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아더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
3일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전투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몸이 뻐근했다.
특히 다시 재생된 오른쪽 눈의 경우, 아직도 이질감이 들었다.
‘무리하긴 했나 보네. 하긴 목도 잘리고 눈알도 빠졌으니깐.’
그런 것치고 얻은 결과는 엄청났다.
‘테이큰 씨의 혈통···. 이 피는 진짜 대박이네.’
육체 능력을 끌어올려 줄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재생능력까지.
테이큰의 혈통은 전생에 얻은 혈통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좋았다.
‘서적을 찾아보니깐···. 천 년 전에 존재했던 괴물이 트롤이라던데, 그럼 테이큰 씨는 괴물의 후손인 건가?’
고민하던 아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만 하더라도 천사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걸 고려하면 괴물의 후손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좋은 피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다섯 개의 혈통을 모두 모았다는 것.’
처음 용병 일을 시작했을 때의 목표가 혈통 다섯 개를 모으는 것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이번 의뢰로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뤄낸 셈이다.
‘흐음···. 이렇게 되면, 예정보다 빨리 혈통 찾기에 나서야겠는데?’
바이에른의 피가 기억할 수 있는 혈통의 개수는 총 다섯 개.
허나 다섯 개 모두를 채웠다 해서 다른 피를 흡수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좋은 피를 흡수하면, 그 전의 피의 능력을 잃어버리지만, 그 혈통을 다룰 수 있게 되지.’
복수를 위해 힘을 키우는 아더의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혈통을 얻어야 했다.
허나 용병 일로 테이큰과 같은 혈통을 얻을 확률은 솔직히 말해 적었다.
‘등급이 높아져서 더 어려운 의뢰를 받는 거면 모를까… 이번 경우가 특이한 거지. 애초에 혈통 능력 자체가 매우 희소하니깐.’
그 탓에 지금부터 전생에 흡수했던 피.
그중 현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혈통들을 찾으러 다닐 생각이었다.
‘지금도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장이 더 빨라지겠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아더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벼운 세안을 하고서,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던 안나가 눈을 끔뻑인다.
“…공자님?”
“응.”
“오늘따라 유독 잘 생겨 보이시네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생겨 보인다고 내가?”
“네···. 어···. 말로 설명은 못 하겠는데, 오늘은 유독 잘생겨 보이네요.”
안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에 아더는 그녀의 조금 전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잘생겨 보인다고? 오늘 세수를 열심히 해서 그런가···.’
아니면 안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가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바이에른 가에서 함께 해온 요리사들이 내온 음식들이라 음식은 매우 익숙했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운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외출하실 거예요?”
“응. 아케인 거리가 재밌네.”
“그래도 이렇게 매일 보면 질리지 않아요? 저는 이미 질렸는데.”
안나의 투정에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안나도 테이큰 씨를 만나보면 그런 소리 안 할 텐데.”
“…테이큰 씨요? 그분이 누구예요?”
“있어. 남자다운 분.”
의미 모를 대답을 남긴 아더가 망토를 두르고 외출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신단 말이지···. 그런데 테이큰이라는 분, 혹시 새로 사귄 친구분일까?”
생각과 함께 안나가 해맑게 미소지었다.
그러면 집에 데려와도 좋을 텐데.
공자님의 친구분이라면 언제 놀러 오든 대환영이었다.
그렇게 상념을 정리한 안나가 몸을 돌렸다.
휘릭!
기분 좋은 바람이 창문을 통해 불어오고 있었다.
* * *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를 방문하자, 신문을 보던 윌렛이 고개를 들었다.
“왔군.”
“네, 안녕하세요. 어르신.”
윌렛이 몸을 돌린다.
여전히 쌀쌀한 태도였지만, 익숙해진 아더는 별말 없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지하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서자 윌렛이 뒤늦은 인사를 건네왔다.
“잘 지냈나.”
“네.”
“몸은.”
“괜찮습니다.”
대답에 윌렛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그 후 손가락을 두들기며 고민하던 윌렛은 불쑥 아더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약속했던 중급 영단이네.”
“오….”
“원래는 한 개지만, 그런 일을 겪게 하고 한 개로 퉁치는 건 말이 안 되지. 3개로 받아왔네.”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다.
중급 영단 3개면, 아케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텐데.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게 중급 영단이니깐.’
그 탓에 이번 의뢰의 보수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쉽사리 구할 수 없는 영단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더더욱.
허나 윌렛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돈은 필요 없다고 해서, 1년 치 회원권을 받아왔네.”
“회원권이요?”
“어드벤처 제약사가 운영 중인 약국에 가면, 어떤 약이든 공짜로 내어 줄 걸세. 그게 설령 포션일지라도.”
아더의 눈이 다시 한번 치켜떠진다.
일전의 보상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꽤나 대단한 혜택이었다.
그래서 의문을 느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의뢰 보수가 많이 달라졌네요. 윌렛 어르신.”
“달라질 수밖에. 자네가 상대했던 이들은 뒷세계에서 아주 유명한 인간들이야. [검은 십자가]의 광신도. 들어봤나?”
“아뇨, 처음 듣습니다.”
대답에 윌렛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후, 한 손에는 우유를 한 손에는 보드카를 들고서 나타났다.
“오늘도 우유지?”
“네.”
윌렛이 우유를 건네주고, 보드카의 구멍을 열어젖혔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사무실에 퍼져나가자, 윌렛이 다시 설명을 이었다.
“뒷세계에는 여러 인간이 있고, 또 그에 비례해 여러 조직이 있지. 그 조직 중에는 전설이라 불리는 것들도 있고, 정신 나간 이들이 모인 집단도 있어. 그리고 자네가 마주친 [검은 십자가]는 후자에 속하고.”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치고, 다들 멀쩡해 보이셨는데요?”
“멀쩡한 놈들이, 시 공무원 허락도 받지 않고 50명의 인간을 살해하고 언데드로 만들겠나? 아무리 상도덕 없는 바닥이라도 그건 아니지.”
아더가 입을 다문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윌렛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자네는 그 미친놈들 상대로 의뢰를 완수한 거네.”
“….”
“솔직히 말해 난 지니와 자네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깐. 도살자 테이큰. 그놈은 이 바닥에서도 아주 유명한 놈이거든.”
이 말과 함께 윌렛이 보드카를 들이켰다.
도수가 센 술인지 윌렛의 입에서 술 냄새가 펄펄 났다.
그사이 고민하던 아더가 생각을 정리하고서 질문했다.
“타르탄 사장님은 어쩌다 그런 분들하고 엮인 건가요?”
“광신도들 특징이 뭔지 아나?”
“뭔데요?”
“배신자는 살려두지 않는다는 거야.”
아더가 눈을 치켜뜬다.
“그럼···. 타르탄 사장님도 광신도였단 건가요?”
“정확히는 후원자였지.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오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이 일이 발생한 거네.”
“어···. 그럼 왜 미리 알리지 않은 걸까요?”
“검은 십자가가 엮였단 이야기를 들으면, 이 바닥 용병들 중 과연 몇이나 나서겠나? 아무리 돈과 보수가 좋아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그래서 의뢰 내용을 비밀에 부치고 의뢰를 돌린 모양이더군.”
상황을 이해한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게 된 거였군요···. 타르탄 사장님은 무사하신가요?”
“그야 모르지. 회사를 팔고 아케인을 벗어났을지, 아니면 다시 검은 십자가의 공격을 받을지. 어찌 되었건 끝은 좋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윌렛의 대답.
아더는 그 대답에서 윌렛이 이번 일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허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이미 원하는 것은 얻었고, 예상을 뛰어넘는 피도 얻었다.
이 정도면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차고 넘쳤다.
그때 보드카를 콸콸 들이켜던 윌렛이 질문했다.
“…계속 나와 일할 건가?”
“네?”
“계속 나와 일할 거냐고.”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윌렛이 설명했다.
“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 브로커를 갈아치우기 마련이지. 특히 실력 있는 용병일수록.”
“….”
“그리고 자네는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네. 받아 온 의뢰조차 제대로 파악 못 하는 머저리 브로커. 검은 십자가를 상대로 버텨낸 실력 있는 용병. 자네가 굳이 나와 일할 필요가 없지.”
아더가 윌렛을 바라본다.
이번 생에 들어와 처음 보는, 아주 심란한 표정이 된 윌렛이 보였다.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하셨나 보네. 하긴… 윌렛 어르신은 이런 쪽으로 자부심이 있으셨으니깐.’
그 탓에 아더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항상 무뚝뚝하기만 하던 윌렛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평소 하지 않던 농담을 건넸다.
“그럼 더 좋은 의뢰를 받아 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뭐?”
“당분간은 용병 일을 쉴 거긴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저에게 좋은 의뢰를 주시면 되잖아요.”
“….”
“그게 진짜 좋은 브로커 아닌가요, 윌렛 어르신?”
설명에 윌렛이 입을 다문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아더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통했구나. 무거운 분위기는 농담으로 푸는 거지.’
그 속에서 다른 생각도 들었다.
그건 바로 계속 용병 일을 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혈통 다섯 개를 모은 시점에서 용병 일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곰곰이 고민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용병 일을 하면서 얻은 소득이 예상보다 쏠쏠했기 때문이다.
‘다소 변수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성과만 놓고 보면 말이 안 되기는 해. 굳이 그만둘 필요는 없겠어.’
그 사이 윌렛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독특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 대답은 진짜로 이해할 수 없군.”
“…?”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이유를 물을 정도로 친한 건 아니지. 그러니깐, 용병 대 브로커. 이 관계로서 이번 사건에 대한 보상을 하겠네.”
이 말과 함께 윌렛이 티켓 한 장을 내민다.
“이건?”
“암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표네. 앞으로 5개월 뒤 열리는 아케인에서 가장 큰 암시장에.”
윌렛이 보드카를 들이켜며 설명한다.
“선택받은 자들 몇몇을 위해 꾸려지는 아주 프라이빗한 시장이지. 그곳에 가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구할 수 있다네. 설령 없더라도 부탁하면 구할 수가 있지.”
아더가 탄성을 내지른다.
‘그 시장에 가면… 혈통도 구할 수 있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아더는 그럴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유는 전생에 이런 시장에서 혈통을 몇 번 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더가 윌렛이 내민 티켓을 품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윌렛 어르신.”
윌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일을 쉰다고 했으니, 5개월 뒤에 오게.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서 나도 같이 가야 하니깐.”
“오. 이렇게나 배려해주신다고요? 확실히 친해진 보람이 있는 데요?”
“…친해져?”
“네.”
“누구랑?”
“윌렛 어르신이랑요.”
윌렛이 남아있는 보드카를 전부 들이켜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가주게. 자네하고 대화하다 보면 나도 정신이 이상해져. 지니가 왜 자네를 보고 학을 뗐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 * *
어두운 방 안.
검은 십자가를 목에 맨 소녀가, 시체가 되어버린 타르탄 사장을 바라본다.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어 버린 그의 꼴은 빈말로도 좋은 상태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타르탄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타르탄의 죽음은 매우 정당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원을 받고서 아케인에서 알아주는 제약사의 사장이 된 타르탄.
허나 그 은혜도 모르고 배신하려 했으니 그에 걸맞은 응징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소녀는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방 한구석 의자에 앉아, 타르탄과 소녀를 바라보던 연로한 노인.
이 바닥에서는 전설이라 불리는 흑마법사, 흰 수염이 입을 연다.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 안 내어주나?”
“….”
“그것참···. 예쁜 얼굴을 가졌는데 마음씨는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군.”
혀를 찬 흰 수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소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질문한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어르신.”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부탁이요?”
“그래. 그리고 사과할 것도 있고.”
이 말과 함께 흰 수염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데···. 차 한 잔 내어줄 수 있나? 늙으면 입이 텁텁해지거든. 그러면 이야기를 못 해.”
소녀가 대답한다.
“던이란 용병 때문인가요?”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린다.
“뭐 그렇지. 내 손님이자 ‘물건’이 사고를 쳤더군. 그래서 사과하러 왔네. 자네가 내 물건을 건들면, 난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죽여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