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부당거래 (18)
문은 닫혔다. 태주는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 방에 뭐 중요한 거 놔둔 거 없죠? 아저씨?”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주는 아저씨 쪽을 한번 힐끗 보고는 그냥 한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직 잠들어 있는 유정이를 꼭 끌어안은 채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걸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신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한 저기 별다른 건 없어. 꽤 희귀한 책 같은 건 몇 권 있기는 하지만, 필요하다 할 만한 건 없지. 어쨌든, 이제 와서는 악마의 물건이야. 굳이 욕심을 낼 필요가 없지.”
“귀한 책이요?”
태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곳에는 악마를 부르는 책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뭐, 있어도 어쩌겠어요?”
태주는 살짝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악마가 저 방에 봉인된 이상 저 문은 열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악마는 저 방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나요?”
“그래. 최소한 3년 동안은 아예 열리지 않아. 밖에서 문을 열려고 해 봐도 열리지 않을걸?”
남자는 일부러 문을 한번 잡아당겼다. 태주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렇게 움찔한 게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의도했던 듯 남자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 문은 아파트가 철거되는 시점까지는 열 사람이 없어. 물론. 네가 연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말을 들은 태주는 피식 웃었다.
“설마 제가 그럴 리가요.”
“뭐, 미래는 모르는 법이야. 나중에 네가 직접 열어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 그런 미래가 올까요?”
“글쎄.”
남자는 처음으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고는 말했다.
“모르겠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한 기분은 들지 않아. 그럼 괜찮은 거 아닐까?”
“… 의외로 생각을 단순하게 하시는 편인가 봐요?”
“고민은 정답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법이야. 옛날이면 모를까,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멀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었다.
“물론, 이번에는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이야기가 원래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풀리기도 했고 말이야.”
남자의 말을 들은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남자는 바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기다렸다.
“원래는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요?”
“지금 하려던 일을 그냥 했겠지. 다른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누구의 사정도 봐 주지 않고.”
남자는 웃는 모습 그대로 말했다.
“그건….”
너무하다, 고 말하려던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에게도 그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 원래 나라면 하지 못했을 선택이지, 그건. 이런 식으로 한 가지의 사건을 잘 해결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하나를 더 도와주러 가는 편이 이익이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피해자를 시간 들여 구제하는 것보다, 두 명 이상의 다른 사람을 돕는 편이 산술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있었다. 내가 주변 일들을 처리하고 오는 그사이에 악마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신 나간 녀석이. 네가 악마를 이긴 거야.”
“… 저는 잘 모르겠네요. 이겨냈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결국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을 것 같아서요.”
악마를 가두고, 봉인하는 것은 남자가 한 일이다. 자신이 한 건 그 사이에서 황급히 뭔가 챙겨온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태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뭐, 방금 말했잖아. 내가 한 건, 문제 해결 순서를 아주 약간 순서를 바꿨을 뿐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나는 원래 하려던 일에서 뭔가 더 하지는 않았고, 마지막 부분도 조금 기다려 주긴 했지만, 그뿐이야.”
남자는 태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견하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표정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해. 악마라는 건,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런 관점에서, 넌 꽤 잘 이겨낸 셈이야.”
그렇게 말하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제가 없었다면, 이번 일에서 유정이는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는 말인가요? 세상에는 어떤 변화도 없고요?”
태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아니었으면 일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말처럼 들릴 것 같아 굳이 하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지만 궁금하긴 하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글쎄. 그냥, 처음부터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계속 변화 없이 살아갔겠지. 사람 하나 뒤바뀌는 건 의외로 세상에 큰 변화가 없어서.”
너희에게는 대단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별거 아닌 이야기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태주는 역시, 그랬으려나 하고 생각한 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말인데요. 세상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태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처음에 세웠던 가설 있잖아요?”
“처음에 세웠던 가설? 아아, 그 네가 다른 세상에서 날아왔다는 그 가설 말인가.”
“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쩌면 틀렸던 게 아닐까요?”
한참 생각해 봤지만,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악마가 이 모든 일을 꾸몄던 거라면 결국 저는 다른 세상에서 날아왔을 필요는 없었던 거잖아요? 그냥 저는 우연히 그런 마법 같은 일이 통하지 않았던 거고요.”
바뀐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태주는 이세계인이 아닌 것이다. 그게 다행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남자는 말했다.
“나야 모르지.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어.”
그런 면에서, 너는 여전히 모종의 이유로 이세계로 떨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말한 가설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태주는 이번에 우연히 발견한 예외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결국,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무책임하지만, 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검증할 방법 같은 것이 없다. 실험이야 여러 번 더 해봐야겠지만.
“하지만 아마 마지막까지 알 수 없을 테지….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남자는 태주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해야지. 신분이 하나 정도 필요하지 않아?”
남자는 태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태주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연히 필요하죠.”
태주는 조금 딱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필요하세요?”
태주는 남자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남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 저요?”
“너한테 나쁜 조건은 아닐 거야. 기본적으로, 이건 스카웃에 가까운 거니까.”
남자의 태도는 온화했다.
“뭐, 계약 가지고 이런 일을 겪은 사람한테 이런 말을 들이미는 게 참 기묘한 기분이기는 한데, 일단 지금부터 너는 내 부하다. 그렇게 하면 저 애가 원래 모습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 부하요?”
“그래. 데리고 다니면 꽤 쓸만할 것 같아. 신분 마련은 나한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내가 그런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민하는 척 했지만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다. 태주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런데, 그럼 이제는 뭐라고 부르면 되는 걸까요?”
태주는 남자를 쳐다보고 물었다.
“사장님? 그렇게 부르면 되나요?”
태주의 말을 들은 남자는 처음으로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이라. 어감이 별론데.”
“사장님이 별로면 뭐라고 불러요?”
태주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부장님? 차장님? 회사 직급이 별로라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다 싫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살짝 쉬었다.
“좋아. 소장 정도로 하지.”
“… 군인이에요?”
태주의 의아하다는 말투를 들은 남자는 더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권위적인 조직은 좋아하지 않아. 전혀. 어쨌든, 조금은 즉흥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게 하나 있거든.”
“갑자기요?”
“그래. 꽤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어. 나는 원래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지만, 너를 만났으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남자는 말했다.
“나는 사무소 하나를 차릴 생각이야.”
“사무소요?”
“그래. 네가 오늘 겪은 이런 일 해주는 장소. 너는 첫 직원이고.”
태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월급 나와요?”
남자는 웃었다.
“얼마 받고 싶냐?”
* * *
“—하는 일이 있었던 거야.”
태주는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생각보다 너무 긴 이야기였는데.”
월이는 책상 쪽에 축 늘어져 말했다. 이야기를 듣다 지쳐버린 것이다. 그래도 본인이 이야기 꺼낸지라 어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월이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감상을 말했다.
“너도 참 어지간했구나.”
“이 긴 이야기를 시켜놓고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태주는 목이 아프다는 듯 물을 한 잔 마셨다.
“아니, 너 시작할 때는 분명 그렇게 길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했잖아. 거기다 뭔가 처음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길래 좌충우돌하면서 시행착오 겪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너는 똑같았구나 싶기도 하고.”
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실망한 표정이다.
“대체 뭘 실망한 거야?”
태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이는 월이의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월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아요. 오빠도 뭔가를 잘 못 하던 시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그런 거였어요.”
같이 힘든 시절을 겪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금수저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 된 설이는 배신당한 표정이 되었다.
“자기도 막 힘든 시절 겪었던 것처럼 해놓고.”
“아니, 나도 힘들었거든? 물론 그런 악마는 너희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쉬운 상대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 아뇨.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요.”
설이는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가 처음 봤을때 이미 그랬지.”
오히려 시아 쪽은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에게 사기를 치는 행동이나, 아니면 다른 말도 안 되는 배짱부리는 행동 같은 것도 그렇고. 사실 저런 건 어느 정도 선천적인 거야. 저런 생각을 하는 게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에 따라서 원래 꽤 많이 갈리는 영역이지. 물론 저 경험이 즐거웠을 거라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 좀 실망이에요.”
처음 겪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길래 실수투성이 초보 시절을 기대했던 설이가 조금 투덜거리는 사이, 월이가 뭔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그럼 그 악마는 어떻게 된 거야?”
“뭐, 아직도 그 방 안에 있겠지.”
태주는 목을 살짝 긁적이고는 말했다. 월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악마는 아직도 그 방에 있어? 그 문은 아직도 못 여는 거고?”
“응.”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걸?”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사실,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게 뭐냐, 벌써 꽤 옛날 일이라서 말이야.”
태연한 대답을 들은 시아는 뒤에서 피식 웃었다.
“너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건 미뤄두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 근데 저 이런 거 항상 보면 악마가 탈출해서 이상한 일을 저지르던데요.”
설이가 한 말을 들은 월이는 맞장구쳤다.
“어! 맞아! 공포영화 보면 꼭 그런 데서 누가 문 열고 죽던데.”
“이상한 복선 깔지 마. 우리 가족들이란 말이야.”
태주의 불만을 들은 월이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 말했다.
“복선이고 뭐고, 지금… 은 시간이 좀 그렇고 내일 내가 가서 좀 때려 주면 괜찮은 거 아냐. 야, 집 주소 말해봐.”
“지금 말하면 기억이나 하겠냐.”
태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조금 있다.
“내일 같이 가 보지 뭐.”
그 문을 정말로 내가 여는 날이 온 건가. 태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생각난 김에 그런 거 미리미리 해치워 두는 게 좋지.”
“그쵸? 미리미리 해결해 두는 게 좋겠죠?!”
설이도 동의했다.
“그럼 내일 가죠! 내일!”
“내일?”
태주는 당황했지만,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뭐, 그러자.”
오랜만에 한 번, 가족들 얼굴이나 보러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심심한 사람은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