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홀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쉽게 수긍한다고?’
벙어리인 척 연기하고 있기에 끝까지 말을 더듬으리라 예측한 홀란이었다.
허나 예상과 달리 아더는 너무나도 쉽게 수긍해 버렸다.
그 탓에 당황했지만, 그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노련한 노기사는 표정을 갈무리한 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해명을 해야겠구나. 어째서 벙어리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냐?”
“음…. 여러 사정이 있는데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사정? 벙어리인 척하는 사정이 있다는 말이냐?”
“예. 그래서 모른 척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더의 대답에 홀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 이유를 말해 보거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네 대부이니 들을 자격은 충분하지.”
“…대부라면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정말 대부이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알고 있는 대부의 뜻이 맞다면, 제게 또 다른 아버지란 뜻인데 전 홀란 경을 오늘 처음 뵙거든요.”
날카로운 지적에 홀란의 입이 다물어졌다.
조금 전 아더가 말을 더듬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감정의 변화를 티 내지 않은 그였지만 이번 대답에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운한 것이냐?”
“아뇨. 하지만 제가 벙어리인 척 연기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는 건 곤란해요.”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그는 손가락을 툭툭 두들기다, 이내 머릿속의 상념을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로서는 갑작스레 나타난 늙은이가 대부라 말하면서 이런저런 권리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 그럼 이건 어떠?”
홀란이 씩 미소 짓는다.
“난 바이에른 공작 각하. 네 어미를 오랫동안 봐 온 오빠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아끼는 여동생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지금 이 상황을 말해주러 갈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곤란한데요….”
“그게 싫으면 사정을 설명하거라.”
“그것도 곤란하고요. 음….”
말을 흐린 아더가 궁리했다.
‘이걸 어쩐다?’
정체가 들킨 것도 난감한데, 하필 그 상대가 소드 마스터인 홀란 레버쿠젠이라니?
‘그것도 내 대부님이라는 분인데… 이걸 어떻게 입막음한다?’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을 열지 못하게 죽이는 거지만 이번엔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 그러지도 못했다.
그 탓에 아더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할 때 옆에 있던 홀란이 놀라 중얼거렸다.
“…마나를 가지고 있어?”
“네?”
“어떻게… 네 몸속에 마나가 있는 것이냐?’
그의 말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와 이걸 눈치챈다고?’
몸 상태가 나아진 뒤로, 서클을 만들기 위해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여태 들켜 오지 않은 이유는 고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뭉치지 않은 마나는 그저 신비로운 기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걸 눈치채다니… 역시 소드 마스터라 이건가?’
그 사이 아더를 지켜보던 홀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너 혼자서 마나를 모은 것이냐?”
아더가 고민하다 대답했다.
“네.”
“혼자서 독학한 것이냐?”
“네.”
“칼은?”
“칼도 쓸 줄 압니다.”
“스승도 없이 혼자서 이 모든 걸 해냈다고?”
아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홀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
힐끔 눈길을 돌린 홀란이 아더의 손을 훔쳐보았다.
훈련된 칼잡이의 손과는 거리가 먼 말랑말랑한 맨살이 보였다.
‘이걸 믿어야 하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벙어리 공자라 불리던 소년이 스스로 심법을 체득하고 칼까지 다룬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군.’
하지만 그 사실을 듣기는 어려워 보였다.
눈앞의 아더 바이에른은 더 이상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홀란은 적당한 미끼를 던졌다.
“그럼 그 실력을 좀 볼 수 있겠느냐?”
“실력이요?”
“그래. 네 입으로 칼을 좀 쓴다 했으니, 대련을 한 번 하자꾸나. 대련 상대는 내 손녀다. 지금은 외출해서 없지만, 꽤 재능이 괜찮은 아이지.”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대련에서 이기면, 비밀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맞다. 더불어 소원도 하나 들어주마.”
“…소원이요?”
“네가 내 손녀를 마나 없는 순수한 대련에서 이기면 가능한 선에서 어떤 소원이건 들어주도록 하마.”
홀란의 제안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너무 좋은데요?”
자신만만한 대답에 홀란이 충고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만약 패배하면, 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관해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떻냐? 이대로 받아들이겠느냐?”
아더가 조금 전보다 더욱 환히 웃으며 답했다.
“너무 좋죠. 받아들이겠습니다. 대부님.”
* * *
바에이른 공작가의 사냥 파티.
제국의 설립과 함께해 온 공작가의 유서 깊은 전통에 참여하기 위해 각지의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망해가는 공작가라 한다지만, 어찌 되었건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탓에 수많은 귀족으로 인해 바이에른 저택이 오랜만에 떠들썩해졌을 때였다.
“지금부터 위대한 바이에른 공작 각하! 요넬 바이에른 공각께서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리겠습니다!”
선언과 함께 시작된 축제.
관례대로 축포를 쏘아 올리기 위해 요넬이 걸어 나왔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미리 잡아다 푼 멧돼지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멧돼지의 몸에서 피 분수가 쏟아졌다.
너무나도 깔끔한 사격에 지켜보던 귀족들의 눈에 이채가 담겼다.
그건 홀란 레버쿠젠 후작.
북부 총사령관도 다르지 않았다.
“오호…. 언제 저런 걸 또 연습했을까.”
“뭐가요, 할아버지?”
“내가 알기론 공작 각하께서 총을 잡은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거로 알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꽤 재능이 있으셨던 것 같구나.”
홀란의 말에 그의 손녀.
엘린 레버쿠젠이 불쑥 질문했다.
“할아버지 그런데 웬 대련이에요? 설마 파티장에서 저보고 검을 휘두르란 말은 아니죠?”
“왜? 부끄러운 게냐?”
“당연히 부끄럽죠! 안 그래도 북부 설원이 고향이라 하면, 야만인이라고 수군거리는데 그런 짓을 하면 이곳에 계신 분들이 절 뭐로 보겠어요?”
똑 부러진 손녀의 말에 홀란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13살이 되는 엘린 레버쿠젠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깜찍한 손녀였다.
레버쿠젠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에, 제 어미를 닮아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이미 수도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레버쿠젠 가문의 혈통답게 검에 대한 이해도도 ‘천재’의 범주에 들어갔다.
‘이대로 잘 성장하면…. 소드 마스터는 몰라도 그 밑의 경지까지는 무난히 올라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와 제 손녀의 대련은 어찌 보면 불공평한 처사였다.
제대로 된 훈련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아더 바이에른이 제 손녀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련을 제안한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계기로 그 아이가 변했을까?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눈조차 쳐다보지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어렸을 때는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
하지만 가주의 죽음과 동시에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아더 바이에른의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홀란 레버쿠젠이었기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명의와 약재.
그것들을 매년 공작가에 보내주었고, 8년 전까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더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아더의 몸에 깃든 독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악질적인 독이지. 처음에는 말을 더듬게 하고, 그 뒤에는 백치로 만들어 버리는 악질적인 독.’
그 탓에 쉽사리 해독제를 찾지 못했다.
허나 더 문제인 것은 그 독을 누가 아더에게 어떤 경로로 먹였냐는 것이었다.
‘저런 증상은 꾸준히 먹였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즉…바이에른 가에 첩자가 있다는 소리지.’
그래서 독의 해독제를 찾는 한편, 이번 일의 내막을 조사했다.
요넬 바이에른.
현 가주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서 말이다.
‘요넬 그 아이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섣불리 행동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 일을 꾸며낸 자들은 숨어 버릴 것이고 다음에는 아더가 아니라 요넬을 노릴 수도 있어.’
그 탓에 조사는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되었고, 대략 그 꼬리가 잡혀갈 때쯤에 아더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1년 만에 다시 본 아더 바이에른의 몸에 그 악질적인 독은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말을 더듬지 않게 된 아더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칼솜씨를 자랑해 왔다.
‘…1년이라는 시간 만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 탓에 홀란은 짙은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로 친한 친우.
그 친우의 아들이 이렇게 변화하게 된 계기를 말이다.
‘원래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막을 알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는 진짜 그 아이에게서 대부라 불릴 자격이 없어져 버리지.’
요넬을 지키고자 마음먹고서, 이미 아더를 미끼로 쓴 상태다.
대부로 불릴 자격은 이미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이 그 마지막 선마저 넘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상념을 정리한 홀란은 고개를 들었다.
먼저 와 기다리던 아더 바이에른이 보였다.
“안녕하세요오!”
“…안녕하세요오?”
“네! 안녕하세요오!”
홀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맞춰 줘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일단 그러자고 판단을 내렸다.
“그래 우리 벙어리 공자님. 준비는 다 되었는가?”
“예! 준비는 끝났습니다아아!”
“좋군. 그럼 대련 상대를 소개하지. 내 손녀 엘린 레버쿠젠이 오늘 네 대련 상대다.”
홀란이 물러서고, 당황하던엘린이 걸어나왔다.
아더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정말 제 대련 상대예요
“네에에!”
대답에 엘린이 홱 시선을 돌렸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에 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진짜예요, 할아버지? 대련이라고 하길래 뭔가 했는데, 정말 벙…아니. 공자님을 상대로 검을 들라고요?”
“진검이 아닌 목검이다.”
“그게 그거잖아요.”
“마음에 안 드느냐?”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게 말이나 돼요?”
손녀의 고집에 홀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네가 이 대련에서 이기면, 수도에 이틀간 더 머물마. 그때 동안 시내를 외출하건 쇼핑을 하건 절대로 간섭하지 않으마.”
홀란의 제안에 엘린의 눈이 커졌다.
어떤 애교를 부려도,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갈 것이라던 할아버지가 고집이 꺾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대련이 뭐길래?’
관객도 그렇다고 심판도 없는 연무장에서 저 벙어리 공자와 대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고민하던 엘린은 곧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뭐가 됐건 상관이 없었다.
‘저런 벙어리한테 내가 질 리는 없고, 그 말은 즉 수도에서 이틀을 더 놀 수 있단 이야기잖아?’
판단을 내린 엘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 연무장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보통 목검보다 끝이 날카로워, 살을 헤집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 사이 아더 또한 자연스레 목검을 집어 든 체 그녀 앞에 섰다.
그것을 확인한 홀란이 입을 열었다.
“이번 대련은 마나는 쓰지 않고 순수 검술만으로 싸운다. 패배는 내가 결정할 때까지. 질문 있나?”
“없습니다.”
“없어요오오!”
대답을 들은 홀란이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엘린이 내로라하는 기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을 때였다.
움직이지 않던 아더가 까닥 손짓한다.
“오세요오-!”
“…?”
“먼저 공격하세요오! 제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안!”
엘린이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지금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거예요?”
“네에에-!”
“하……. 나참. 어이가 없어서. 자신 있어요, 공자님?”
“네에에!”
엘린이 표정을 굳힌다.
총명하다 하지만, 결국은 13살.
자신이 무시당했단 생각이 들자마자, 가볍게 임한 대련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홀란은 혀를 찼다.
한 번 화가 난 손녀의 검은 북부에서 키우는 유소년들조차 당해내는 이들이 몇 없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겠군…. 이 대련.’
생각과 함께 홀란이 아더를 바라볼 때였다.
움켜쥔 검에 힘을 준 엘린이 무릎을 굽혔다.
“그럼…. 사양 안 하고 먼저 선공을 받아 갈게요. 공자님.”
이 말과 함께 엘린이 자리에서 뛰쳐나간다.
그 움직임은 빨랐으며 뻗어 오는 목검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 탓에 홀란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손녀의 일격이 예상보다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피하지 못하면 최소한 타박상이다. 그래도 배려를 해서 검의 선로는 정직해.’
판단과 함께 홀란이 시선을 돌린다.
그 일격에 맞서 아더 바이에른은 어떤 움직임을 보여 줄까?
던져진 의문과 함께 그의 눈이 치켜떠진다.
동시에 엘린도 눈을 치켜떴다.
날카롭게 뻗어진 목검.
그 목검의 끝으로 아더가 그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
콰직-!
기이한 소리와 함께 엘린이 뻗은 검이 아더의 어깨를 살짝 관통했다.
동시에 뿜어져 나온 피에 엘린의 모든 사고와 행동이 멈췄다.
허나 아더는 아니었다.
목검에 어깨가 관통당한 채로, 그대로 엘린의 손목을 날카롭게 쳐올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피 분수에 정신이 나가 있던 엘린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목검을 놓아버렸다.
“어, 어?”
당황한 그녀가 물러선다.
반대로 아더는 앞으로 나아간다.
어깨가 꿰뚫렸지만, 아더의 목검은 힘을 잃지 않고 그녀의 정수리를 강하게 타격했다.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엘린의 신체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기절해 넘어진 순간, 부러진 목검이 휘리릭 날아가 홀란의 발밑에 꽂혔다.
“…!”
넋을 잃고 있던 홀란은 그 목검의 파편에 황급히 정신을 차린다.
“너, 너?”
말을 더듬은 홀란이 피를 철철 흘리는 아더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허나 먼저 움직인 아더의 손이 어깨에 꽂힌 목검의 파편을 뽑아 버렸다.
촤악-!
한 번 더 흩뿌려지는 함께 홀란이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사이 아더가 피가 묻은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제가 이겼네요, 대부님. 그러니깐 약속은 지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