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말을 끝마친 순간 레온 마드리드는 무언가 제 배에 닿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 하지만 칼보다 날카롭다.’
생각과 동시에 시선을 돌린다.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뻗어진 아더의 손이 정확히 제 복부의 중심을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웠다.
검기도, 그렇다 해서 특별한 마법도 아닌 손에 불과한데 꿰뚫린다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으니.
‘뿜어내는 기세 하나만으로…. 죽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준 건가?’
생각과 함께 레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17살이 이런 기세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아더가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때 제 머릿속을 봤군요, 황자님?”
레온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봤지. 무엇보다 내가 직접 최면을 걸었으니깐.”
“위험하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당신 여러모로 위험해요.”
아더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래서 죽여야겠어요. 원망은 안 들을게요.”
이 말과 함께 아더의 손끝이 레온의 복부로 파고든다.
너무나도 생생한 감각에 레온이 눈에 힘을 주었다.
‘진짜로 파고들었어? 맨손인데?’
의문과 동시에 레온이 뒤늦게 떠올린다.
아더 바이에른의 특이한 혈통 능력이었다.
‘아…. 젠장! 그 능력을 사용해서 꿰뚫은 거구나!’
탄식과 한숨 사이에 있는 숨결을 내뱉으며 레온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도 똑같아.”
“…?”
“너랑 똑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칸 마드리드. 그 남자를 죽이는 게 내 목표다.”
파고들던 손끝이 멈칫 한다.
그 감각을 느낀 레온이 다급히 설명한다.
“그래서 말했지 않나. 너와 나는 운명이라고.”
“….”
“일단 이 손부터 빼고 대화를 좀 하지 않겠나? 이대로 내가 쓰러지면, 우리 둘 모두에게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제안에 아더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레온은 조급함을 느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지금껏 보아온 아더 바이에른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재촉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주효했다.
아더가 예고도 없이 집어넣었던 손을 뽑아 든다.
“큭!”
신음을 내뱉은 레온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그런 레온의 행동에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사이 아더가 제 손에 묻은 레온의 피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제국 황가의 피는 맛이 없어요.”
“…?”
“영양가도 없고요. 겉보기에는 참 탐스러운데…. 쓰레기보다 역한 맛이 느껴지니.”
레온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이건 좀 진심으로 무서운데.’
저 말은 맞다면 아더 바이에른은 다른 황가의 일원의 피를 맛보았단 소리 아닌가?
레온은 살짝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붙잡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아더가 털썩 주저앉으며 질문한다.
“황자님은 왜 칸 마드리드를 죽이려는 거죠? 혈육인데다 형님이잖아요.”
레온이 입꼬리를 비튼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건 말해 줄 수 없지.”
“...”
“나도 자네의 머릿속 전부를 본 건 아니거든. 그러니깐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사실을 말해 주지.”
아더가 탄성을 터트린다.
“이 상황에서 제안을 해요? 황자님 진짜 대단하네요.”
“최악의 상황에서 기회를 잡아라. 그게 내 신조거든.”
“흐음…. 전 동의 못 하겠네요. 최악의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에요. 여기서 당장 황자님이 죽으면 기회도 못 잡잖아요?”
레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죽이려고?”
“글쎄요. 고민 중이에요…. 제 머리는 당신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데.”
말을 흐린 아더가 웃는다.
“제 가슴은 당신을 죽이라고 시키네요. 보통 이런 경우 전 가슴이 시키는 쪽으로 가는데….”
“….”
“그러니깐 뭔가 좀 그럴싸한 걸 말해 봐요. 제가 황자님을 죽이지 않을 이유 말이에요.”
레온이 입을 다문다.
여태 표정을 잘 관리한 그였지만, 이번 대답에서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곤혹스러움이 훤히 드러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더가 입을 연다.
“째깍째깍.”
“…?”
“시간 가요, 황자님. 어서 대답해 주세요.”
진심으로 경악한 레온이 중얼거린다.
“진짜 항상 예상을 깨는구만….”
“그게 황자님의 대답인가요?”
“아, 아니! 아니야! 잠시 기다려 봐! 나도 생각 좀 해 봐야지….”
말을 흐린 레온이 손가락을 튕긴다.
“상급 영단 줄게. 어때?”
“그건 당연히 줘야죠.”
“…?”
“사과의 의미로 원래 주려 했잖아요. 그걸 테이블에 올리는 건 반칙이죠.”
레온이 당황해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그건 너와 내가 같은 뜻을 공유했을 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이라고!”
“아 그래요? 하지만 이걸로는 성에 안 차는데.”
아더가 방긋 웃는다.
“그러니 다른 걸 제시해 봐요. 이 상급 영단만 믿고, 황자님의 말을 믿어 줄 순 없잖아요.”
아더의 재촉에 레온이 다시 고민한다.
하지만 그럴듯한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밝히면 협조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인 의견을 비칠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생각과 함께 레온이 신음을 토해 낸다.
느껴지는 고통 탓인지 몰라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애써 봐야 좋은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 탓에 레온이 식은땀만 뻘뻘 흘릴 때 침묵하던 아더 바이에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흠칫 놀란 레온이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는 그때, 아더가 탄성을 터트린다.
“아 젠장. 수업 시간을 깜빡하고 있었네.”
“...?”
“황자님 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다음에 만날 때 알려 주세요. 그때는 이번처럼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경고와 함께 아더가 손을 뻗는다.
그 순간 흘러나오는 청량한 기운이 레온을 감싼다.
그와 동시에 통증이 점점 멎어 갔는데, 놀란 레온이 중얼거렸다.
‘아더 바이에른의 정령인가?’
생각과 함께 레온이 참아 왔던 숨결을 토해 내는 사이, 아더가 상급 영단을 챙겨 들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정말로 자리를 떠, 사라져 버렸다.
“….”
그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레온이 중얼거렸다.
“…저 녀석 진짜 미친놈인가?”
고민하던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미친놈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 맞아.’
생각과 함께 레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결국 상급 영단만 뺏어갔다 이거지?”
제 편이 되어 주는 조건으로 어렵게 구한 상급 영단.
그런데 그것만 날름 받아가 버린 것이다.
울컥한 레온이 미간을 모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손해만 입은 건 아니야.’
오늘 만남을 통해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아더 바이에른.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 형님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더의 생각보다, 레온에게 매우 뜻깊은 의미였다.
‘역시… 우리는 친구가 될 운명이야, 아더 바이에른.’
입꼬리를 올린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지각이구만.”
아더와 대화하느라 몰랐는데 수업 시간에 10분이나 늦은 상태였다.
고민하던 레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각 한두 번 하나…. 낮잠이나 자야겠어.”
* * *
수업을 모두 마친 뒤, 아더는 손안의 상급 영단을 굴리며 생각했다.
‘어떤 이유는 있을 줄 알았지만…. 칸 마드리드를 노리는 거였다고?’
레온 마드리드.
제국의 황자이면서 제국의 기밀을 훔쳐 낸 산업 스파이.
당연하지만 제국의 황자가 제 나라의 기밀을 훔쳐 낼 이유는 몇 없었다.
그래서 아더는 가벼운 권력 다툼 정도로 생각했는데, 설마 제 형님을 죽이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그래서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가?’
칸 마드리드는 황태자 자리에 올라서고 난 뒤,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반란의 낌새를 원초에 차단하기 위해 내린 피의 숙청이었다.
허나 그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레온 마드리드였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숙청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였구나. 레온 마드리드는 대비했던 거였어.’
그 대비의 범위가 자신처럼 미래의 일을 전부 알고서인지, 아니면 작은 단서를 통해 알아낸 추측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이건 확실했다.
레온 마드리드는 칸 마드리드의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다.
넓은 이유에서건 좁은 이유에서 간에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레온 마드리드가, 나에게 협조를 구했다라….’
턱을 쓰다듬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같은 편은 몰라도, 한 번쯤 이용할 순 있을 것 같은데?’
그 탓에 수업 핑계를 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일단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혹시 모를 제 정신병 때문에 황자를 죽여 버리면 곤란했으니.
‘제정신이 아닌 나라면 죽였겠지만…. 제정신인 나는 그래서는 안 되지.’
제국의 황자 정도라면 써먹을 곳은 충분히 많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제 손에 들린 상급 영단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상급 영단이 진짜로 실존하긴 했구나.”
오묘한 파란빛을 내뿜는 작은 알약에서는 조금 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정제된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양을 어림짐작 따져 보아도 한 서클은 너끈히 만들 수 있을 정도.
그래서 아더는 이 파란빛의 알약이 그 소문의 상급 영단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먹기만 한다면…. 바로 3서클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만약 성공한다면 검을 든 지 고작 3년.
그 3년 만에 3서클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 탓에 아더는 기대를 숨기지 않으며 영단을 소중히 품에 숨겼다.
혹여라도 깨질까 운디네에게 말해 보호막까지 건 상태로 집에 들어온 아더는 곧바로 안나에게 부탁했다.
“안나. 저녁은 됐으니깐, 내일 밤까지 아무도 내 방에 들이지 말아 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자님?”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그러니깐 절대로 내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아 줘.”
안나가 눈을 끔뻑이다, 더없이 진지한 아더의 표정을 뒤늦게 발견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게요.”
그녀의 대답에 아더가 곧바로 방 안에 들어선다.
그리고 조금 전 숨겨 두었던 영약을 꺼내 듦과 동시에 정령들을 불렀다.
“운디네 노움 씨. 영단을 섭취할 동안 주위를 좀 살펴 줘.”
[응 아더!]
[…알았어!]
정령들의 대답에 아더가 제 손바닥에 놓인 상급 영단을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순간.
화악-!
알싸한 향이 입안을 점령했다.
박하 향과 비슷한 향이었는데, 그 향이 식도를 타고 배 속으로 들어가자 정체 모를 뜨거운 기운이 되어 거칠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나. 그것도 순도 높은 덩어리로 된 마나야.’
생각과 함께 아더가 그 마나들을 단번에 휘어잡으려 했다.
허나 영약 속에 숨겨져 있던 마나들은 그 의지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칠게 난동을 부리며 아더의 의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난폭한 움직임에 아더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쾅-!
아더의 내면에서부터 일어난 작은 폭발과 함께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마나들이 영약에 담겨 있던 마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영약에 담겨 있던 마나들이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순순히 놔줄 아더가 아니었다.
쿠크크크-!
파도와도 같이 밀려온 아더의 마나들이 영약의 마나들을 먹어 치운다.
영약의 마나들이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 발버둥이 길어질수록 아더의 마나는 영약의 마나들을 더욱 거칠게 다루었다.
우웅-!
그리고 잡아먹힌 마나의 양이 늘어날수록, 아더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두 개의 고리가 더욱 큰 울림을 보내왔다.
그 울림이 귀를 넘어 뇌까지 흔들어 대는 순간, 아더는 두 눈을 번쩍 떴다.
화악-!
내려앉은 침묵.
그 속에서 아더가 탄식을 터트렸다.
“와…. 진짜 많네. 이 정도면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데?”
3서클이 될 수 있는 마나의 양이라 생각했지만 상급 영단에 숨겨진 마나의 양은 그보다 더 많았다.
‘4서클이 될 수 있는 양은 아니지만…. 4서클이 바로 되기 직전. 그 양까지는 충분히 될 수 있겠어.’
그 증거로 3서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양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엄청난 양의 마나가 제 핏줄 속에 숨어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거의 4서클을 이루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래서 아더는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4서클이 되면, 이제 단 하나의 서클만 이루면….’
드디어 검기를 다루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에 아더가 몸을 떨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흠…. 이렇게 되면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아더가 몸을 돌려 책장을 열었다.
그 순간 과거로 돌아와 지금까지 모아온 정보가 있는 스크랩 북이 보였다.
그 책을 집어 든 아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피의 복수…. 그 일을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