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캡슐 안에 갇힌 소녀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청안.
보기 드문 외모는 아니었지만, 아더는 저 아이가 쥴리 프로스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정상적인 기억력이, 기억 속 쥴리 프로스키의 외모를 저 아이와 정확히 겹쳐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중얼거렸다.
‘맞네. 아레스 아레키스가 어려진 것처럼 쥴리 프로스키도 어려진 게 당연하지.’
그런데도 쥴리 프로스키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건 괴리감 때문이었다.
미래 쥴리 프로스키는 미치광이 살인자였다.
허나 지금 눈앞의 쥴리에게는 미친놈 특유의 광기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다섯 살을 조금 넘긴 아이일 뿐이었다.
그 탓에 머리를 긁적이던 아더가 질문했다.
“쥴리 프로스키 맞나요?”
“네 맞아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만난 적이 있거든요.”
“저하고요?”
“네. 아주··· 먼 미래? 하여튼 그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쥴리가 눈을 끔뻑였다.
“먼 미래라면···. 아저씨는 미래에서 오신 거예요?”
“글쎄요. 그건 비밀이라서 말씀 못 드릴 것 같네요.”
“이미 다 말씀하셨는데요? 미래에서 오셨다고?”
“농담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미래에서 와요?”
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진짜 특이하네요. 얼굴도 특이하시고.”
“제가 좀 독특하긴 하죠.”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연구소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그분들은 바깥에서 제 동료와 대화 중이랍니다.”
“대화요? 어떤 대화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대답과 함께 아더가 쥴리를 가두어 놓은 캡슐을 매만진다.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부술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 안에 갇힌 쥴리가 다칠까 쉽사리 실행하지 못했다.
그때 쥴리가 버튼 하나를 가리킨다.
“그거 누르면 나올 수 있어요.”
“오. 고마워요 쥴리.”
아더가 쥴리가 가리킨 버튼을 꾹 누른다.
그 순간 캡슐이 개폐되고, 쥴리가 비틀거리며 넘어진다.
아더가 그런 쥴리를 타이밍 좋게 안아 들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뭘요. 아 그리고 제 이름은 던이에요.”
“던이요? 이름이 특이하시네요.”
“여러 사정이 있는 이름이죠.”
“흐음···. 그런데 던 아저씨. 왜 저한테 높임말 쓰세요?”
“이상하나요?”
“그건 아닌데 저한테 높임말 쓰는 어른은 처음 봐서요.”
쥴리의 말에 아더가 고민했다.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말을 놓기가 쉽지 않네. 미래의 쥴리 프로스키를 봐서 그런가?’
그때 쥴리가 질문했다.
“아저씨는 절 구하러 오신 거예요?”
“…구하러요?”
“네.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건 처음이거든요. 아니면 연구소 직원이에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쥴리 프로스키를 구하기 위해 연구소에 왔나?’
스스로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레스 아레키스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과정에서 겸사겸사 쥴리의 피를 얻으면 더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여러모로 쥴리를 구하러 온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민하던 아더는 결국 솔직히 대답했다.
“전 쥴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에요.”
“그럼요?”
“쥴리의 피를 얻기 위해 왔어요. 그리고 아레스 그 사람도 덤으로 죽이고.”
쥴리가 숨을 참는다.
동그랗게 뜬 눈이 눈앞의 소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해 주었다.
“…아레스 박사님을 죽인다고요?”
“네.”
“왜요?”
“음···. 개인적인 원한, 목표도 있고···. 말하기 복잡하네요. 여튼 그렇습니다.”
쥴리가 침묵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상의도 같이 들어 올렸다.
그 난데없는 행동에 아더가 깜짝 놀라는 순간, 그녀의 몸에 난 흉측한 흉터들이 아더의 시선을 잡아끈다.
“어… 이건?”
“실험의 흔적이에요.”
“실험의 흔적이요?”
“네. 혹시… 설명해도 되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쥴리가 들어 올렸던 상의를 다시 내려놓으며 입을 연다.
“1년 전에 납치당해서 여기 온 뒤로 매일같이 실험당했어요.”
“…….”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같이 납치해 온 친구들을 제 눈앞에서 죽였어요. 진짜로 하기 싫었지만···. 친구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박사님의 말을 따랐어요. 하지만 박사님은 거짓말만 했어요.”
쥴리의 표정에 그늘이 진다.
“며칠 전에···. 저 때문에 친구들이 죽었어요. 제 피가 담긴 주사기를 꽂더니 그대로 몸이 불어 터져서 말이에요.”
“…….”
“제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요. 하지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요?”
쥴리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레스 그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제 손으로 죽이고 싶어요.”
“…….”
“혹시 저한테 기회를 줄 수 있나요 던 아저씨?”
아더가 탄성을 내지른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설마 그 쥴리 프로스키가 아레스를 죽여 달라 부탁을 하다니?
아더는 고민하다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도 죽여야 하는데···. 흠.’
아더는 오랜만에 깊은 갈등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마주친 쥴리의 눈빛에서 아더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세비스찬에게 학대당하던 자신.
아레스에게 실험당하는 쥴리.
그 둘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진 것이다.
그 순간 아더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미래 쥴리가 미쳐서 사람을 죽였던 건···. 이 실험 때문이었던 거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에 아더가 입맛을 다셨다.
미래의 자신은 이 내막을 모른 채 쥴리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빚은 아니지만···. 찝찝하네. 아레스 그 사람에게 이용당한 불쌍한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인 거잖아?’
그리고 그 쥴리가 지금 아레스를 죽일 기회를 달라 부탁해 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단번에 거절했을 테지만, 쥴리의 부탁이었기에 쉽사리 거부하지 못했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든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쥴리가 보였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내던 아더는 결심을 굳히고서 대답했다.
“좋아요 쥴리. 부탁을 들어드릴게요.”
“…진짜요?”
“그럼요. 저도 복수를 하고 있어서 알거든요. 원수는··· 반드시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걸.”
쥴리가 눈을 치켜떴다.
동시에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대신 쥴리 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피요?”
“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쥴리의 피도 있거든요. 그 피가 있으면 아무래도 아레스 저 남자를 죽이기 더 쉬워지니까.”
쥴리가 눈을 끔뻑였다.
그녀는 아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피가 있으면 왜 아레스 박사를 죽이기 쉬워지는데요?”
“음···. 쉽게 이야기해서 그거에요.”
아더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기서 행해지는 실험. 그 실험의 완성본이···. 아마 저라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 * *
지니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리며 총을 난사한다.
“하하하하-!”
온갖 보조 장치로 떡칠한 그녀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무차별적인 난사로 보이지만, 정확도는 엄청났다.
휘익-!
바람의 정령 실프.
자연의 선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그 총알의 궤도를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베리어를 두른 마법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저 귀쟁이년 어디서 온 거야!”
“갑자기 왜 총을 난사해!”
“일단 잡아 쳐넣어! 심문해 보면 뭐든 나오겠지!”
마법사들이 다시 주문을 외운다.
그 순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기적이 불을 뿜는다.
쾅-!
날아온 불구덩이를 거의 구르다시피 해 피한 지니가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였다.
그림자로부터 나타난 손이 지니의 몸을 옭아맨다.
[안 되죠!]
[안 돼!]
아더가 넘겨두고 간 운디네와 노움이 그 손을 떨쳐 낸다.
다시 방아쇠를 잡은 지니가 소리쳤다.
“정령들은 이렇게 착한데! 그 미친놈은 왜 그런 걸까!”
이 말과 함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피할 공간을 주지 않은 채 날아오는 마탄魔彈에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베리어를 두른다.
쾅!
그렇게 전투가 예상과는 다르게 지지부진하게 흘러갈 때였다.
뒤에서 팔짱을 낀 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레스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난데없는 습격자가 나타난 것까지는 이해가 가능했다.
문제는 왜 이렇게 대놓고 습격을 했냐는 것이다.
총을 든 걸 보니, 저격수인 것 같은데 저런 저격수들은 이런 전면전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격수 놈들은 보통 암습 기습을 선호하니깐.’
그 작은 위화감에서 시작된 고민은 곧 결론을 도출했다.
높은 확률로 저 귀쟁이한테 동료가 있다.
그리고 그 귀쟁이의 동료는 지금쯤 자리를 비운 연구실에 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내 감각을 속이고, 연구실로 들어갔냐는 거지.’
고민하던 아레스는 눈빛을 빛냈다.
뭐가 됐건 이 전투를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
결론을 내린 아레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푼다.
그 순간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이 발동된다.
[어스 퀘이크.]
휘몰아치는 마력에 대지가 흔들린다.
이변을 느낀 마법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고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지니가 입을 벌린다.
“…이게 지진이 아니고 마법이라고?”
탄성과 함께 지니가 서 있던 지면이 무너진다.
재빨리 뛰쳐 오른 덕에 함몰되지는 않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무너진 지면의 파편들이 창처럼 변해 그대로 쏘아진 것이다.
지니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서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실프의 마법 덕에 강화된 총탄이 날아온 파편을 먼지로 만들어 버린다.
‘저놈이 대장이야. 위험해.’
생각과 함께 지니가 곧바로 총구를 돌린다.
그리고 아레스를 향해 겨냥한 순간 아직 남은 파편에서 불씨가 터진다.
그 이변에 눈을 치켜뜬 지니가 몸을 황급히 돌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레디 붐.]
쾅-!
폭음과 함께 지니의 머리칼이 새까맣게 탄다.
벌어진 입에서는 매연이 튀어나왔다.
놀란 정령들이 그런 지니를 다급히 감싼다.
[지니!]
하지만 폭발을 코앞에서 맞은 지니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레스의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다중영창이라니···. 놀랍군’
‘두 개의 마법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교묘히 쓸 수 있다고?’
‘마탑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이라더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어.’
그만큼 조금 전 아레스 아레키스가 부린 조화는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때 단번에 지니를 제압한 아레스가 소리친다.
“왜들 보고만 있지? 잡아 와.”
“네, 넵!”
마법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쓰러진 지니의 팔을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이년도 혈통 능력을 갖고 있나? 귀가 뾰족한 게 꼭 전설 속······.”
말을 흐린 마법사가 눈을 끔뻑인다.
그와 동시에 핏줄기가 솟구치고 한 마법사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
깜짝 놀란 마법사들이 뒤로 물러선다.
그사이 공간 도약을 통해 지니에게 다가온 아더가 놀라 중얼거렸다.
“이런···. 지니 씨 살아 계신가요?”
“…….”
“진짜 죽은 건가? 그럼 돈은···….”
기절해 있던 지니가 덥썩 아더의 멱살을 잡는다.
“돈…….”
단 한 마디였지만, 의미는 노골적이었다.
아더가 방긋 웃으며, 운디네한테 명령한다.
“괜찮아 보이네. 운디네. 지니 씨 좀 보살펴 줘.”
[네, 네! 아더!]
대답에 아더가 몸을 돌린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네 명의 마법사를 향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마법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네. 초면인데 인사는 드려야 하잖아요.”
마법사들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방금 사람을 죽여 놓고 그따위 인사를 한다고? 미친놈인가?”
“그래요?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운철검을 뽑아 든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아레스가 소리쳐 묻는다.
“꼴을 보니, 연구소에 있었던 모양인데 뭘 훔친 거지?”
“훔치다뇨?”
“연구 자료냐? 아니면 돈이 목적이냐? 그것도 아니면 누구한테 의뢰받은 거냐?’
질문에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탄성을 터트렸다.
“아 하나 훔치기는 했네요.”
이 말과 함께 벼락이 내려쳤다.
쾅!
마른하늘에서 내려친 그 벼락에 마법사들이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 왜 갑자기 벼락이?”
그사이 옆에 있던 아레스가 흠칫 놀라며 중얼거린다.
“뭐? 설마···.”
그 순간 아더가 검을 치켜든다.
동시에 다시 한번 벼락이 내리친 순간 기적이 펼쳐졌다.
파지지직-!!
괴인의 검에 벼락이 휘감긴다.
그 모습은 흡사, 마침내 탄생한 연구의 성공작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