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58화 (58/265)

제58화

감겨 있던 두 눈이 떠진다.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들려왔다.

“깼어요, 엘린?”

“…?”

“갑자기 잠들어서, 차 타고 집에 가는 중이에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엘린이 아직 뻐근한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내가…. 잠들었다고?”

“네. 많이 피곤했는지 갑자기 픽 쓰러져 버리던데요?”

아더의 설명에 엘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뒤늦게 아더의 무릎에 누워 있었다는 걸 깨닫고 소리쳤다.

“미, 미안! 많이 무거웠지?”

“아뇨? 가벼워서 아무런 느낌도 안 났어요.”

“…진짜?”

“네. 이걸 왜 거짓말하겠어요?”

아더의 말에 엘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 후 시선을 돌려 조금 전까지 누웠던 허벅지를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 허벅지에서 잠을 잘 수가 있지?’

생각과 함께 엘린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더를 향해 사과하려 할 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내가 왜 잠들었지?’

고민과 함께 엘린이 미간을 찌푸린다.

허나 아무리 애써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더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아무리 피곤해도 딱 그 부분만 기억이 안 난다고?’

생각과 함께 엘린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아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연다.

“아 참. 오늘 이야기 잘 들었어요, 엘린.”

“…?”

“홀란 대부님 이야기는 많이 못 들은 것 같은데, 그건 다음에 해 주세요. 여러모로 재밌었어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 가지를 했어요. 엘린이 살던 북부 이야기도 하고, 서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 서로에 관한 이야기? 내가 뭐랬는데?”

“거기서 딱 기절하는 바람에 듣지 못했어요.”

“거기서…. 기절했다고?”

“네.”

엘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서로에 관한 이야기? 아니…. 그런 이야기를 왜 나눈 거래?’

의문과 함께 엘린의 미간이 살며시 찡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표정 관리를 하며 중얼거렸다.

‘보아 하니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둘러대면 되겠지?’

굳이 레온 마드리드.

그 남자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렇게 조금 전 사태를 마무리 지은 아더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해결 못 할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어째서 내가 미래의 엘린을 모르는 걸까?’

중얼거림과 함께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의 자신은 엘린에 대해 모른다.

세비스찬의 독에 의해 10년간 미쳐 있었다 하더라도, 정신을 차린 그 뒤의 미래에서 엘린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홀란 레버쿠젠…. 대부님의 뒤를 이어 새로운 북부 사령관이 됐다면, 분명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비정상적인 기억력이다.

그걸 고려하면, 엘린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 봤어야 정상이었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어딘가 힘이 빠져 버린 엘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엘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가정일 뿐인 고민.

하지만 이런 쪽의 예감은 불행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엘린을 바라보던 아더의 눈살이 좁혀졌다.

‘그 무슨 일이…. 안 좋은 쪽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 *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던 마시알 더스트 현상 수배범 의뢰.

그 의뢰에서 아더는 뜻하지 않게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레온 마드리드, 그리고 엘린.’

허나 그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 달라진 건 없었다.

레온 마드리드도 엘린 레버쿠젠도 어떤 행동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레온 마드리드 쪽은….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되겠지.’

기회가 왔을 때 죽였으면 모를까.

제국의 황자를 암살하기 위해 움직였다, 실패하면 엄청난 리스크를 지게 될 것이다.

굳이 그 리스크를 짊어질 생각이 없던 아더는 첫날과 마찬가지로 당분간 지켜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쥐고 있는 약점을 고려하면 레온 마드리드 쪽이 더 크니깐… 저쪽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겠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정리한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등굣길에 올랐다.

웅성웅성.

첫 수업은 치즈이 교수의 마도공학 강의.

재밌고 유익한 수업이지만 치즈이 교수의 깐깐하고 엄중한 성격 탓에 까다로운 수업이기도 했다.

그 탓에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10분이나 되었지만, 벌써 대부분 좌석이 가득 차 있었다.

“하아….”

“주말이 끝나자마자 치즈이 교수 수업이라니….”

“나 아직 주말 과제도 못 끝냈는데, 이러다 낙제점 받는 거 아니야?”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아더가 제자리로 찾아가 앉았다.

그 후 필기구와 노트를 꺼내 들며 치즈이 교수를 기다릴 때였다.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

예니카 헤이즐.

이번 분기 1학년 중 외모가 가장 뛰어나다 알려진 헤이즐 기업가의 장녀였다.

이제 한 달이 돼서 적응됐을 법하지만, 교실에 있던 남학생들은 그런 예니카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와…. 볼 때마다 새롭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인형 아니야? 표정도 없고 예쁘기는 더럽게 예쁘고.’

‘인형일 수도 있어. 저런 외모면 충분히.’

그 집중된 이목 속에서 예니카가 힐끔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자리 한구석에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는 아더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옮긴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예니카?”

“네. 주말 동안 잘 쉬었나요?”

질문과 함께 예니카가 아더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네, 잘 쉬었죠. 그런데 왜 옆에 앉으세요?”

“앉으면 안 돼요?”

“비어 있는 데로 가세요. 전 예니카랑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고요.”

예니카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니깐 더 옆에 있고 싶네요. 공자님이 저에게 한 짓이 떠오르니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요? 제가 예니카에게 뭔 짓 했나요?”

“어머. 모른 척하실 거예요?”

“진짜 모르니깐 모르는 척이라곤 할 수 없죠. 제가 뭔 짓을 했는데요?”

예니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마시알 더스트.”

“….”

“제가 붙잡은 그 남자가 가짜라는 거, 공자님은 알고 계셨죠?”

아더가 탄성을 터트린다.

“오…. 그 사람 가짜예요?”

“…끝까지 모른 척하시네요.”

“그럼 모른 척해야죠. 제가 예니카랑 친구도 아니고, 그런 사실을 왜 공유하겠어요?”

예니카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순간 사라진다.

“참 얄밉네요, 공자님.”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나중에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거부해도 되나요?”

예니카의 눈꼬리가 움찔 떨린다.

하지만 제안을 거절한 아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던 예니카가 한숨을 내뱉었다.

“피 한 방울 드릴게요.”

“….”

“피 두 방울.”

“….”

“피 세 방울. 더는 안 돼요.”

아더가 고개를 돌리며 방긋 미소 짓는다.

“어디서 이야기할까요, 예니카?”

“….”

“제가 아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로 갈래요?”

예니카가 입꼬리를 씰룩일 때였다.

교실 문이 열리고 치즈이 교수가 등장했다.

“어…. 음…. 안녕하세요?”

다소 소란스럽던 교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는다.

그사이 단상으로 올라선 치즈이 유올라가 입을 연다.

“그럼 출석부를 부르겠습니다….”

“...”

“출석부를 부른 뒤에는…. 지난주에 내주었던 과제의 평가를 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는 학생…. 있나요?”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아니요라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치즈이 교수가 출석부를 불러 나간다.

그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출석한 것을 확인한 그는 두툼한 서류 더미를 들어 올렸다.

“이번 과제 평가의 채점지입니다. 평가 등급은… A~F까지. 여러분들이 작성한 논문의 해석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평가했습니다.”

“….”

“과제 점수의 반영이 크니…. D등급 이하를 받은 학생들은 조금 더 분발해 주세요…. 낙제점이 되면 다시 수업을 들어야 하니깐.”

이 말과 함께 치즈이 교수가 옆에 있던 조수에게 채점지를 건네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긴장과 떨림.

그리고 미묘한 흥분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근 1학년들이 맡은 과제 중에서, 치즈이 교수의 과제가 제일로 악랄했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모든 학생에게 채점지가 분배되었을 때였다.

탄식과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어?”

“하?”

“…이거 맞아?”

수군거림과 함께 탄성을 터트리던 학생들도 탄식을 터트렸다.

그 분위기를 치즈이 교수가 가만히 지켜보던 때, 한 학생이 일어나 소리쳤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채점의 기준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치즈이 교수가 대답한다.

“말씀드렸지만…. 작성한 논문에 대한 이해도. 그걸 바탕으로 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이 손을 든다.

치즈이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든 학생이 재빨리 입을 연다.

“채점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도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데, 이 부분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치즈이 교수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해도라는 것은…. 주관적이죠. 그러면 거기 손을 든 학생···?”

“네?”

“이름이… 하슈칼 브레인…. 맞습니까?”

지적당한 하슈칼이 잠시 움찔 놀랐지만 이내 침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교수님.”

“하슈칼 학생은 제가 어떤 식으로 채점을 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죠?”

하슈칼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좋아요…. 하슈칼 학생. 당신이 적은 논문에 관해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학생은 <마도공학>의 물리력에 관해 설명했지요…. 그럼 물리력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습니까?”

하슈칼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마, 마도 공학의 물리력은 사물에 대한 이해나 판단의 힘. 그중에서도 마도 공학이 깃든 힘을 정의….”

“틀렸습니다.”

“…?”

“다시…. 말씀해 보세요.”

하슈칼이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치즈이 교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하슈칼이 억울하다는 듯 거친 목소리로 질문한다.

“하, 하지만 교수님! 이건 교수님이 나누어 주신 제본에….”

“네. 제가 나누어 준…. 제본에 있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틀렸다는 겁니다.”

“…?”

“그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일 뿐…. 당신의 의견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슈칼이 놀라 입을 다문다.

그사이 치즈이 교수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연다.

“[논문]이란…. 제 학문적 주장이나 가설을…. 적합한 절차와 형식에 맞춘 이론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글을 뜻합니다….”

“….”

“하지만 여러분들이 적어 낸 것은…. 여러분들의 의견이 아니라…. 제 의견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글을, 어디 가서 논문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대다수가 입을 다문다.

조금 전과는 달라진 그 분위기 속에서 치즈이 교수가 선언한다.

“그래서 제가 나누어 준 제본의 글을…. 그대로 따오거나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학생들은 대부분…. F를 주었습니다.”

“….”

“반면 조금이라도 제 의견을…. 첨가하고 그럴싸하게 적은 학생은 D등급 이상.”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제 시험지를 바라본다.

A등급.

치즈이 교수가 말한 가장 높은 등급이 제 시험지에 매겨져 있었다.

“이런 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학생은…. A등급.”

“….”

“참고로 A등급을 받은 학생은 단 한 명뿐입니다. 그 학생만이 유일하게 제 의도를…. 파악했죠. 혹시 더 질문 있습니까?”

치즈가 교수의 질문에 학생들이 침묵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치즈이 교수가 몸을 돌려 분필을 꺼낸다.

“그럼….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서걱거리는 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펜을 굴리던 아더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A등급이… 나 혼자라고?’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이런 성적을 거둘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기쁨이라는 감정이 목 끝에서부터 차올랐다.

아레스 아레키스를 잡을 때랑은 미묘하게 다른 그 감정선을 아더가 느긋이 음미할 때였다.

옆에 있던 예니카의 시험지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

그 시험지에 매겨진 등급을 확인한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그 후 노트의 한 부분을 찢어, 쪽지로 만들어서 예니카에게 툭 건넸다.

[예니카 바보예요? F등급이라니?]

쪽지를 발견한 예니카가 눈을 부릅뜬다.

그리고 잠시 아더를 노려보다,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공자님 성적은 뭔데요?]

[A등급이요^^]

[그래서 뭐 자랑이라도 하시는 거예요?]

[자랑이요? 아뇨? 예니카 놀리는 건데요?]

예니카가 몸을 움찔 떤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다시 쪽지를 건넸지만, 아더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예니카의 흰 피부에 붉은 홍점이 달아오를 때였다.

갑작스레 수업을 중단한 치즈이 교수가 고개를 돌린다.

“아.”

“…?”

“도착…. 했습니까?”

이 말과 함께 치즈이 교수의 옆에 선 조수가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귀 기울여 그 이야기를 듣던 치즈이 교수가 한숨을 내어쉬었다.

“…참. 그 학생도 여전하네요. 낙제생인데…. 첫날부터 또 지각하다니.”

“….”

“들어오라…. 하세요.”

허리를 숙인 조수가 물러난다.

그사이 시선을 돌린 치즈이 교수가 선언했다.

“여러분들의 학우가…. 한 명. 늘었습니다….”

“…?”

“여러분들보다 무려 5학년…. 선배지만, 그렇다 해서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같은 수업 듣는 동기니깐.”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눈을 치켜떠졌다.

5학년 선배.

그렇다는 건 5살이나 많은 학생이 지금 들어온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케인 대학의 경우 제대로 진급을 한다는 가정하에 4학년에서 끝마치게 된다.

즉 지금 들어오는 학생은 무려 5번의 낙제를 받았다는 소리.

그 탓에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릴 때,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어라?”

그 탄성과 함께 교실 문을 열고 한 학생이 들어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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