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34화 (34/265)

제34화

소녀가 대답한다.

“부탁하러 오신 분치고 과격한 대답이시군요.”

“나이를 먹으면 머리를 수그리는 게 쉽지 않아. 그냥 협박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죄송하지만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르신.”

“아네. 무리를 이끄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인지. 그래서 타협책을 가지고 왔네.”

흰 수염이 카드 하나를 내민다.

소녀가 눈길을 좁히며 질문했다.

“이건?”

“5000골드. 달러로 환산하면 2만 달러 정도 되네.”

“…돈으로 이 일을 넘기실 생각입니까?”

“싫으면 다른 걸 말하게나. 나도 굳이 싸울 생각은 없거든. 자네가 내 물건을 건들지 않는다는 보장만 해주면, 곱게 물러나겠네.”

흰 수염의 설명에 소녀의 눈길에 흥미가 깃든다.

‘도대체 그 용병이 뭐길래, 흰 수염이 직접 나선 거지?’

누군가에게는 전설로, 누군가에게는 악마로.

허나 그 누구도 그의 이름도 정체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5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흰 수염이란 별칭 뒤에 숨어 살아온 눈앞의 노인은 일개 왕국 하나쯤은 거뜬히 멸망시킬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하늘섬이란 단체가 그런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깐···.’

그래서 의아했다.

이 정도 거물이 왜 용병 하나 때문에 직접 나서는 걸까?

테이큰과 네크로맨서의 보고를 들어 보니, 제법 특이하다 싶긴 했지만 눈앞의 노인을 움직일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고민하던 소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체면을 차려드려야지···.’

아직은 흰 수염과 부딪칠 때가 아니다.

하물며 하늘섬과는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한 발자국 물러날 때였다.

생각을 정리한 소녀가 흰 수염이 내민 카드를 받아든다.

“어르신께서 이 정도로 성의를 보였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죠. 이번 일의 보복은 하지 않겠습니다.”

흰 수염이 제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고맙군. 언젠가 이 일에 대한 빚은 내 갚아주지.”

“별말씀을.”

허리를 숙인 소녀가 손짓한다.

그리고 미라가 되어버린 타르탄이 떠올랐다.

그렇게 소리 없이 소녀가 방 안을 나섰고, 홀로 남게 된 흰 수염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잉···. 저 새파란 것한테 이런 부탁을 하게 만들다니.”

툴툴.

불평을 쏟아낸 흰 수염이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들 사이에 갇힌 보름달이 요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텅 빈 안구로 바라보던 흰 수염이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러니깐 부디 잘 자라게, 바이에른의 천사여. 그래야 내가 공을 들인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 * *

윌렛의 사무소를 나온 아더는 한동안 집 안에 틀어박혔다.

이유는 이번 보수로 받은 영단의 섭취 때문.

중급 영단 하나라면 이 정도로 공을 들일 필요 없겠지만 무려 3개다.

이 안에 깃든 마나의 양은 현재의 아더가 이룬 고리의 마나 양보다 훨씬 많았고, 그 탓에 심력을 쏟아부어야만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수련과 명상을 반복할 때였다.

아케인 종합대학에 입학하기 하루 전날.

아더는 영단의 모든 마나를 마침내 고리로 엮어낼 수 있었다.

우웅-!

심장 속에서 울려 퍼지는 나직한 진동.

이전에는 홀로 울려 퍼졌다면, 이번에는 고리 두 개가 나란히 공명했다.

‘2서클. 드디어 고리가 공명을 하는구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약을 섭취함으로써 마침내 2서클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매우 컸다.

1서클은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고리를 이룰 수 있다면, 2서클부터는 재능의 영역이다.

타고난 체질.

그리고 노력.

이 두 가지가 모두 합쳐져야 다음 고리를 엮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보통 1서클을 이루고 난 뒤, 2서클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2년 정도니깐. 그런데 난 얼마나 단축한 거지?’

어림잡아도 그 절반.

어쩌면 그 절반에서 절반을 떼어낸 시간 만에 이뤄냈을지도 몰랐다.

‘혈통도 다섯 개 다 모았고···. 고리도 2서클. 확실히 전생보다 빠른 성장이네.’

이 정도 속도라면, 전생의 경지를 회복하는 데까지 걸릴 시간 또 한 훨씬 단축될지 몰랐다.

‘정상으로 돌아오니, 운도 좋아지네. 미친놈이었던 나는 운이 더럽게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는 안나와 함께 아케인 시가지로 나왔다.

아케인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공자님. 요건 어떠세요?”

“흠… 너무 튀지 않나?”

“하지만 아케인 학생들은 다 이런 백팩을 메더라고요! 직접 보니깐 디자인도 좋고, 들기에도 가벼워 보이는데 전 이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아더가 안나가 건네준 가방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까끌거리는 재질이 쉽사리 해질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찢어질 정도만 아니면, 되었기에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이걸로 하자.”

“네! 그럼 필기구도 사고···. 옷도 좀 사놓죠! 교복을 입는다고는 하지만, 안에 받쳐 입을 후드도 골라야 하고 이것저것 살 게 많아요!”

그렇게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끝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인이 입학할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열을 올리던 안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절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시선을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내일 입학이네… 아케인 대학. 어떤 곳일까?’

생각보다 재밌는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시 태양이 떠올랐을 때였다.

아더는 저택을 떠나 아케인 대학교 입구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오···. 이게 대학교구나.”

아케인 대학.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 불리는 이곳은, 아케인 내에서도 가장 큰 조직이었다.

* * *

높이 치솟아 오른 4개의 첨탑.

그 첨탑 주위를 수놓는 수많은 빌딩.

대륙 최고의 학교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규모는 아더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 정도면 황실 다음간다고 봐도 무방하겠는데?’

생각과 함께 아더가 홀로 걸음을 옮긴다.

외출할 때면, 따라오는 안나도 지금은 없었다.

그 이유는 아케인에 출입 가능한 사람은 오로지 학생과 교수.

외부에서 초청된 귀빈들뿐이었기 때문이다.

흘려듣기로 엄격한 교칙에 따라, 이뤄낸 기적이라는 데 사실 귀족.

그것도 귀족가의 자제가 시중을 드는 이들 없이 움직인다는 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아케인 대학에 왕족과 제국 황실 핏줄도 다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래서 다들 아케인 대학을 최고라 부른다고 하던가?’

황실의 인원조차 교칙을 따르는 교육기관.

이 대목만 봐도, 아케인 대학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아더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대학의 정경을 구경할 때였다.

갑작스레 생각난 사실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라? 그런데 나 어디로 가야 하지?”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저기 표지판이 있기는 한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 한 명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아더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온다.

“공자님. 오랜만에 보네요.”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네?”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누구세요?”

붉은 머리칼 소녀의 귓가가 붉게 물든다.

“엘린 레버쿠젠… 기억 안 나세요?”

“엘린 레버쿠젠…? 아.”

탄성을 내지른 아더가 해맑게 미소 짓는다.

“홀란 대부님의 손녀였네요. 저한테 얻어맞고 기절한.”

“…?”

“그런데 엘린도 이곳에 입학한 거예요? 그럼 혹시 길을 좀….”

아더의 말이 중간에 끊긴다.

그와 동시에 아더를 지나친 엘린이 어디론가 걸어 나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왜 날 지나쳐 가버리는 거지?

혹시 화가 났나?

‘그건 아닌데…. 조금 전 분명 웃고 있었는데?'

고민하던 아더는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엘린의 뒤를 쫓아가면, 자신이 원하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생각과 함께 아더가 엘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 *

엘린의 뒤를 따라 본관에 도착한 아더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아케인 대학?”

“생각보다 좀 큰데?”

“그런데 입학식 안 한다면서?”

“왜?”

“몰라. 여기 전통이래. 들어오는 건 어렵지만 나가는 건 쉽다. 그러니 환영해줄 필요 없다. 최고 최고거리니깐, 자기들이 황실인 줄 아나···.”

또래로 보이는 동년배들.

그 동년배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더도 안내인에게 접수한 뒤, 그들 틈에 적당히 섞여들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기다리니 안내인이 다가와 물었다.

“아더 바이에른 님?”

“네.”

“면접이 준비되었으니,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자 안내인이 친절한 어조로 설명한다.

“면접실로 들어가시면 나탈리 교수님께서 계실 겁니다. 나머지는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이 말과 함께 안내인이 물러선다.

아더도 꾸벅 인사를 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머릿결이 인상적인 중년의 여인이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더 바이에른 학생.”

“안녕하세요. 나탈리 교수님.”

“어머.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나요?”

“안내해 주신 분이, 나탈리 교수님이라 알려 주셨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나탈리 교수가 아더에게 손짓한다.

그 손짓에 따라 의자에 걸터앉자 나탈리 교수가 다시 입을 연다.

“면접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건 없어요. 그저 학생이 이 학교에 와서 무엇을 바라는지, 또 어떤 걸 하고 싶은지. 그걸 듣는 게 이 면접의 목적이거든요.”

나탈리의 설명에 아더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놓았다.

귀 기울여 듣던 나탈리 교수가 미소지었다.

“좋은 이야기네요. 설명도 조곤조곤 잘하고, 학구열도 확실히 보이고….”

그녀의 미소에 안도한 아더도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간단한 상식 테스트가 준비되었으니, 그것만 치르고 오늘은 돌아가시면 될 것 같아요.”

이 말과 함께 나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간단한 악수를 나눈 뒤, 나탈리가 가리킨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면점이 최대 난관이라 생각했는데, 쉽게 통과했네. 이제 상식 테스트만 통과하면 되는 건가?’

상식 테스트 정도는 아주 쉽지.

미친놈이었던 시절에도, 상식은 제대로 박혀 있었으니깐.

그렇게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대기 중이던 감독관이 다가와 문제지를 건네줬다.

“혹시 잘못 표기하면말씀해주세요. 다시 가져다줄 테니깐.”

아더가 대답 대신 가져온 펜을 꺼내든다.

감독관이 자연스레 자리에서 멀어졌고, 아더는 첫 문항을 바라보았다.

<인성시험 1문항>

[패색이 짙은 와중에 전쟁 포로를 잡았다. 이 전쟁 포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

1. 죽인다. 2. 살린다. 3. 조약…

눈을 끔뻑이며 문제를 지켜보던 아더가 놀라 중얼거렸다.

“어···. 이거 정답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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