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그러니깐…. 그 노예 상인이 케인 도르문트의 뒷자금을 조성하고 있다?”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흥미롭네…. 케인 도르문트의 정보는 마시알도 빼내 오지 못한 건데.’
황실의 기밀조차 빼 온 마시알이다.
대륙 전역을 뒤져도, 그보다 뛰어난 스파이는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 마시알조차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아더 바이에른이 알고 있었다.
‘이걸 믿어야 하나? 아니…. 믿지 않더라도 나쁘지 않은 건가?’
진실 여부를 떠나, 아더 바이에른이 도움을 청해왔다.
이건 칸 마드리드를 처리하기 위한 비밀 결사 조직을 운영하는 레온의 입장에서 아주 좋은 신호였다.
‘바이에른 공작가의 후계자. 이보다 더 훌륭한 인재를 어디서 찾겠어?’
그래서 진실 여부는 딱히 문제 되지 않았다.
맞다면 칸 마드리드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케인 도르문트의 자금줄을 끊어내는 것이고, 아니더라도 아더의 믿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깐.
여기까지 생각한 레온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친구인가?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 이 바닥 격언처럼?”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는 무슨, 협력 관계죠.”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주 일요일 1시. 중앙 광장에서 뵙죠.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해 드릴게요.”
* * *
약속 당일.
아더는 비스트와 운철검의 상태를 체크하면서 중얼거렸다.
“흠…. 즉흥적으로 영입하기는 했는데, 잘되려나?”
레온 마드리드.
속을 알 수 없는 제국의 황자.
밝히기로는 칸 마드리드, 그 남자를 죽이는 것이 목표라 하지만 아더는 믿지 않았다.
‘다른 속내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그런데도 레온 마드리드에게 이번 일을 제의한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혈통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깐.’
거기다 이번 함부르크 쪽에 고용된 수많은 전투 갱단과 용병을 고려하면, 레온의 능력은 큰 힘이 되어 줄 가능성이 컸다.
‘배신을 안 한다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뭐 배신을 해도 상관없겠지.’
만약 뒤통수를 때리면 이번에야말로 죽이면 될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정비를 끝낸 비스트와 운철검을 챙겨 B-17 구역으로 향했다.
“여어-! 아더 바이에른!”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레온이 손짓한다.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복장이 그게 뭐예요, 황자님?”
“응? 복장?”
“네. 어디 놀러 가세요?”
이 말에 레온이 야자수가 그려진 제 티셔츠를 자랑스레 들어 올렸다.
“예쁘지 않나?”
“….”
“저기 화아이 제도라는 곳에서만 파는 특별한 옷인데 요즘 젊은 애들은 여행을 갈 때면 꼭 이 옷을 입고 간다더군!”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행에 민감한 분이셨어요?”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내가 이 옷을 입고 온 건 그 이유만이 아니야.”
레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여행 패키지를 예약한 손님이지 않나? 의심을 안 사려면 그에 걸맞은 복장을 갖춰야지!”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호오…. 그래서 변장을 했다?”
“그렇지! 오히려 자네 복장이 더 눈에 띄어! 여행을 가는 사람이 무슨 그런 칙칙한 망토를 두르나?”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레온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지금 복장은 여행을 갈 때 입는 옷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완벽한 여행객으로 보여야 의심을 안 살 테고…. 그래야 암살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지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혹시 그 옷, 한 벌 더 있나요, 황자님?”
“당연히 있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거든!”
“그런데 망토가 없으면 무기를 가릴 수가 없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아주 교묘히 감춰 줄 테니깐. 흐흐….”
레온의 호언장담과 함께 아더가 건네받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시에 차고 있던 권총과 칼이 투명해졌는데, 마력이 느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와 그 눈, 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레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v자를 그렸다.
“내 눈이 조금 특별하긴 하지! 그런데 그 노예 상인들은 언제쯤 오는 건가?”
“아마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한 10분 뒤?”
이 말과 함께 저 멀리서 세련된 마차 하나가 달려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과 아더가 잡담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혹시 <랄랄랄> 여행 패키지를 예약하신 분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레온의 대답에 마차에서 내린 마부가 제안한다.
“곧바로 여행지로 갈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B-41구역에 조성된 휴양지가 첫 번째 목적지인데 아주 보기 좋은 경관…….”
그 설명을 아더가 손을 들어 끊었다.
“돈은 많고 사고 싶은 건 없네요.”
“….”
“그래서 그런 휴양지 말고 프라이빗한 곳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 말에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무슨… 소리야, 저게?’
혹시 암호 구호 같은 건가?
생각과 함께 시선을 돌린 레온이 흠칫 놀란다.
조금 전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걸고 있던 마부의 얼굴에, 웬 기괴한 피에로 가면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행이 아니라 다른 쪽에 용무가 있으신 분들이었군요.”
정중히 허리를 숙인 마부가 서늘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B-41구역이 아니라 D-52구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차에 올라타 주십시오.”
* * *
마차가 내달린다.
아케인에 존재하는 4개의 주거 지역 중에서도 빈민촌이라 불리는 D구역으로.
그 속에서 황자가 제 능력을 일으켜 질문했다.
[혹시 조금 전 그게 암호였던 건가?]
머릿속으로 들려온 황자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설픈 거 아니야?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암호를 대고 노예 경매장에 입장할 수 있다니?]
아더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려 앞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린 레온이 흠칫 놀랬다.
‘안 보는 척하면서, 귀는 열어 두고 있군.’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모습이 평범한 마부라 보기 어려웠다.
여기까지 생각한 레온이 제 혈통 능력을 일으켰다.
[마음속으로 말해 보게. 그럼 소리 내지 않고 나랑 대화할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아더가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그 말에 따랐다.
[들리세요? 황자님?]
[잘 들리네.]
[오…. 이것도 신기한 능력이네요.]
[텔레파시의 일종이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더 상위의 소통수단이기도 하고.]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으로 이렇게 대화하죠. 저 마부, 조금 전부터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를 완전히 신임하는 건 아닌 모양이에요.]
[…암호가 전부는 아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 이 암호가 전부겠죠. 애초에 아케인에서 노예 시장이 한두 곳 있는 곳도 아니고.]
[한두 곳이 아니라고?]
[네. 이런 곳도 경쟁이 있죠. 그런데 철저하게 검문을 해서 사람을 들이게 되면 과연 많은 손님을 유치할 수 있을까요?]
설명에 레온의 표정이 모호해진다.
그때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설명에 아더와 레온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부가 툭, 제 가면을 가리켰다.
“준비물은 잊지 않고 챙겨 오셨겠죠?”
“물론이죠. 짜쟌.”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가면을 꺼내 든다.
옆에 있던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이건…. 또 뭐야?”
“준비물이라는데요? 일단 쓰죠. 레온.”
레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우 가면을 뒤집어썼다.
아더는 호랑이 가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부가 허리를 숙인다.
“<랄랄랄> 경매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동시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철문이 열린다.
시선을 돌린 레온과 아더가 눈을 크게 떴다.
“호오…?”
D-52구역.
그곳은 빈민촌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였다.
* * *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캬하하하~
하하하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온은 표정을 굳혔다.
‘마약. 미약…. 아니 이걸 뭐라 불러야 하지?’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모두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어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웃음이 비현실적인 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인간은 저렇게 오래 웃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흠…. 저 사람들 울고 있네요.”
“…울고 있다고?”
“네. 목소리에 흐느낌이 들려오잖아요?”
레온의 눈이 치켜떠졌다
자세히 들어 보니 정말로 아더의 말처럼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평범한 마약이 아니란 건가?’
생각과 함께 레온의 표정이 모호해질 때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울다 웃으면 똥꼬에 털 난다는데. 흠….”
“…그게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인가?”
“없는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레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사이 앞장서 걸어가던 마부가 고개를 돌린다.
“저희 쪽에서 유통하는 약입니다.”
“약이요?”
“네. 아주 특별한 약이죠.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꿈꾸던 곳으로 갈 수 있는 환상의 세계. 그곳으로 들어가는 매개체를 저희는 [AB-21]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마부가 무언가를 내민다.
파랑과 빨강. 두 개의 색이 섞인 기묘한 약이었다.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마부의 권유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는 약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서요.”
“그럼…?”
“듣기로 이곳에 경매가 열린다던데요?”
마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 경매 말씀이군요. 예약이 필요하니 일단 숙소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아더와 레온을 화려한 조명에 휩싸인 방 안으로 안내했다.
“조금 있으면 저 말고 다른 지배인이 모시러 올 겁니다.”
설명과 함께 허리를 숙인 마부가 방을 나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곳이군…. 공기도 분위기도 풍경도.”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처럼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옅은 조명과 어둠에 잠긴 건물들.
D구역 자체가 원래 이런 폐촌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특수한 결계를 쳐서 외형을 가린 건가? 그럼 마법사도 있다고 봐야겠네….’
생각과 함께 아더가 손가락을 툭툭 두들겼다.
그 사이 가면을 고쳐 쓴 레온이 입을 연다.
“그래서 작전이 뭐야?”
“작전이요?”
“설마 그냥 대놓고 암살을 하겠다, 이런 거 아닐 건 아니야.”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일단 여기서 함부르크 에리슨. 그자의 위치를 파악 할 거예요.”
“그다음은?”
“저와 황자님의 능력을 합쳐서 암살. 그 후 탈출할 예정이에요.”
레온이 눈을 끔뻑였다.
“그게 끝?”
“네 끝인데요?”
“…설명만 듣고 보면 그냥 암살인데?”
레온의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뭐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뭐 자세한 계획을 짤 수도 있지만 생각해 봐요. 황자님.”
아더가 손가락으로 툭 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황자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스르륵 바뀌더니 나직이 감탄했다.
“감시하고 있어?”
“네. 저 지붕 너머 사람도 그렇고, 오면서 계속 지켜봤는데 저런 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감시를 하고 있었어요.”
“….”
“이런 상황에서는 일일이 계획에 맞추기보다는 현장에서 발생한 변수를 감안하고 즉석에서 판단하는 게 낫죠.”
레온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럴듯하구만? 그런데 자신 있나?”
“저야 자신 있죠. 황자님이 발목만 안 잡는다면.”
레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보여 준 실력을 보면 영 거짓말도 아니고….’
허나 아더의 말만 믿고, 아무런 정보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레온은 제 눈에 숨겨진 능력을 일으켰다.
그 순간 공간이 뒤흔들리더니, 실눈의 사내.
마시알 더스트가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마시알. 함부르크 에리슨. 그자의 위치 좀 파악해 줘.”
[알겠습니다, 황자님.]
이 말과 함께 실눈의 사내가 사라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저분도 데리고 왔어요?”
“나와 항상 연결되어 있지. 위치는 일단 마시알에게 맡겨 두자고.”
황자의 대답에 아더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저 사람 말고도 따르는 사람들이 더 있나요?”
“여기저기 퍼져 있어. 지금은 없지만.”
이 말끝으로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와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대답에 방문이 열리고 피에로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체격을 보니 조금 전 마부하고는 다른 자인 듯했다.
“다행히 오늘 경매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손님.”
“오. 그거 다행이네요.”
“네. 사실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입니다. 노예 경매는 예약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참가하기가 힘들거든요. 거기다….”
말을 흐린 마부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경매에는 아주 특별한 노예가 나온답니다. 혹시 ‘엘프’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엘프요?”
“예. 천 년 전 사라진 종족….”
설명에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미의 화신(化身)이라 불리는 숲의 주인. 그 후예가 오늘 경매에 나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