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끝없이 찾아오는 벨소리 (5)
월이가 가져온 아이스 자몽 초코 스무디를 본 태주는 머리를 짚었다.
“메뉴가 이게 뭐야? 자몽에 초코?”
조합 자체가 상식적인 매치업은 아니다. 먹어보지 않아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태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어울릴까?”
“아무 블렌더 쓰는 음료수에 초코칩을 넣어서 갈라며?”
월이는 시키는 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 했는데… 너 자몽 먹어본 적 있어?”
미심쩍어하는 태주의 말을 들은 월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자몽 소다는 먹어본 적 있어. 그런 맛 아냐?”
“그런데도 이걸… 아니, 뭐 네 입맛에 맞을 수도 있지. 내가 뭐 억지로 먹어라 마라 할 입장은 아니니까.”
태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없다고 내 탓 하지만 마라?”
“뭐 그렇게 걱정이 많아? 초코 들어가면 다 맛있던데.”
월이는 불만스럽게 말한 뒤 빨대로 음료를 한번 쭉 빨고는 그대로 다시 내려보냈다.
“써….”
약 삼 초 만에 월이는 그대로 울상이 되었다. 태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쓰겠지.”
자몽 특유의 쓴맛에, 오히려 좋은 초콜릿이 가지는 특유의 쓴 향과 맛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좋아할 수가 없는 맛일 거다.
“뭐, 배운 셈 치고 넘어가. 자몽을 다른 것과 합칠 때는 주의할 것.”
태주는 잠시 고민하다가는 월이가 가져온 열에 아홉은 안 좋아할 취향의 음료수를 그대로 보영에게 넘겼다.
당연히 엿이나 먹으라는 의도는 아니고, 그래도 카페에 왔으니 앞에 컵 하나 정도는 있는 게 보기 좋을 것 같아서다.
“뭐, 이런 걸 가져올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한 잔 받으시죠.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보영은 어색하게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내려놓고는 말했다.
“제가 따라오는 걸 언제부터 아셨나요?”
보영은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조금은 겁먹었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는 태도다.
“언제부터 알았냐고요?”
태주는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답하기 어렵네요. 처음부터라 해도 될 거고, 아니면 방금 알았다고 해도 될 거에요.”
“처음부터? 학교에서부터 제가 따라오는 걸 알고 계셨나요?”
“봐서 알았냐면, 아니에요. 말씀드렸죠? 방금 알았다고 해도 된다고요. 전 보영 씨의 얼굴을 이번에 처음 봤어요. 누가 미행하고 있다는 눈치를 챈 것도 아니죠.”
대답을 들은 보영은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분명히 따라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영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간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절 불렀던 거에요?”
“그런 셈이죠. 불렀다는 표현보다는 올 테면 오라는 느낌에 가까웠지만요.”
보영은 조금 원망하는 눈빛으로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하지만 태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저 애들은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요. 제가 들은 건 학교에서 만난 친구에 대한 이야기 정도죠. 그냥 평소의 잡담 정도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수준의 이야기요.”
보영은 잠시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곧 다시 닫았다. 여전히 조금은 억울한 표정이지만, 원망하는 눈빛은 거뒀다. 태주는 그 표정을 본 뒤 말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제가 추측했어요. 여기서 제가 이렇게 굴면 보영 씨는 무조건 알겠구나. 그리고 따라오겠구나. 하는 걸 말이죠.”
괜히 학교 앞에 찾아온 이유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학교 앞에 나타난 수상하게 눈에 띄는 사람. 그런데, 보영 씨가 꽤 신경 쓰는 두 사람과 아는 사이에요. 대화도 꽤 친하게 하죠. 관심을 안 가질 리가 없어요. 보기만 한다면요.”
그렇다면, 지나가다 한 번은 볼 수밖에 없도록 대놓고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처음부터 따라오라고 판을 깔아 두셨던 건가요.”
의문형이 아니다. 그저 확인하는 것에 가까운 말투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혼을 내거나 화를 낼 이유는 없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한 일이니까요.”
미행하고, 몰래 들으려 한다. 일반적으로는 불법이고 부도덕한 일의 영역에 있겠지만, 그래도 애초부터 상대가 그럴 거라 생각하고 이 쪽에서 유도했다면 그걸 가지고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경찰이 하는 함정수사도 종종 욕을 먹는 마당에, 이쪽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럼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보영은 태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제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셨나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럼 그냥 제 생각이 틀렸던 거겠죠. 당신이 이번 일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일 테니까요.”
하지만, 보영이 따라왔다는 점에서 태주의 생각은 이미 어느 정도 맞았다.
“하지만 따라왔으니 잘됐네요. 저희를 미행하고, 몰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계속해서 따라온 걸 보면 제 생각이 어느 정도는 맞은 모양이에요.”
보영은 조금은 기묘한 것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 네가 미행을 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당연히 이상하게 들릴 만하다. 태주는 조금은 씁쓸하게 웃었다.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러라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하지만 저 역시 필요하다면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그걸 가지고 보영 씨에게 뭐라 할 수는 없죠.”
태주의 말뜻을 알았는지 보영은 음료수를 한번 쭉 빨고는 월이처럼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긴장은 좀 풀리셨나요?”
“조금은요.”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야기는 다 들으셨죠? 어지간한 부분은 다 들으셨을 거 같은데.”
“그렇죠.”
보영은 당당하게 말했다.
“일부러 작은 소리로 말씀하신 몇 가지 이야기 빼고는 전부 들었어요. 이번에 그쪽에 채연이가 찾아갔다는 이야기라던가는 말이에요.”
“충분하네요.”
태주는 씩 웃었다.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좋다.
“그럼 하나 질문을 드릴 텐데요.”
“뭔가요?”
“이번에, 어디서 이상한 점을 느끼셨나요?”
태주의 질문을 들은 보영은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리고는 표정 변화 없이 그 스무디를 쭉 빨았다.
“어떤 이상한 점이요?”
“그 이채연이라는 분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셨냐는 질문이에요.”
보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그게 대답이나 다름없다. 태주는 살짝 웃었고, 보영은 조금 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밑천 털려본 적은 처음인데요.”
“우리 이야기하는 거 들으셨잖아요? 나름 공평한 거 아니겠어요?”
“아니겠죠. 제가 듣는 걸 알고 이야기했으면 들어도 상관없는 걸 풀어준 걸 텐데.”
보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그래요, 저는 사람을 살피는 버릇이 있어요. 나쁜 버릇이죠. 다른 사람이 결코 살피지 못하는 곳까지 순식간에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꽤 능력 있는 관찰자지만, 반대로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요.”
“들었어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저는 누군가의 행동이 이전과 달라지면 곧바로 알 수 있단 말이에요? 차이가 생긴다거나 할 때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 모를 수가 없다. 보영의 이 행동은 일종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저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어제 채연이를 봤어요. 우연이었죠.”
말 그대로 우연히 지나가다가 봤다.
“어디서죠?”
“편의점이었어요. 그냥, 평범하게 먹을 걸 사고 있더라고요.”
인사를 할까 했지만, 인사를 할 수는 없었다고, 보영은 말했다.
“사람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였어요.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았죠. 멀리서 본 건데도 차이가 보일 정도로 심한 얼굴이었어요.”
처음에는 저 정도로 아프니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채연의 움직임은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몸이 아프기보다는 불안해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한번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고 나니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이전에는 아프더라도 어떻게든 학교에 나왔던 사람이다.
해외에도 여러 번 갔다 왔는데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질 이유가 없다. 시차 적응 문제를 겪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닐 텐데, 그걸 핑계로 결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저렇게 불안에 떨 만큼 채연의 성격은 그리 어둡지 않다. 오히려 어지간한 일은 빨리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영은 말했다.
“원래 잘 아는 사이였나요?”
태주의 질문에 보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저야 뭐, 이 학교 학생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히 더 잘 아는 사람이냐면,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저런 표정을 짓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기억해요.”
“그런가요. 역시 조금 이상한 일이네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저희를 따라오신 거 보면 그래도 이번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는 대강 감을 잡은 거 같은데요.”
“네. 잘은 몰라도 경찰에 도움 요청할 수 없는 걸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빼고 설명해야 한다면 저게 가장 적당한 표현이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거의 정확하네요. 그래서, 하나 제안을 드릴 건데요.”
“뭔가요?”
“혹시, 저희랑 같이 사람을 하나 도울 생각이 있나요?”
보영은 탐색하는 눈초리로 태주를 쳐다봤다.
“사람을 도와요?”
“네. 누굴 말하는지는 알고 계실 거고요.”
보영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아직 경계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뭘 해야 하는데요? 아직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물어만 보는 거지.”
“별로 대단한 건 안 시켜요. 그냥 한 가지만 알아봐 달라는 것 뿐이에요. 그것만 하고 나서는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멋대로 더 끼어드셔도 되고, 아니면 그대로 빠지셔도 되고.”
대체 뭘 시키려고, 하는 표정으로 보영은 쳐다봤다.
“그 채연씨가 사는 집에 한번 방문해 주세요.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좀 해 주시고요. 가능하다면 집이나 본인 사진 같은 것도 한 번 보내 주면 좋겠네요.”
태주의 말을 들은 보영은 기가 막힌 듯 물었다.
“…저한테 지금 개인 정보를 유출해 달라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걱정되서 찾아가는게 같은 학교 학생이 낫지 생판 남인 모르는 남자가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건 그냥 그 정도의 이야기에요. 사진은 정 걱정된다면 보여만 주시고 폐기해도 좋아요. 확인만 할 수 있을 정도면 되니까요.”
납득을 한 듯 못한 듯 보영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보영은 그래도 이내 어쩔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방금 월이가 왜 남의 집에 들어가는 걸 잘 하게 됐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보영의 말을 들은 월이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너, 너도 그때 같이 들어갔잖아!”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난 말리려고 했다?”
“그때 너도 같이 들어와놓고!”
이러다간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지겠다. 태주는 월이를 한 손으로 제지한 다음 다시 물었다.
“그래서 해 주실 건가요 안 하실 건가요? 중간에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해도 된다는 좋은 조건인데요. 제가 말한 걸 무리해서 다 할 필요도 없고요.”
“왜 그런 요청을 하시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네. 그 정도라면 못 할 건 없죠.”
보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맨입으로 시키는 거에요?”
“맨입이라.”
태주는 웃었다. 하기도 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사기꾼이 아니라면 자신감의 표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보영은 최소한 사기꾼은 아니다.
“자신감이 있나 봐요?”
“자신이야 늘 있죠. 그래서 제가 그걸 하면 뭐라도 주나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 원하신다면 드리죠. 그런데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