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우당탕탕 운전면허 대소동 (15)
“미안하다.”
주열의 사과는 완벽했다.
내용이 완벽했다는 말은 아니다. 자세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는 말이다. 만약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 자세를 본다면,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용서해 주시죠?’하는 생각 정도는 하고 지나갈 정도로 제대로 된 자세의 사과다.
하지만, 명종은 그 사과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거나, 사과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다. 다른 여러 이유로 당장은 받아줄 수가 없을 뿐이다.
“크르릉….”
장산범이 으르렁거렸다. 명종은 등 뒤가 서늘해졌다. 아무리 명종이 침착한 편인 사람이라고는 해도 말 그대로 집채만 한 괴물이 뒤에 있는데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야, 가만히 안 있냐?”
물론, 저 장산범이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이라도 유의미하게 버둥거릴 때마다, 그 바로 옆에서 장산범을 제압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서로 힘 빼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자. 나도 너랑 이러고 있기 싫어.”
월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이렇게 말하면 좀 쫄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해 본 목소리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장산범은 그저 계속해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버둥거릴 뿐이다.
“에잇!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좀 아프게 맞고 그만둘래? 아님 그냥 그만둘래?”
월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명종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신경은 쓰인다. 아무리 그래도 집채만 한 맹수가 뒤에 있는데 신경도 안 쓰는 건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연히 눈앞의 사람이 완벽한 자세로 사과하고 있더라도 눈에 확 들어올 수가 없다.
게다가, 저쪽의 문제를 제외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조금 더 근본적인, 사실 이쪽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일단 일어나시죠.”
명종이 그 말을 한 뒤에야 주열은 허리를 폈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태도가 눈에 보인다. 허리 통증 때문인지 미약하게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단지 진지하게, 미안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명종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아마 지금 이 상황이랑 관련이 있는 분으로 보이시는데요.”
단순히 자세가 올바른 정도에서 끝이 아니라, 자신이 뭐라 말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허리를 펴지 않고 있었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저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거다.
“하아….”
명종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나름 스스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기본적으로 눈치도 있고, 나름대로 상황 판단하는 능력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눈앞의 이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서 이런 완벽한 사과를 할 리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확실하네요.”
명종은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대체 누구신가요?”
아무리 훌륭한 자세로 사과를 해도 받아줄 수 없는 이유다. 명종은 이 사람이 대체 누군지 모른다. 아는 사람인데 까먹은 상황인가 걱정했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 자체가 아니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렇죠?”
완벽하게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연히 원한을 살 일을 했다거나, 뭔가 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상황을 따라갈 수 없다. 명종은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물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시던 분이고, 뭘 했기 때문에 저한테 사과하시는 건가요?”
따지거나, 화를 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정말로 모르겠다. 그 표정을 읽은 주열은 역으로 당황했다.
“머고? 설명 안 들었나?”
주열은 조금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저쪽에 있는 설이를 쳐다봤다.
“아.”
설이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까먹었다.”
* * *
자리를 옮겼다. 계속해서 날뛰는 모습이 상당히 주의를 분산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시끄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렇게 자리를 옮긴 뒤에는 비교적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가요.”
물론 이야기가 차분하게 진행되었다는 게 쉽게 풀렸다는 뜻은 아니다. 명종은 지금까지 지었던 표정 중 가장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오늘은 많이 힘든 하루다.
처음 보는 크기의 괴물이 날뛰고, 그 괴물을 고작 한 사람이 막고 있고, 옆에서 방금 전까지 진지하게 공사 이야기를 하던 사람은 자신의 뒤에 장산범이 있다는 말이나 하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또 거기서부터 다시 한번 장산범이 날뛴다. 개 한 마리만 날뛰어도 개판이라 하는데, 지금 상황은 범이 날뛰고 있는 말 그대로 범판이다.
그 와중에 뒤늦게 설명을 듣고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하니 여러모로 쉽지 않다.
“그런 상황이군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명종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산범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 왜 이곳에 나타나서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힌 것인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주변 환경이 이 모양인데도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해낸 것을 생각하면, 명종은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네, 설명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이었어요.”
설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덕분에 나도 같이 상황을 들을 수 있었으니 아예 멍청한 짓이라고 하지는 않겠다만, 이 녀석. 잊어버릴 게 없어서 그런 걸 잊어버려?”
시아는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 그러게. 다른 거 설명하다가 그만.”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빼먹지 않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작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부분은 정확히 전하지 않았다.
“나도 참.”
설이는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봐도 황당하다. 아무리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었다지만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빼놓고 넘어갈 줄이야.
정작 가장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건 명종 쪽이다.
“괜찮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설명을 들었더라도 그렇게 큰 도움은 안 되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차피 얼굴을 봐도 몰랐던 사람이다. 미리 그런 사람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어도 달라질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다 같이 한 번 더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더 좋은 결과라는 생각도 드네요.”
대체 장산범 같은 게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진짜로 사람을 해치는 선까지는 가지 않았고 그러면서 자신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지에 대한 것을 몇몇 부분은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도 있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더 잘 된 셈이다.
다만, 듣고 나서도 여전히 머리는 아프다.
“그런 게 이유였다니.”
그 길고 긴 괴롭힘의 시작이 별 말 같지도 않은 오해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듣고 나니 머리가 더 아픈 것 같다.
명종은 자신도 모르게 장산범 쪽을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는 엄청나게 무서운 맹수처럼 보였고, 지금도 사실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멍청해 보인다는 인상이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명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급격하게 피곤한 기분이 든다.
“참, 별것도 아닌 이야기 하나 때문에.”
“네, 정말 좀 그런 이야기죠?”
설이는 조금은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참 애매한 상황이에요. 그렇죠?”
일단,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잘못을 했는지를 물으면 그건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비바람이 부는 날, 개 하나를 주운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보니 그 개를 기르게 된 것도 잘못이 아니다.
그나마 그 앞에서 누군가를 까내린 것은 굳이 따지자면 잘못이지만, 그렇게 막 비난할 정도의 일인지는 애매하다. 사람 뒷담을 까는 건 사실 누구나 하는 일이다.
“심지어 그건 장난삼아 한 명령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수준의 말이에요. 그걸 명령이나 지시라고 할 수는 없죠.”
명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본 사람 입장에서도 그건 명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반려동물을 잘 안 묶어둔 사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일반적인 개 수준이라면 절대로 나가지 못할 정도의 공간이었으니 그것도 좀 애매하죠. 그러니까 이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는 말이에요. 보통은 그런걸 ‘잘못’이라고 하지는 않아요.”
말 그대로 사고에 가깝다. 심지어 장산범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물론 본인이 잘못 알아들은 건 잘못이 맞겠죠. 하지만 나름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나름대로의 일선은 지킨 모양이에요.”
리더가 말한 것을 따르고, 철저하게 사람은 해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나름대로 억울하다면 억울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을 묻자면 물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에요.”
“동의합니다.”
명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문제를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로 생각해봐도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말씀하신 대로 키우던 동물 관리를 잘못한 사람 잘못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동물조차 아니죠. 그러니 도덕적인 비난은 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상황을 이해했으니까요.”
차라리 뻔뻔한 태도로 나온다면 그 사람을 비난할 수라도 있겠지만, 심지어 본인은 도의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굳이 더 따질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정을 봐 드릴 수 있는 선에서는 봐 드리고 싶지만….”
명종은 눈을 찌푸렸다.
“제가 본 손해는, 정확히는 이쪽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보통 이런 문제는 합의가 깔끔합니다. 중간점을 찾을 수 없다면 법적 근거를 따져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번엔 그게 어렵다. 피해액은 그리 적지 않고, 누가 봐도 주열은 지금 입은 피해를 보상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그저 동종업계 옆 회사의 직원일 뿐인 사람이 이런 대규모의 피해보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일반적인 의미의 합의는 어렵다.
그렇다고 법적인 분쟁으로 끌고 갈 수도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판사나 변호사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장산범이 한 짓을 그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황이 너무 애매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버틸 수는 있는 손해라는 말이 적은 손해라는 말이 아니니까요.”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손해가 보전되지 않으면 명종도 그냥 웃으면서 봐 줄 수는 없다.
여러모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 명종은 잔뜩 찌푸린 눈이 되었다.
“음.”
설이는 손을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인데요.”
설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한 제안이다. 물론, 실행하려면 밑 준비는 조금 있어야겠지만.
“그게… 됩니까? 아니,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떠나서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명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설이는 씩 웃었다.
“뭐, 그래도 그게 가장 아무도 손해 안 보는 일 아니겠어요?”
물론 그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거다. 생각대로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도 잘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자세한 사항은 따로 이야기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