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예니카가 눈길을 좁힌다.
‘…갑자기 피를 달라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요구의 조건치고 꽤나 특이했다.
물론 특별한 능력이 담긴 피, 소위 혈통이라 불리는 피는 그 능력에 따라 부르는 게 값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피를 원하는 자들은 대개 마법사였다.
그리고 눈앞의 아더 바이에른은 아무리 보아도 마법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탓에 예니카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피 몇 방울쯤 주고, 이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이 길어지자 아더가 먼저 입을 연다.
“대답은요, 예니카?”
“…….”
“피를 넘겨줄 거예요? 아니면 이대로 끝을 볼 거예요?”
정신을 차린 예니카가 고개를 든다.
“피를 안 넘겨주면 안 보내주실 건가요?”
“일단은요. 전 손해를 보는 걸 싫어하거든요.”
“제 피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단 소린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핏덩이로 자유자재로 변하는 혈통. 그런 혈통이면 어디에 쓰이건 좋게 쓰이겠죠.”
예니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리숙한 말투로 툭툭 실수인 척하면서···. 계산할 건 다 계산하고 있어. 설마 의도적으로 저런 말투를 쓰는 건가?’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그래 보였다.
그 탓에 실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무 섣불리 나섰어. 내 정체를 모를 걸 계산하고 행동한 건데···.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짐작을 당할 줄이야.’
아더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던 건 제 피에 각인된 또 다른 힘 때문이었다.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피의 향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굳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예니카는 아더를 처음 본 순간 자신들의 계획을 훼방을 놓은 던이라는 용병과 동일인물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귀족가 도련님. 그것도 바이에른의 후계자가 뒷세계 용병 생활을 할 줄은 꿈에도 몰라서 곧바로 행동하긴 했는데… 이렇게 되면 손해만 봐버리네.’
하지만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고민하던 예니카는 결론을 내리고 대답했다.
“좋아요, 공자님 피를 드리겠습니다.”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말요?”
“네. 제 피 몇 방울을 주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니깐요.”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기대감을 숨기지 않은 그 눈빛에 예니카가 씩 웃어 보인다.
“지금은 일단 한 방울.”
“…?”
“일단 한 방울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방울. 그렇게 제가 이 학교에 남아 있을 때까지, 제 피를 한 방울씩 드리겠습니다.”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어···.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닌데요?”
“네. 하지만 제 입장도 고려해주세요. 지금 당장 제 피를 원하는 양만큼 드리면···. 공자의 입을 다물게 할 패가 없어지잖아요?”
“전 예니카의 정체를 말할 생각이 없는데요?”
“저와 공자는 오늘 처음 만났죠. 아무리 서로의 정체를 아는 사이라 하지만 믿음이 부족할 수밖에 없죠.”
“…제안을 거부하면요?”
예니카가 방긋 웃는다.
“공자의 상상을 맡기겠습니다. 한 가지 경고하자면···. 제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아더가 입을 다문다.
그리고 예니카를 잠시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흠···. 여기까지인 것 같네.’
지금 예니카의 제안은 이성적으로 보면 매우 타당했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똑같은 위치에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헤이즐이라는 거대 기업의 후계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결국은 일개 기업이다.
똑같이 정체가 밝혀졌을 때, 바이에른 공작가의 후계자인 자신의 말을 믿어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거기다 저쪽은 뒷세계의 조직이기도 하고···. 여러 리스크를 생각했을 때, 저 정도 제안은 할 수가 있지.’
그 탓에 아더는 지금 예니카의 제안이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예니카도 더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고, 이곳이 아케인 대학인 걸 고려해도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의 마법은 종잡을 수가 없으니깐 말이지. 하지만···. 아쉽네. 잘만 하면 쓸만한 혈통 하나를 더 얻을 뻔했는데.’
판단과 함께 아더가 입맛을 쩝 다셨다.
개강 첫날부터 사고를 칠 수는 없어 결국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후우···. 네 뭐. 알겠습니다. 이제 슬슬 교실로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맞아요. 안 그래도 저희를 보는 시선이 이상한데,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되잖아요?”
“괜한 오해요?”
“공자와 제가 사귄다는 오해 말이에요.”
“전 예니카랑 사귈 생각이 없는데요.”
“그건 피차일반입니다.”
대답과 함께 예니카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 순간 피 한 방울이 손끝에서 빠져나와 아더를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첫 한 방울···. 네.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이 말과 함께 예니카가 아더를 지나쳐 현장을 빠져나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시선을 돌려 허공에 둥둥 떠다 디는 피를 바라보았다.
“혈통 능력을 흡수하려면···. 한 움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은 필요한데.”
툴툴 불평을 쏟아낸 아더가 그 피를 낼름 받아먹었다.
그리고 예니카를 따라 교실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눈을 끔뻑인 아더가 진심으로 감탄해 중얼거렸다.
“피가···. 왜 이리 맛있지?”
* * *
첫날의 일정은 첫 강의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놀스 교수를 뒤이어 3명의 교수가 교실로 들어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앞으로의 수업 방향에 대한 개요 정도만 설명했다.
“어떤 강의를 듣건 여러분들의 판단입니다. 대신 2학년으로 승급하기 위한 학점 20점을 채워야 한다는 것만 명심해주세요. 20점을 채우지 못한 학생은 예외 없이 유급입니다.”
그렇게 아케인 대학에서의 첫날을 마친 아더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제 방으로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고민했다.
‘흠···. 뒷세계의 사람들하고 엮일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그 정체까지 탄로 날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아더였다.
‘뭐···. 정체가 들통났다고 해서 당장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위험 분자를 그대로 둘 수도 없고.’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예니카를 죽이는 것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뒷세계의 용병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 말이다.
허나 그 예니카 헤이즐을 죽이는 것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운철검을 쥐고 모든 능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죽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안 드네.’
온몸을 피로 변환시킬 수 있는 혈통 능력은 둘째치고, 그녀의 마법이 문제였다.
영창도 없이 주변의 소리를 차단할 정도면, 며칠 전 마주쳤던 아레스 아레키스보다 위라는 소리.
지난번의 삶에서 마주쳤던 마법사들의 수준까지 고려하면 그녀의 실력은 최소한 30년의 마법사였다.
‘50년의 마법사부터···. 황군 마법사라 생각하면 어마어마하네. 그 외견도 나이를 속였다고 봐야겠어.’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입맛을 다셨다.
아케인으로 와서 제법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테이큰에 이어 또 다른 진짜를 만나자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쥴리의 혈통까지 흡수한 지금의 내 실력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4서클 칼잡이. 낮은 건 경지는 아니지만, 역시 애매하구나.’
물론 미래의 자신이 예니카 헤이즐을 이기지 못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클을 늘리고 조금 더 좋은 혈통을 수집한다면···. 죽일 수 있을 테지만 그때까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소리네.’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니카 헤이즐도 당장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이쪽이 급하게 나설 이유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첫날부터 재밌네···. 검은 십자가의 사람과 마주치고, 또 그 피가 맛있기도 하고.”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을 때였다.
첫날과 다를 바 없는 요란스러운 안나의 인사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나타난 엘린이 방긋 미소 짓는다.
“아더!”
“아 엘린.”
“이제 오는 거야? 빨리 왔네.”
말을 놓기로 한 엘린이 고개를 기울며 물었다.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첫날부터 지각하면 그래서.”
“어 진짜? 나도 그런데.”
“오 진짜요? 엘린 성격엔 안 그럴 것 같은데?”
엘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빨리만 왔으면 다행이지… 너 만나려고 새벽바람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허나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조급함이란 것은 드러낸 쪽이 무조건 손해였으니깐.
그 사이 아더는 제 옆에 선 엘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혹시 홀란 대부님이 날 생각해서 친구로 있어 주라고 했나?’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이 소녀가 굳이 자신과 같이 있으려는 이유는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흠… 나쁘지는 않네. 안 그래도 친구 한 명쯤은 있으면 편할 테니깐.’
그 친구가 믿을 만한 사람이면 더더욱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첫 강의가 있을, A-1클래스에 문을 열었다.
이미 먼저와 기다리는 수십 명의 학생의 시선을 돌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또 같이 오네?”
“진짜로 무슨 사이인가.”
대놓고 수군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못 들을 정도는 아닌 속삭임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허나 악의적인 수군거림은 없었기에 엘린은 적당히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자신이 아더에게 접근한 시점에서부터 이런 수군거림이 들릴 건 각오하고 있었다.
레버쿠젠과 바이에른.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자제들이 한 쌍으로 붙어 다니니 말이다.
‘그래서 노린 바이기도 하지. 일단 소문을 만들어라. 그러면 자연스레 그 소문이 진짜가 될 것이다.’
전에 본 연애 잡지의 글귀를 떠오른 엘린이 입꼬리를 씩 올릴 때였다.
옆에 앉아있던 아더가 갑작스레 쪽지 한 장을 건네준다.
[미안해요 엘린. 나 때문에 이런 시선 받아서.]
엘린이 눈을 치켜뜬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아더를 발견한다.
그 사이 아더가 다시 한번 쪽지를 건네준다.
[제가 많이 모자라서 저런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벙어리라는 편견이 그렇게 쉽게 가시지 않아서···.]
그 쪽지의 내용까지 읽은 엘린은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를 떨 때였다.
교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들어온다.
이번 검술 강의를 맡은 놀스 하이젠 교수가 들어온 것이다.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엘린이 입을 다문다.
그사이 소란스럽게 떠들던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자리에 앉았다.
단상 위에 선 놀스 하이젠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친다.
“학생 제군들 환영한다. 전에도 소개했지만, 난 여러분들의 검술 수업을 맡은 놀스 하이엔 교수라고 한다!”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흡족한 미소를 띤 놀스가 설명을 이어나간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어제 이미 충분히 하기도 했고, 학생들도 그런 이야기는 원하지 않을 테니깐.”
“…….”
“검술 수업이라 하지만 거창한 건 없다! 애초에 검술이라는 게 정형화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니.”
“…….”
“그래서 첫 수업은 학생들의 수준을 알아볼 생각이다. 그 뒤에 개개인의 수준에 맞추어서 진도를 뺄 생각이야. 물론 기본적인 단련을 할 테지만, 검술 수련은 맞춤형이라 보는 게 맞을 거다.”
장황한 설명을 학생들이 빠짐없이 필기한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약간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술 훈련을 받으러 왔는데, 설명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놀스 교수가 씩 입꼬리를 올린다.
‘귀여운 놈들···. 하긴 고르고 고른 원석이라 해도 겨우 17살이지.’
그래서 의도한 반응이기도 했다.
생각과 함께 놀스 교수가 선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겠다.”
“…?”
“이 테스트는 훗날 있을 기말고사와 동일하며, 통과하지 못하는 학생은 학점을 받지 못한다.”
학생들이 눈을 치켜뜬다.
그건 아더도 다르지 않았다.
‘오···. 지루한 분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화끈하시네, 놀스 교수님?’
허나 뒤이어 들려온 선언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학생들은 놀스 교수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즉 지금부터 진행될 테스트를 통과하는 학생은···. 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단 소리다.”
놀스가 교수가 입꼬리를 올린다.
“A+만점. 그 점수와 함께 곧바로 교실을 나서도 좋다. 자 그럼 바로 테스트를 진행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