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지니는 생각했다.
‘내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걸까?’
이곳에 잡혀 온 뒤로, 제대로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항상 어떤 약에 의해 정신이 몽롱해져 있었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흐릿한 인상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작은 인연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 탓에 지니는 믿지 못했다.
‘그 남자가 왜 여기 있어? 그래 맞아…. 이건 꿈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지니가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채워져 있던 목줄이 잘려 나갔다.
자유를 구속하던 쇠창살도 반으로 쪼개졌다.
그 이변에 감기려던 눈이 저절로 떠진다.
“꿈을 찾아 떠나셨는데, 왜 이러고 계세요? 집은 사셨어요?”
질문에 멀어져 가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게, 조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요즘 세상에 사기가 얼마나 많은데.”
지니가 입술을 벌벌 떨며 질문했다.
“던… 맞아요?”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오랜만이에요, 지니.”
“….”
“그런데 엘프였어요? 귀가 뾰족…어라? 더 뾰족해지셨네?”
지니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턱을 쓰다듬었다.
‘약에 중독되어 있었구나.’
초점이 맞지 않은 눈동자나, 멍청하게 벌린 입.
그리고 무엇보다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눈을 보니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운디네를 불렀다.
“…!”
탄성과 함께 지니의 몸 안에 남아 있던 미약이 사라졌다.
아더가 어깨에 걸친 망토를 덮어 주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이 말과 함께 시선을 돌린 아더가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흠….”
말을 흐린 아더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위험하네. 5서클 기사급의 칼잡이만 다섯. 마법사도 있고 지니와 같은 저격수도 위험한 걸 겨누고 있고….’
허나 딱히 후회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목표로 한 함부르크는 죽였다.
조금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차피 시간이 넉넉했어도 고문을 하는 건 즐기지 않았기에 딱히 상관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칼을 뽑아 들고서 중얼거렸다.
“자… 그럼 이제 슬슬 탈출해 볼까나?”
* * *
경매장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충격과 공포.
그 소용돌이치는 감정 사이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함부르크가… 죽었어?”
이 말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온다.
“무, 뭐야 저 미친놈!”
“누구야! 저놈 누구냐고!”
“설마 제국 경찰이야?! 뭔 놈이길래 함부르크를 죽이냐고!!!”
닥쳐온 혼란 속에서 관객들이 허둥지둥 경매장 안을 빠져나갔다.
더불어 그들을 지키는 호위 병력도 빠져나갔는데, 지켜보던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저들이 빠져 주면 더 수월해지지.’
그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더가 기다렸다는 듯 노움의 능력을 일으켰다.
쿠크크크-!
솟아오른 벽이 쏟아지는 총탄 세례를 막아낸다.
힐끔 시선을 돌린 아더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수십 명의 삐에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저쪽이 함부르크를 따르는 전투갱단…이라고 봐야겠구나.’
그와 동시에 아더가 비스트를 장전했다.
그리고 교묘히 벽에 틈을 낸 뒤, 총구를 그 틈에다 밀어 넣었다.
콰앙-!
대포와도 같은 울림이 경매장 안에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들의 몸이 압축된다.
“…!”
함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검은 구슬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 총 뭐지?”
능력도 능력인데, 제 머릿속에 든 사격 범위 범위가 마음대로 조절이 되었다.
이 정도면 총포상의 주인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단 합격. 그런 의미에서 오래 봤으면 좋겠는데….”
이 말에 반응이라도 한 듯 비스트가 옅은 진동을 보내온다.
“어라? 혹시 말을 알아듣나?”
“….”
“아닌가?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아더가 비스트를 흔들었지만, 조금 전과 같은 진동은 보내오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던 아더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에이. 총이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겠어?”
“….”
“안 그래, 비스트?”
물음에 비스트가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쩝 다신 아더가 옆에 있던 지니의 허리를 붙잡았다.
“억?”
지니의 탄성과 함께 아더가 뛰어올랐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레온의 앞에 도착한 아더가 방긋 웃었다.
“자 이제 탈출하죠, 레온.”
“….”
“목표물도 죽였고, 여기 더 있는 건 위험해 보이니깐.”
물음에 넋을 놓고 있던 레온이 정신을 차린다.
“자, 자네?”
“네?”
“이, 이거…. 생각하고 행동한 거지?”
“생각이요?”
“생각하고 함부르크 죽인 건 아니야?”
아더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생각하고 죽였죠.”
“….”
“그런데 그걸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일단 탈출하는 게 어때요?”
질문에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탈출하는 걸 왜 나한테 말해?”
“황자님 능력 있잖아요. 그 텔레포트 비슷한 능력.”
“…그걸로 빠져나가려 했다고?”
“어라? 안 되는 거였어요?”
레온이 경악해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한숨을 내쉰 레온이 두 눈을 감는다.
파앗-!
그 순간 번쩍이는 빛이 아더와 지니를 덮쳤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경매장으로 떠나기 전, 머물렀던 방으로 와 있었다.
그 이변에 놀란 지니가 입을 벌리는 사이, 아더가 중얼거렸다.
‘단번에 원하는 장소로는 이동할 수는 없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제약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과 함께 시선을 돌린 아더가, 흠칫 놀란다.
레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레온?”
“…죽을 맛인데 괜찮아.”
대답에 아더가 고개를 슬며시 내린다.
“눈에서 피 나오는데 그게 괜찮은 거라고요?”
“능력의 부작용이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굉장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이 있다?’
생각과 함께 아더가 새로이 알아낸 사실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였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털어 낸 레온이 아더를 향해 질문했다.
“자…. 이제 설명 좀 해 달라고. 함부르크는 왜 죽였는지, 이 엘프 아가씨하고는 무슨 사이인지.”
고개를 들어 올린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뭐부터 듣고 싶은데요?”
“…일단 이 엘프 아가씨하고의 관계.”
“동료였어요. 예전 용병 일을 할 때.”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연이 있었다고? 용병 일을 할 때?”
“네. 그때는 엘프인 걸 몰랐지만.”
“…그럼 옛 동료를 구하기 위해 함부르크를 죽인 거야?”
“아뇨?”
“…?”
“제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요?”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그건 옆에 있던 지니도 다르지 않았다.
“그, 그럼?”
“지니 씨 구한 건 옆에 있으니 겸사겸사 구해 드린 거고, 함부르크를 죽인 건 다른 이유예요.”
“…그 이유가 뭔데?”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못 죽이면 다시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
“여기 주둔해 있는 병력, 그리고 구역의 크기. 만약 도망에만 전념한다면 암살에 실패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럴 바에는 먼저 선수를 치자 생각했죠.”
레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적진 한복판에서 총질을 해 버렸다고?”
“결과적으로는 그랬죠.”
“그거… 그냥 참지 못해서 죽인 거 아니야?”
“아니죠.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 죽인 거죠.”
자신감에 찬 아더의 대답에 레온이 머리를 굴렸다.
‘…말이 안 되기는 한데, 또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사실 레온도 함부르크가 나타난 시점에서 암살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호위 병력도 문제였지만, 관객석에 앉은 정체불명의 경매 참가자들.
그들을 지키는 호위 병력의 수준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암살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들까지 합세해 우리를 쫓으면… 사실 탈출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더 바이에른이 함부르크를 난데없이 대놓고 죽이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났다.
같은 편인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혼란 속에서 탈출을 시도한다면, 암살을 했을 때보다 확률이 더 올라갈 것이다.
‘설마… 그걸 노리고 함부르크를 갑자기 죽여 버린 건가?’
레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죽여 버린 걸 거야.”
“뭐가요?”
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꺼내 든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쳤다.
“이건?”
“이곳 D-52구역 내부 지도야.”
“오…?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요.”
“당연히 훔쳤지. 마시알이 전해 준 거야.”
대답과 함께 레온이 D-52구역으로 통하는 정문을 가리켰다.
“도주로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정문을 통과하는 거겠지만 아무래도 막혀 있겠지?”
“….”
“그러니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하수구나 개구멍.”
레온의 설명에 아더가 질문했다.
“그 능력을 또 한 번 사용하면 안 될까요?”
“마킹이 안 되면 이동하지 못해. 그리고 내가 현재 마킹해 놓은 곳은 이 방이고.”
“흠…. 그럼 걸어가거나 뚫고 가야 한단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쉽지 않아.”
레온이 툭툭 손가락을 두들겼다.
“아마 그쪽도 우리가 향할 곳이 이런 곳이라는 걸 알 거야. 아마 이쪽에 병력을 몰아넣었겠지. 그러니 시선을 돌릴 무언가가 필요해.”
“시선을 돌린다는 의미는?”
“퇴로를 확보하기 시간…. 쉽게 말해 양동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지.”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한쪽이 소동을 일으켜 이목을 집중시킨 사이, 한쪽은 빠져나갈 길을 찾는다?”
“그렇지. 이런 개구멍이나 하수구로 이동하다 앞뒤로 막혀 버리면 답이 없으니깐.”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냥 최면을 쓰면 되지 않나?’
그때 보여 주었던 레온의 환각은 솔직히 말해 높은 수준이었다.
그 능력만 있다면 사실 몇 명이 몰려오건 이 자리를 탈출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즉… 그 능력을 지금 쓰지 못한다는 건데, 뭔가 특수한 조건이 있는 건가?’
고민에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최면을 자유자재로 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레온이 두 눈을 감는다.
“…마시알이 적당한 탈출구를 찾았다고 하네. 하지만 그쪽으로도 병력이 몰려가고 있다더군.”
“시간이 없단 소리네요.”
“그렇지.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이쪽으로도 함부르크의 병력이 덮치려 할 테니깐.”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끄는 건 제가 할게요.”
“자신 있어?”
“그럼 달리 할 사람이 있어요?”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나보다 자네가 그쪽에 더 용이하겠군. 하지만 빠져나올 수단쯤은 있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럼 이쪽 통로에서 만나 뵙는 걸로 하죠.”
이 말과 함께 시선을 돌린 아더가 지니를 바라봤다.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멍하니 황자와 아더를 바라보던 지니가 그 시선에 움찔 놀랬다.
“지니 씨는 이쪽 분을 따라가세요.”
“….”
“그럼 나중에 봐요, 지니.”
지니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옆에 있던 레온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적당히 소란만 피우다 합류하라고.”
아더가 대답하는 대신 창틀에 올라섰다.
그리고 노움의 능력을 일으켰다.
탁, 탁 탁-!
허공에 놓여진 발판을 이용해 지붕의 꼭대기에 올라선 아더가 D-52구역을 스윽 훑었다.
“침입자다--!!! 침입자!!!”
“어떤 미친놈이 경매의 주인을 살해했어!”
“절대로 가만둬서는 안 돼! 반드시 붙잡아!”
소란에 휩싸인 거리에서 비명과 신음이 난무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는 비스트를 까닥거리며 중얼거렸다.
“흠…. 어떻게 해야 시선을 모을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스트를 쏴 건물을 부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저들에게 포위할 구실만 줘 버릴 것이다.
‘뭔가 쾅… 이 구역 전체가 들썩일 만한 폭발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생각과 함께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아더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호오…?”
마정석으로 돌아가는 마력 발전소.
1t에 가까운 마정석이 모여 있는 전력 장치가 탐스러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