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미안하네. 사과하지.”
아더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정말로 사건 내막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단 것을 꺠달은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집에나 가는 거였는데 괜히 있었구만. 그럼 이만 가보겠네.”
“어라? 조금 더 부탁하면 말씀드릴 수도 있는데요?”
“나도 자존심이 있거든? 다음에 보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하며 소리쳤다.
“황자님! 그 조별과제 해야 하니까, 잊지 말고 할당량 채워오세요!”
방문을 열고 나가던 레온이 흠칫 놀랬다.
“젠장!! 깜빡 잊고 있었어! 당장 내일까지 해야 하는 일이잖아!”
이 말과 함께 레온이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니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두 사람 무슨 관계에요?”
“황자님하고요?”
“네.”
“원수사이요.”
지니가 입을 다물었다.
“던님은 항상 예상을 깨시네요.”
“어라? 뭐가요?”
“그냥 전부 다요. 사소한 것부터 큰 거까지. 전부 예상을 깨세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조금 전 내 대답 어디가 예상을 깨는 거지?
그때 지니가 몸을 일으키다 신음을 내뱉었다.
“윽!”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는지, 비틀거리는 그녀를 아더가 부축하며 말했다.
“조금 더 누워있어요.”
“…더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은데요.”
“이미 충분히 폐를 끼쳤는데, 여기서 더 끼쳐도 돼요.”
지니가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뾰족한 두 귀가 붉게 물든다.
“그, 그건 맞지만…….”
“그러니깐 설명 좀 해 줘봐요. 지니 씨 왜 갑자기 노예가 된 거예요?”
아더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과 숨이 멈춘다.
“…….”
그 상태 그대로 한참을 고민하던 지니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씀드릴까요?”
“지니 씨만 괜찮다면 전부 다요.”
지니가 한숨을 내쉰다.
“…진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생명의 은인이 부탁해오니 거절 할 수가 없네요.”
“그걸 노렸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지니가 중얼거렸다.
“은퇴를 한 뒤에 곧바로 집을 알아보러 다녔어요. 더불어 새 직장도.”
부동산을 가 매물을 찾아봤던 일.
원하는 가격대의 매물이 없어서 은행에 들렀던 일.
새 직장은 꽃집이었는데, 썩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일.
그 모든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함부르크하고는 그럼 언제 엮인 거예요?”
“엮인 게 아니에요.”
“그럼?”
“찾아왔어요. 사람들을 데리고.”
말을 흐린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전부 알고 왔더라고요. 저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고 윌렛 어르신 네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
“전부터 예의주시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제 조상까지 뒤져본 모양인지 엘프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 넓은 아케인에서 지니가 아주 희소한 이종족 후예인 엘프라는 걸 알고 찾아왔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곧 해답을 찾고서 질문했다.
“혹시 대부업에 손댔어요 지니?”
“……!”
“돈이 필요해서 막 빌리러 다녔다면서요.”
지니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 대부업은 아니고…….”
“대부업은 아니면요?”
“…그 비슷한 거였어요.”
“그럼 대부업이네요.”
지니가 입을 다물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하아.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그때 방문했던 대부업체에서 그 개새끼가 제 귀를 보고 뭔가를 추측한 것 같아요.”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에휴… 그러게 왜 그런 데를 가서.”
“저도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잡혀간 뒤에 기억은 있어요?”
지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마약에 취해서 그런가… 기억에 없어요.”
어딘가 불안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를 느낀 아더가 조언했다.
“괜찮아요. 지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으니깐.”
“…위로죠?”
“아뇨? 진심이에요. 제가 노예상인이라면 절대 지니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거예요.”
이 말에도 무거워진 지니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불안과 공포.
그 감정을 본능적으로 느낀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급 노예들은 상태가 아주 좋아야하죠. 특히 지니같이 예쁜 여자들은 더더욱.”
“…….”
“그리고 손댔다면, 지니가 가장 먼저 눈치채지 않았을까요?”
지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더는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세요. 아직 상태도 안 좋아 보이고, 열도 있어 보이고 하니깐…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뒷일을 처리하죠.”
지니가 약간 망설이며 질문했다.
“더… 있어도 되는 거예요?”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지니는 제 손님이니깐.”
이 말에 지니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그 사이 아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제안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몸이 다 나으면 엘프… 당신 조상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 * *
지니가 아더의 집에 머문지 3일이 지나갔다.
그날 동안 아더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향했고, 그 빈 시간을 안나라 밝힌 집사가 시중을 들어주었다.
머리부터 목욕까지.
사소한 거 하나부터 챙겨주는 안나의 행동에 부담을 느낀 지니가 사양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안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자님의 손님은 곧 바이에른 가문의 손님이기도 합니다.”
“…….”
“만약 그 손님을 불편하게 모셨다면, 그건 바이에른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지니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평생을 떠돌이, 혹은 용병일을 하며 거친 삶을 살아온 그녀는 명예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미친놈이… 진짜 바이에른 공작가의 후계자였다고?’
솔직히 말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그 미친놈이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라니?
하지만 기품 있어 보이는 눈앞의 시종은 물론이고, 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더 바이에른을 보고 예를 표하니 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탓에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이런 집… 그런 신분… 을 가지고 왜 용병 일을 하는 거지?’
재미? 흥미? 아니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여러 사정을 떠올려 봤지만, 무엇도 말이 되지 않았다.
‘바이에른 공작가의 후계자… 는 그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위치니깐.’
생각과 함께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 동안 지니는 몸을 회복했고, 이제는 익숙해진 바이에른 저택가의 마당에서 산책도 즐길 수 있었다.
‘… 아무리 식객이라지만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나?’
생각과 함께 지니가 뭐라도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안나가 또 극구 만류했다.
오히려 그러는 게 더 불편하다고.
그 탓에 바이에른 저택에 머문 지 6일째 되는 날에도 마당에 있는 흔들의자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때였다.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들이 문득 시선에 들어왔다.
“…….”
이름 모를 화려한 꽃송이들.
싱그러운 녹색을 머금은 고목들.
그것들을 지켜보던 지니는 생각했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네…….’
사실 지니는 꽃과 식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자란 곳이 그 꽃과 식물로 뒤덮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모님을 잃었지… 그래서 아케인 같은 도시에 집을 사기를 희망했고.’
하지만 바이에른 저택을 보니 그 생각이 조금쯤 달라졌다.
만약 집을 산다면, 이런 곳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살 수 있을 때 이야기지만… 이런 곳을 대체 얼마나 하려나?’
생각과 함께 피식 웃음을 터트린 지니가 정원에 놓인 꽃을 살며시 매만진 순간이었다.
“어라?”
꽃봉오리가 화려하게 만개했다.
그 광경에 지니가 눈을 끔뻑이며 당황했다.
“이, 이게 뭐지?”
중얼거림과 함께 지니가 다시 꽃을 툭 건드렸다.
그 순간 만개했던 꽃이 더욱 크게 자라난다.
그 확실한 이변에 지니가 놀라 입을 벌리는 그때, 아더가 중얼거렸다.
“와… 지니. 이런 능력도 있었어요?”
“……!”
깜짝 놀란 지니가 뒤로 물러선다.
지니의 등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뭘 그렇게 놀라요?”
“…그, 그 다가왔으면 소리좀 내세요 소리 좀!”
“소리요? 기척을 숨긴 적이 없는데, 지니가 둔한 거 아니에요?”
대답에 지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라… 왔으면 인사 좀 해달라는 거였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런 거라면, 제가 잘못하긴 했네요. 사과할게요, 지니.”
지켜보던 지니가 시선을 좁혔다.
웬일로 순순히 사과하지?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여 놓으니.
‘생각해보니 사과는 제때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아더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만개한 걸 넘어, 성장한 꽃 한 송이를 매만지다 툭, 꺾어버렸다.
“…그걸 왜 꺾어요, 던님!!”
지니가 경악하며 소리치자 아더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커버린 꽃송이가 있으면 다른 꽃들이 다죽어버려요.”
“……?”
“빨아들어야 할 영양분을 이 꽃이 다 흡수하거든요. 그… 자연의 섭리 있잖아요? 약육강식.”
지니가 눈을 끔뻑였다.
꺾은 꽃을 매만지던 아더가 불쑥 그녀의 귓가에 꽃을 꽂아주었다.
“……!”
깜짝 놀란 지니가 뒤로 물러선다.
입을 벌린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오… 이렇게 보니깐 예쁘네요?”
“…네?”
“예전부터 지니는 예쁘다,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진짜 예쁘네요.”
지니가 입을 다문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더, 던님……?”
“네?”
“저 좋아세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아뇨?”
“…….”
“하지만 좋은 관계라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지니의 눈이 커졌다.
“좋은 관계요?”
“네. 어…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지니가 입을 다문다.
좋은 관계?
자신과 아더 바이에른이 좋은 관계라 할 수 있나?
첫 만남 때부터 별로 좋지 않았고, 그 뒤로도 마주친 것은 단 두 번 뿐이다.
그리고 그 두 번조차 사실 좋은 일로 만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고민하던 지니는 곧 깨달았다.
그 두 번의 만남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지니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게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중얼거림과 함께 지니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던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지니?”
“아뇨. 그냥… 뭔가 그래서요.”
“뭐가요?”
“있어요, 그런 게.”
이 말과 함께 지니가 귓가에 꽂힌 꽃을 매만졌다.
“고마워요.”
“네?”
“진짜로 고마워,요 던님. 구해줘서.”
그녀의 인사에 아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가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그 모습에 지니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훈훈하게 흘러가는 둘의 모습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던 실프가 눈을 크게 떴다.
[어라?]
탄성과 함께 실프의 몸이 변한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어른으로.
그 급격한 변화와 함께 거센 돌풍이 휘몰아친다.
“어?”
이변을 느낀 지니가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훌쩍 커버린 실프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시, 실프? 뭐야? 갑자기… 왜?”
[모르겠어… 갑자기 지니의 힘이 커졌는데?]
목소리조차 굵어진 실프가 낮은 눈길로 지니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 지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급 정령으로 진화했어. 하지만… 왜?’
보다 높은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정령친화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령친화력은 마나나 마력처럼 늘릴 수 없었다.
‘타고난 재능…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무언가. 그게 바로 정령친화력.’
그래서 마법사보다 귀하다 평가받는 것이 정령술사였다.
오로지 타고난 재능만으로 정령과의 계약 등급이 정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상식을 깨부수고 실프가 갑작스레 상급정령으로 진화한 것이다.
‘… 도대체 왜? 설마 나 아직 꿈속인가?’
그사이 맞은편에 있던 아더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어… 라? 이게 뭐지?”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제 손을 바라본다.
“…….”
뜨겁게 타오르는 피.
그 피에서 무언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니의 피. 그 피가 날뛰고 있어.’
그 감각과 함께 아더는 깨달을 수 있었다.
흰수염이 말한 이 피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