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아더가 흥미를 느끼고서 질문했다.
“엘프요? 이종족인가요?”
“그렇습니다. 천 년 전 사라진 혈족. 그들의 피를 이은 여자가 이번 경매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호오…. 혈족이면 혈통도 지니고 있겠네요?”
“그렇죠. 듣기로 정령술에 아주 일가견이 있던 종족인데 그들 선조 중에는 전설 속의 ‘정령왕’하고 직접 계약한 이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더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령왕이라니…. 대단하네요? 그 엘프가 노예로 나온다는 말이죠?”
“예. 물론 얻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윗선… 정확히 말하면 스폰서 분들이 대거 참석하시거든요.”
“오… 스폰서라면?”
“규정상 이 이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설명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문득 불안해져 제 능력을 일으켰다.
[자네 설마 노예를 사려는 건 아니지?]
[노예요? 제가 왜 노예를 사요?]
[그런데 뭘 그렇게 물어보나! 노예를 사지도 않을 거면서!]
[하지만 궁금하잖아요. 천 년 전에 사라진 이종족이라니…. 이런 분들은 만나 뵙기 쉽지 않다고요.]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다그쳐야 할지.’
그 미묘한 고민 속에서 피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허리를 숙인다.
“경매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그전에 짧은 파티가 열릴 건데 참석하시겠습니까?”
“파티요?”
“네. 경매에 참석하시는 분들만 들어올 수 있는 아주 프라이빗한 파티죠. 정체를 숨기고 나누는 사담. 상당히 재밌는 이벤트라 많이들 참석하십니다.”
설명에 아더가 턱을 쓰다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윗선이란 분도 나오는 걸까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죠. 저 같이 미천한 인간이 어찌 고객들의 정보를 알겠습니까?”
반문에 아더가 레온을 바라봤다.
[갈까요, 파티?]
[왜? 그냥 대기하는 게 낫지 않나?]
[그 윗선이란 분도 궁금하고… 고객들의 정체들을 좀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고객들의 정체를 파악한다?]
[듣기로 함부르크 에리슨은 뒷세계의 인간, 그중 거물이라 불리는 자들과 연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레온이 흠칫 놀란다.
[뒷세계의 거물? 설마 <해적>이나, <칠왕> 이런 쪽을 말하는 건가?]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파티장으로 가서 고객들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로 그런 자들이 왔는지 확인도 할 겸.]
아더의 설명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선을 돌린 아더가 입을 열었다.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예… 하지만 손님. 먼저 옷을 좀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죠?”
“모름지기 파티란 복장과 규격 그리고 참가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나뉘는 법이죠. 그리고 그중 가장 기본이 복장이고.”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저희 정장을 안 들고 왔는걸요?”
“대여 서비스도 있답니다.”
이 말과 함께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금화 하나를 튕겼다.
“…!”
금화 하나를 팁으로 건네줄 줄 몰랐는지, 사내의 말꼬리가 약간 흔들렸다.
“…최고급 양복으로 대여해 오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는 정말로 최고급 양복을 가져왔다.
환복을 한 아더와 레온은 조금 전보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파티장으로 향했다.
“오….”
“…큰데?”
감탄과 함께 아더와 레온이 화려한 샹들리에와 조명 아래에 있는 파티장을 훑기 시작했다.
하하하-!
호호호-!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치는 수십 명의 사람들.
그들은 저 바깥의 마약에 취한 사람들하고는 달리 여유와 기품이 넘쳤다.
‘이들이… 이곳의 진짜 주인이다 이건가?’
생각과 함께 아더가 입꼬리를 올릴 때였다.
앞장서 이곳을 안내한 삐에로 가면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이 말과 함께 삐에로 가면의 사내가 사라지고, 기다렸다는 듯 레온이 입을 연다.
[그럼 정보 수집?]
[네. 정보 수집하러 가시죠.]
레온이 자신만만하게 파티장 한복판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도 술잔 하나를 손에 쥔 채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러니깐 이번 사업이….’
‘저번 재개발 구역이 완전 노다지라던데….’
‘오늘 아주 그럴싸한 놈으로 하나 사 갈 거야…. 저번 노예는 너무 쉽게 망가…’
귓가로 들려오는 여러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섹터에 따라 나누어 머릿속에 저장하던 아더가 흠칫 놀랬다.
‘갈까?’
‘어디서?’
‘화장실에서 하지.’
이 말과 함께 한 남녀가 사라졌고.
‘어머…. 손길이 너무 과감한 거 아니야? 나 가벼운 여자 아닌데?’
‘내숭 떨지 마…. 이런 자리에서 그런 거 떠는 거 아니니깐.’
‘하하하하~ 짐승 같은 남자네~’
벽면에 기댄 남녀는 점점 한 몸으로 포개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오…. 단순한 사교의 장이 아니다 이건가?”
확실히 다시금 살펴보니 파티장 전체에 끈적한 분위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바깥의 거리와는 조금 다른 그 욕망의 덩어리를 흥미롭게 지켜볼 때였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혼자 왔어요?”
이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 가면을 뒤집어쓴 적발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고민하던 아더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혼자 왔어요.”
* * *
술잔을 부딪쳤다.
고양이 가면을 뒤집어쓴 여자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고, 아더는 마시는 척만 했다.
술잔 속에 마약이 타져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허나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잔에 든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보통 이런 데에 혼자 오시는 분은 거의 없는데.”
“그래요? 다들 일행이 있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나쁜 짓을 혼자 저지르는 것보다 여럿이서 같이 하는 게 재밌잖아요?”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죠. 죄책감도 덜하고….”
“후후…. 재치 있는 대답이네요. 그래서 그쪽은 이곳에 와서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어요?”
“흠…. 글쎄요. 일단 여러 가지를 생각 중인데 잘 모르겠네요.”
이 말에 여자의 손길이 아더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그럼 저랑 나쁜 짓 하러 갈까요?”
“….”
“조금 전부터 계속 궁금했어요. 이 정장 속에 어떤 육체가 숨겨져 있을까…. 한눈에 들어왔거든요.”
욕망 가득한 그 손길을 잠시 바라보던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반지? 그것도 다이아몬드네?’
그것도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였다.
보통 저 위치에 끼워진 반지들이 결혼반지라는 사실을 떠올린 아더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결혼하셨네요?”
아더의 가슴팍을 쓰다듬던 여자의 손길이 멈췄다.
“…그래서 더 좋지 않나요? 유부녀잖아요?”
“아…. 유부녀라서 더 좋은 건가요?”
“…?”
“죄송해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말이에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 아더를 바라본다.
고개를 숙인 아더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때, 고양이 가면의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랑이 가면을 뒤집어써 놓고, 강아지 같은 질문을 하시네요?”
“그런가요?”
“네. 흠…. 갑자기 흥미가 달아났어요. 가볍게 술이나 마실까요?”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술잔만 부딪쳤을 뿐, 술은 들이켜지 않았다.
허나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잔을 부딪칠 때마다 점점 취해갔다.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 톤도 점점 높아져 갔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두 종류죠…. 하나는 각박한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들. 하나는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
“고양이님께서는 어떤 쪽인데요?”
“저는…. 둘 다예요. 현실에서도 멀어지고 싶고, 제 욕구도 풀고 싶고.”
“흠…. 하지만 남편분이 보면 많이 가슴 아파하지 않을까요? 결혼을 하셨잖아요?”
고양이 가면을 뒤집어쓴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요? 과연 슬퍼할까요? 노예 출신인 저 때문에?”
아더가 놀라 질문했다.
“노예 출신…이요?”
“…저는 이곳에서 사들여진 노예예요.”
“….”
“아케인에서 성공한 사업가…네. 그분이 저를 사 갔죠.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이 그분에게는 30명이 넘게 있어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부인이 30명이요?”
“명목상으로 부인이지, 과연 저를 포함해 그들을 부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노리개가 어울리지.”
아더가 입맛을 다셨다.
“…노예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흔한 일이에요. 부모님께서 막대한 빚을 지셨고, 저에게 모든 걸 떠넘기셨죠.”
“…슬픈 사연이네요.”
“안타까운 사연이죠. 하지만 저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노예로 팔려 그 짐승 같은 남자와 함께 살지만, 덕분에 자유를 얻었거든요.”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래서 저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요. 가질 필요가 없죠. 그 남자도 이쪽이 아마 편할 테고.”
이 말과 함께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아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감상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어때요? 제 방으로 가실래요?”
질문에 아더가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뇨.”
“역시 강아지 같은 사람이네요.”
“개와 고양이는 어울릴 수 없죠. 그리고…”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울고 있잖아요?”
“…?”
“그런 사람하고 밤을 지새우는 건 조금 괴로워서요.”
고양이 가면의 여자가 놀라 중얼거렸다.
“제가… 울고 있다고요?”
“네. 그러니깐… 음. 그렇게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자기 위로를 할 필요도 없고.”
아더가 제 가슴팍에 있던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의 손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슬픔을 위장하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것…. 그것만큼 괴로운 건 없으니깐요. ”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운디네를 불렀다.
그 순간 청량한 기운이 고양이 가면 여자의 몸에 스며들어 미약의 기운을 몰아낸다.
화들짝 놀란 고양이 여자가 주춤주춤 물러설 때, 아더가 손을 흔들었다.
“재밌었어요, 고양이님. 다음에 또 봬요.”
고양이 가면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파티장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흠…. 운이 좋은 케이스네. 노예 치고 대접을 잘 받았어.”
노예의 끝은, 이런 사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유를 박탈당한 가축에 가까운 인간. 그게 노예.’
그리고 함부르크는 바이에른의 가신들을 그 노예로 만들었다.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살려 둘 이유가 점점 없어지네…. 뭐 나야 좋은 일이지만.”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여어~ 아더!”
저 멀리서 레온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옷이 왜 풀어 헤쳐져 있어요, 레온?”
* * *
“햐~ 여기 계신 레이디들은 모두 적극적이네. 빠져나오려다 죽을 뻔했어~”
싱글벙글.
입가에 미소를 띤 레온이 슬며시 질문했다.
“그래서 그쪽도 좋은 시간 보냈는가?”
“좋은 시간이요?”
“그래. 좋은 시간.”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시간이긴 했죠.”
“오호? 재밌는 시간?”
“네. 그런데 뭘 좀 알아내셨어요?”
레온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이 D-52구역을 후원하는 인간들인가 봐.”
“후원이요?”
“저쪽 용어로 놀이터라 하더군…. 쉽게 말해 돈이 썩어 넘쳐 흐르는 인간들이, 제 욕망을 풀어내기 위한 장소를 칭하는 은어라더군.”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그럼 이곳을 박살 내면, 그 인간들이 전부 적이 되겠군요?”
“그런 셈이지. 느끼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위험한 곳이야…. 설마 이런 곳이 이렇게 운영되고 있을 줄이야.”
이 말과 함께 레온이 숙였던 고개를 든다.
그와 동시에 걸음을 멈춘 아더가 시선을 돌려 거대한 극장을 바라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이는 좌석만 대략 1000개였는데, 이곳이 노예 경매장인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저 좌석이 전부 찬다 이 말이지?’
생각과 함께 아더와 턱을 쓰다듬을 때였다.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티켓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아더와 레온이 조금 전 받은 티켓을 내밀었다.
삐에로 가면을 쓴 사내가 그 티켓을 조심스레 살핀 후, 허리를 숙였다.
“이쪽으로.”
중앙에 위치한 좌석이었는데,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위치였다.
자리에 앉은 아더와 레온은 다시 정보 공유를 시작했다.
[수비 병력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네. 전투 갱단 마피아 100여 명을 고용했다더니, 그보다 더 많은 거 같아요.]
[내 생각엔 함부르크 그자가 고용한 전투 갱단 마피아는 100여 명이 맞을 거야. 나머지는…]
말을 흐린 레온이 경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가리켰다.
[이곳에 들어온 저 쓰레기들의 호위 병력이겠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툭툭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 호위 병력들도 상대해야 하나?’
던져진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사고를 일으키면 저들 모두가 합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합류하는 자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럼 저들까지도 계산의 영역에 넣고 싸워야겠네. 흠….’
말을 흐린 아더가 계속해서 궁리하는 사이, 경매장 좌석이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 여기 오면 언제나 떨린단 말이지.”
“오늘은 무슨 매물이 나올까?”
“아무래도 오늘 최고 기대 매물은 역시 엘프겠지?’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 소리와 함께 아더와 레온이 중얼거린다.
“시작하는 것 같지?”
“네. 그런 것 같네요.”
그 순간 암막이 내려앉았다.
소란스럽던 관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무대 위로 몰렸을 때였다.
팟-!
조명이 켜지고,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의 눈이 커졌다.
“어라?”
무대 위에 등장한 중년의 사내.
그 사내의 볼록 튀어나온 배가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절도 있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사내가 고개를 든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무대 정중앙에 선 사내가 양팔을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랄랄랄> 노예 경매시장의 주인… 함부르크 에리슨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