼 다행이고.”
이 말과 함께 윌렛이 고개를 까닥였다.
“오늘 이야기는 이쯤하고, 내일 보는 걸로 하지. 어떤가?”
“그렇게 하죠, 어르신.”
“돈은 많이 챙겨 오는 게 좋을 거야.”
“그럼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를 빠져나온 아더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흠… 아케인 암시장이라….”
저번 생에서도 몇 번 드나든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암시장은 처음이다.
‘그것도 하늘섬과 연관된 암시장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난 곳이 될 듯했다.
하늘섬뿐만이 아니라 뒷세계의 진짜 거물이라 불리는 칠황이나 해적.
이 두 조직도 참여한다고 하니.
“이 정도면 드래곤의 피도 팔지 않으려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 구할 수 있는 곳이라 하니 말이다.
기대감에 씩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제 저택으로 향했다.
* * *
이상할 정도로 날씨가 맑은 아침.
아더는 윌렛과 약속한 장소인 B-13구역으로 향했다.
민간 거주 지역답게 거리 곳곳에서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내리쬐는 밝은 햇빛과 어우러진 사람들의 표정에는 행복과 여유가 넘쳐 났다.
그 탓에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아케인 최대 규모의 암시장이 열린다고?’
어딜 보아도, 그런 곳이 열릴 만한 장소는 없어 보이는데?
생각과 함께 아더가 주변을 기웃거릴 때,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던 윌렛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왔군.”
“네 안녕하세요. 윌렛 어르신.”
이 말에 윌렛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양복점에서의 편안한 복장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회갈색 정장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덕분에 얼굴에 가득한 흉측한 흉터가 가려졌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에 보지 못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윌렛 어르신은 사실 귀족 출신이지 않을까?’
예측일 뿐일지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을 듯했다.
윌렛은 욕설이 난무하는 이 바닥에서 오래 생활했음에도 욕을 하지 않았으니깐.
‘저런 기품이 저절로 생겨났을 리는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굳이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에 따르면 윌렛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는 걸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다 했나?”
“네.”
“그럼 가지.”
이 말과 함께 윌렛이 걸음을 옮겼다.
아더는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윌렛은 잘 닦인 도로를 지나 주택단지 뒤에 조성된 거대한 산책로로 들어섰다.
“하하하-!”
그 산책로에도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모임이 많았다.
아더와 윌렛은 그들을 지나쳐,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녹음을 머금었던, 숲은 그 색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고 비둘기 대신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변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리는 사이, 윌렛이 걸음을 멈추었다.
“흠… 아무래도 여기 같군.”
뒤에 있던 아더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산책로 한복판에 놓인 검은 종이 보였다.
그 종을 감싼 것은 외형상 탑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탑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크기였다.
허나 그 크기와 상관없이 이런 장소에 있기에는 이질적인 건축물임은 확실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린 아더가 질문했다.
“이렇게 대놓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안 되지. 아무래도 결계인 모양이군.”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결계요?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진짜 마법은 현실과 거짓에 구분이 없지. 그런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곳이 이 암시장의 주인일 테고.”
윌렛의 설명에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음…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해.’
진짜 마법은 현실과 거짓에 구분이 없다.
거짓조차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진짜 마법이다.
그리고 눈앞의 마법은 진짜 마법인 듯했다.
‘내가 마법인 걸 느끼지 못할 정도면 최소 50년의 마법사인데… 도대체 주인이 누구길래?’
이 정도면 진짜 칠황이나 해적의 수장.
혹은 흰 수염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은데?
생각과 함께 아더가 고민에 휩싸였을 때였다.
윌렛이 조심스레 종을 두들겼다.
딸랑.
한 번 두 번 세 번.
나직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그 탓에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울려 퍼진다.
“킥킥… 손님. 손님인가요?”
눈을 치켜뜬 아더가 종 뒤에서 걸어 나온 난쟁이를 바라본다.
‘오…?’
귀는 지니처럼 길쭉한데, 피부는 녹색에 아주 못생긴 난쟁이였다.
아더가 흥미가 깃든 눈길로 그 초록빛 난쟁이를 바라보던 때, 윌렛이 입을 열었다.
“고블린이라… 저번에는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의 중얼거림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오… 몬스터예요?”
“그래. 처음 보나?”
“책에서만 봤어요. 천년 전에 멸족당한 그린 스킨 종족의 계열이지 않나요?”
윌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이렇게 보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군. 몬스터치고 지능이 높아 몇몇 흑마법사들이 사육을 한다고는 듣긴 했는데….”
그의 말에 아더가 생각했다.
‘지능이 높다는 말을 보니 저 고블린이 안내역인 모양이구나.’
그 생각을 윌렛도 똑같이 한 듯했다.
고민을 끝낸 윌렛이 고블린을 향해 묻는다.
“암시장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키킥… 티켓. 티켓이 필요해요.”
윌렛이 품속에서 두 장의 티켓을 꺼내 든다.
티켓을 받아 든 고블린이 이리저리 살펴보다 손짓한다.
“손님… 따라오세요. 이쪽이에요.”
아더와 윌렛이 그 손짓에 따라 걸음을 옮긴다.
고블린은 거침없이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흰 수염이 건네준 카드에도 반응하려나?’
연관이 있다면 반응을 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암시장으로 안내해 줄까?
아니면 곧바로 흰 수염에게?
고민하던 아더는 입맛을 쩝 다셨다.
‘며칠 전에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한 번 실험해 보는 건데.’
미쳐 있던 자신이라면 모를까, 흰 수염의 의도를 파악한 이상 그와 여러 번 부딪쳐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아더는 호기심을 억누른 채 조용히 고블린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탁.
고블린이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들고 있던 등불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거대한 묘비가 드러났는데, 고블린이 그 묘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세요. 이쪽이… 입구예요.”
윌렛이 턱을 쓰다듬다 고블린의 말에 따라 묘비를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더는 탄성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텔레포트 좌표구나.”
“킥킥… 정답이에요.”
옆에 있던 고블린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더는 그런 고블린을 잠시 바라보다, 조심스레 질문했다.
“고블린 씨. 죄송한 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질문인가요?”
“네. 궁금한 게 있거든요.”
고블린이 고개를 기운다.
“돈.”
“…….”
“돈 줘요, 돈.”
아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금화 하나를 튕겼다.
고블린이 금화를 홱 낚아채더니 또다시 기분 나쁘게 웃었다.
“뭐가 궁금하죠?”
“흰 수염이라고 알아요?”
“……?”
“하늘 섬의 흑마법산데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고블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동시에 새빨간 눈동자가 위아래로 쉼 없이 떨리더니 갑작스레 비명을 토해 냈다.
끼에에에에엑!!!!
소음에 가까운 그 비명에 아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 고블린이 제 두 귀를 잡아 뜯었다.
파앗-!
뿜어져 나온 피 분수와 함께 자리에 털썩 쓰러진 고블린이 양손에 제 귀를 쥔 채로 방방 뛰었다.
“흐, 흰 수염 님! 희, 흰 수염 님! 죄, 죄송합니다! 흰 수염 님!!!”
고통과 공포.
그 감정 중간에 있는 무언가를 토해 내던 고블린이 이내 혼절해 버렸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아더는 탄성을 터트렸다.
“역시… 흰 수염 씨 하고 관련이 있었구나.”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관계로 말이다.
‘꼴을 보니, 주인과 노예… 그쯤이려나?’
조금 전 윌렛도 흑마법사들이 고블린을 데리고 있다는 말을 했으니 그럴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조금 전 건네준 금화를 회수하며 고개를 까닥 숙였다.
“혼자 있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깐, 이만 가 볼게요, 고블린 씨.”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묘비를 향해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그 어긋난 시야의 감각 속에서 아더가 잠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
조금 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음이 귓가로 파고든다.
다시 눈을 뜬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붉은 달.
그리고 검은 태양.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하늘 아래 어둠에 휩싸인 도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