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놀스 교수가 사명감에 찬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이곳 아케인 대학이 얼마나 뛰어난지, 또 이곳을 얼마나 졸업하기 어려운지.
17살에 불과한 학생들은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지만 아더는 달랐다.
정확히는 온 신경이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러브레터?’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정갈한 필체로 적힌 쪽지의 내용.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달라 이 말은, 아무리 다른 식으로 해석해 보아도 러브레터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무런 안면도 없는 여학생이, 갑자기 따로 시간을 내어 달란 말을 왜 하겠는가?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흠.’
고민하던 아더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쪽지를 건네준 예니카 헤이즐의 차분한 표정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예쁜 애가 왜 날?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 종교권유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첫 수업이 막을 내린다.
“아케인은 기회의 도시다. 그리고 아케인 대학은 가장 많은 기회를 쥘 수 있는 곳이지. 학생들이 이곳에서 뭘 얻어갈지는, 학생들 손에 달린 것을 명심해라!”
다소 낯간지러운 대사와 함께 놀스 교수가 퇴장한다.
그와 동시에 수업시간 내내 숨죽이던 학생들이 한숨을 토해낸다.
“와···. 분위기 장난 아닌데?”
“괜히 자퇴율 1위 학교 아니구나···.”
“검술 강의 들으려 했는데 이거 해도 될지 모르겠네.”
이런저런 품평과 함께 주어진 자유 시간을 각자의 방식대로 만끽할 때였다.
아더의 옆에 있던 예니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아더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공자님 어디 가세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엘린.”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교실을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한테 영 관심이 없네. 1년만에 만났는데.”
먼저 말을 걸어서 이것저것 대화를 시도해볼까?
고민하던 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너무 안달 나 보이잖아. 흠… 일단 조금 더 기다려보자.’
이 말과 함께 엘린이 다음 수업을 준비할 때였다.
예니카 헤이즐을 따라 한적한 장소로 걸어 나온 아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 보니깐, 진짜 고백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나 아직 연애할 생각이 없는데.’
생각과 함께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할 때였다.
고개를 기웃거리던 예니카가 몸을 돌린다.
동시에 갑작스럽게 퍼져나간 마력이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그 이변을 느낀, 아더가 눈꼬리를 치켜올린다.
“어라? 이게 뭘까요?”
물음에 예니카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얼굴에 걸맞은 화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지만, 아더는 속지 않았다.
지금 사방을 감싼 이 묘한 마력은, 며칠 전 죽인 아레스 아레키스.
마법천재라 불리던 남자의 마력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가슴 속의 고리를 은밀히 진동시키는 순간, 예니카가 입을 연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자리를 만들었네요, 공자.”
“자리요?”
“네···. 일단 이것부터 말씀드리고 싶네요.”
예니카가 방긋 웃는다.
“뒷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윌렛의 루키 던. 그가 공자님일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네요.”
* * *
예니카의 말에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윌렛의 루키 던.
이렇게나 자세히 언급한 걸 보니, 숨겨둔 제 또 다른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흔적을 남긴 기억은 없는데.’
용병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흔적을 남긴 기억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흔적을 지운 건 물론이고 목격자도 다 죽여버렸으니 말이다.
‘ 나와 부딪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지. 네크로맨서와 테이큰 씨. 검은 십자가라는 단체였던가?’
그럼 눈앞의 예니카는 검은 십자가 소속일까?
던져진 의문에 아더는 반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검은 십자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제 감은 그쪽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지금 바깥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예니카의 마법 때문이었다.
이런 실력을 갖춘 마법사는 뒷세계에서도 흔치 않았고, 그들은 대개 조직에 속해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예니카 씨는 검은 십자가 소속인가요?”
예니카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며든다.
그 짧은 변화를 놓치지 않은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떠보는 거라 해도 놀랍네요. 어떻게 아셨죠?”
“완벽히 변장했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들켰다면 높은 확률로 저와 마주친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저와 마주치고 살아난 사람들은 극소수거든요.”
예니카가 눈을 끔뻑였다.
날 선 분위기 탓인지 몰라도 그 작은 변화 하나에 그녀의 감정이 훤하게 드러났다.
“검은 십자가만···. 공자님과 마주쳐서 살아갔다?”
“네. 전투 갱단분들도 있지만, 그분들은 제 변장을 간파할 실력은 안 되고···. 그렇다면 검은 십자가뿐이죠.”
설명에 예니카가 팔짱을 낀다.
“날카롭네요. 그리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정체를 짐작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저도 당황스러워요. 이렇게 정체를 들킬 줄은 몰랐거든요.”
이 말과 함께 아더의 피부가 파충류의 껍질로 뒤바뀐다.
그 이변에 예니카가 눈빛을 빛낸다.
‘저게···. 테이큰이 말한 혈통 능력인가?’
보고로 받은 것보다 조금 더 독특해 보였다.
일단 저런 변화와 관련된 혈통 능력 자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바이에른 공작가의 소년이 저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거지? 바이에른의 핏줄은 저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생각과 함께 예니카의 시선이 가늘어질 때였다.
갑작스러운 정전기가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아더의 몸이 거친 벼락에 휘감긴다.
단순한 정전기라 치부할 수 없는 그 선명한 전류에 예니카가 놀라 입을 벌렸다.
‘뭐? 마법이라고?’
말을 흐린 그녀가 당황할 때였다.
아더가 사라진다.
눈을 치켜뜬 예니카가 본능에 따라 팔을 들어 올린다.
콰직.
살이 헤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갈고리처럼 돋아난 아더의 손톱이 파고든 것이다.
제때 막지 못했다면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격.
그 점을 눈앞의 아더 바이에른도 지적했다.
“반응 좋네요, 예니카 씨. 그 나이 때 소녀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예니카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공자랑 싸울 생각은 없는데요.”
“저도 싸울 생각은 없었어요. 전 예니카 양이 고백할 줄 알았거든요.”
“…?”
“쪽지를 건네주길래, 한눈에 반한 줄 알았지 뭐예요? 그래서 진짜 고민하면서 여기 왔는데···.”
말을 흐린 아더가 트롤의 혈통까지 일으켜 예니카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리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무슨 힘이···.’
이 말과 함께 예니카의 몸이 벽에 파묻힌다.
힘으로 예니카를 몰아붙인 아더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한다.
“차라리 예니카 양이 고백하는 게 나을 뻔했네요. 이런 상황보다는 낫잖아요?”
질문에 예니카가 황당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독특하다 들었는데,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으시네요, 공자.”
“그런 소리를 종종 듣곤 하죠.”
“그래서 계속 싸우실 건가요?”
“일단은요? 전 아직 정체가 발각되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 그러려면 예니카 양을 죽이는 게 가장 안전하고.’
예니카가 입을 다문다.
무감정한 눈빛을 보니 빈말은 아닌 듯했다.
‘어떻게든 수습할 자신이 있다, 이건가.’
생각과 함께 예니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면 하늘 섬의 흰 수염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겠네.
‘진짜 독특하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떻게든 포섭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 사이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웃어도 안 봐줄 건데요 예니카 양.”
“…괜찮아요.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순순히 당할 수는 없거든요, 공자.”
이 말과 함께 예니카의 신체가 허물어진다.
“…!”
아더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그 사이 핏덩이로 변해 아더의 구속에서 벗어난 예니카가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린다.
“음···. 혈통 능력인가요?”
“네 맞아요. 혈통 능력이죠.”
“피로 변하는 능력인가요?”
“가지고 있는 권능 중 하나죠.”
이 말과 함께 예니카가 손을 들어 올린다.
그 순간 아더의 손톱에 묻어 있던 피들과 살점들이 다시 예니카에게로 돌아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는 사이, 예니카가 설명한다.
“말씀드렸지만 공자. 전 공자와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
“제가 이 학교에 위장해 들어온 이유는 공자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거든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한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네. 예전에는 그러려고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서요. 그러니깐 제안하고 싶네요.”
아더가 어딘가 언짢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뭘 말이에요?”
“동맹을 맺는 게 어떨까요?”
“…동맹이요?”
“공자도 정체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고, 저도 굳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죠. 다르게 말하면 서로가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공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죠.”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불리한 조건인데요? 그리고 당신을 믿을 수도 없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공자. 위험을 감수하는 건 제 쪽이에요.”
예니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온다.
그 무방비한 모습에 아더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공자는 정체를 들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겠죠. 어느 쪽이 리스크를 쥐었는지는…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겠죠?”
살짝, 입꼬리를 올린 예니카가 웃는다.
얼굴이 워낙 예뻐, 그것만으로 주변 분위기가 화사해진다.
하지만 아더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진짜로 위험한 여자네. 자기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여자라니···.’
그것뿐만이 아닌 그녀가 가진 혈통, 아직 발현조차 안 하는 마법들.
그것들을 고려하면 테이큰과 네크로맨서가 속한 검은 십자가의 일원다웠다.
그 탓에 이성적으로 보면, 예니카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상태로 싸워봐야, 운철검도 없는 자신이 예니카를 이길 확률은 낮았으니깐.
허나 아더는 그 이성적인 선택을 하기가 싫었다.
이유는 조금 전 보여주었던 예니카의 혈통 능력 때문이었다.
‘예니카의 피···. 대체 뭘까? 아무리 혈통 능력이라 해도 온몸을 핏덩이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은데?’
혈통 능력은 특별하지만, 마법이 아니다.
그래서 특별한 혈통이라 해봐야, 결국 상식선에서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예니카의 혈통은 그 상식을 넘은 기적을 보여주었다.
전생의 경험이 있는 아더조차, 저런 혈통은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얻기 힘든 혈통이란 소리지.’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좋아요, 예니카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예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에요 공자. 굳이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눌 필요는 없죠.”
“네 맞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네. 아주 쉬운 조건이에요.”
아더가 눈빛을 빛낸다.
“예니카의 피. 그 피를 몇 방울만 주시면 제안을 수락할게요. 어때요 예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