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오래된 용 (13)
“오늘은 네가 먼저 왔구나.”
용의 말을 태주는 조금 일그러진 표정으로 들었다. 하대하는 듯한 말투가 문제가 아니다.
“꼭 저런 식으로 떨어져야 하나?”
어째서인지 내 무릎까지 찌르르해지는 그런 기분을 느낀 태주는, 그냥 왠지 내 무릎까지 아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낙법이라도 취하거나, 최소한 무릎을 조금 굽히는 모션 정도라도 조금 취했다면 이렇게 내 무릎까지 찌르르하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당연하게도 용에게는 별 반응이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저따위 미친 자세로 뛰어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간에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용의 질문에 태주는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냥 기다린 거죠. 그리고, 오늘은 몇 사람이 더 왔습니다. 불만은 없으시죠?”
“그래.”
용은 월이를 한번 힐끗 살폈다. 몇 사람이라, 대놓고 뭔가 더 숨긴 게 있다고 말하는 모양새지만, 상관 없다.
용은 긴 세월동안, 그 정도 숨기는 것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지내오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저 녀석들의 상태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용에게 관심이 있는 건 눈앞의 녀석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그 방법 하나 뿐이다.
“뭐, 그 정도 자신감은 있으시겠죠. 그러니 이런 불공정한 수준의 내용으로 약속을 한 거고요.”
태주는 용의 그런 태도를 짐작했다는 듯 말했다.
용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태주는 목숨을 거는 계약을 해야 했다. 그것도 전능을 부분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까지 함께 미끼로 써서 말이다.
그 정도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용은 오만하고, 강하다.
“불공정이라.”
용은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면 공정한 거래 같은데. 원래라면 듣지도 않을 말을 들어 줬으니.”
“그걸 공정한 거라고 착각하면 곤란한데요.”
태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다. 태주는 지금 용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로 온 것이 아니다.
“뭐, 공정하고 아니고는 지금 상관없는 일이죠.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법이니까요. 그나저나, 제가 방법을 말씀드리기 이전에 질문 몇 가지를 드리고 싶은데요.”
“질문?”
용이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태주는 무시하고 말했다. 이건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 난처한 질문들은 아니에요. 원래 오늘 하기로 한 약속은 제가 전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당신은 소장을 돌려주는 거였잖아요? 하지만 이 자리에 우리 소장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요.”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본인이 별로 원치 않더군. 지금 자신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더군.”
“본인 의사인가요?”
“본인 의사다. 억지로 데려오기도 애매해서 그냥 내버려뒀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다. 용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암튼 소장도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월이가 무심코 한 말에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녀석은 내가 본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이상하다. 모든 것을 아는 자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 어떤 건지.”
“그런가요? 재미 삼아 묻는 건데, 전능과 전지 중 어느 쪽이 더 이상한 사람인가요?”
태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용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본인에게도 조금은 흥미로운 주제였던 듯, 용은 꽤 흔쾌히 대답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한쪽은 아주 생각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 아무 생각이 없고, 반대쪽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 성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대답이네요.”
태주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용 쪽을 보며 물었다.
“어쨌든 혼자 왔다는 건가요?”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혼자 왔다.”
“아무리 봐도 약속 안 지킨 거 같은데.”
“그렇지.”
월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용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약속을 어겼다는 말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미안하다는 태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이해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둔 것이니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뭐?”
월이는 확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 하지만 용은 월이의 태도와 상관없이 말했다.
“애초에 너희가 확인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래도 된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만, 만약 했다 친다면 어쩔 게냐?”
“진짜 막 나가네.”
월이는 눈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용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세상은 강한 자의 것이다. 나는 그래서 딱히 부하가 되고 싶지도 않은 전능의 밑으로 들어갔지. ”
용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덤벼도 좋다. 너희들이 그 정도 배짱은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거든.”
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방심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얕보고 있지는 않다는 듯한 태도다.
“흡혈귀를 잡은 너희들이 뭔가 숨겨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덤벼도 좋아.”
용의 말을 들은 월이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용은 그 표정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태주는 적당히 넘겼다.
“거 참, 영광이네요.”
“자, 여기에 왔다는 건 어쨌든 대답을 들려주러 온 거겠지. 네 대답은 뭐냐? 어떤 방법을 써야 하지?”
돌리는 말도 없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도 하지 않는다. 용은 태주만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겨우 찾은 단서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크게 화가 날 거다.”
“꽤 절박하신가 보네요. 태도를 그렇게 하시는 거 보면 말이에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는 말했다.
“대답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하나 먼저 말해드려야 할 게 있어요.”
“뭐지?”
용은 느긋하게 물었다. 다만, 느긋한 것은 말투뿐이다. 용은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필요한 말인가?”
“필요하긴 하죠. 당신과 이야기를 한 뒤로 생각을 좀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중간에 잠깐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당신에게 방법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는 것도 어쩌면 나쁜 방법이 아닌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어쨌든 소장이 원하는 건 전능에게 잡히지 않는 것이다. 가능만 하다면, 아예 전능을 물리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최소한 영원히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편이 쉬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용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면 확실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당신과 함께 전능을 타도하려 드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당신이 하려는 일을 의뢰라고 생각한다면, 아예 저희가 나서도 괜찮기도 하고요. 애초에, 저희가 사람 아닌 것의 의뢰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원래는 사람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랬던 적이 이미 몇 번이나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태주는 앞으로 걸었다.
“그러니, 방법을 알려주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협력을 못 할 것도 없다. 그게 제 결론이었어요.”
과거형 말투다. 용은 천천히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는구나. 좋다고 말하는 네 말투에 비해서, 전혀 네 목소리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들리니까 말이다.”
용은 여전히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거절할 생각이냐? 그 방법을 전하지 않을 셈이냐?”
태주는 씩 웃었다.
“아뇨, 아뇨, 거절이라뇨.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는 네 명이 다라서요. 소장을 합쳐도 다섯인데, 지금은 당신이 데리고 있고요. 그러니 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건가?”
“그냥, 대단할 거 없는 이야기에요. 그냥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이거든요.”
태주는 웃었다.
“뭐, 네 명밖에 없는데 처리해야 할 일은 많으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우리도 규칙이 하나 있어요. 선착순이에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만.”
“뭐, 어제 만든 규칙이니까요. 실제로 의뢰라고 할 만한 게 겹친 건 어제가 처음이었거든요. 하지만, 상식적인 규칙 아닐까요?”
자원을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동시에 한정되어 있다면 결국 선착순만큼 합리적인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순서를 정하자면, 죄송하지만 당신이 늦었어요. 당신보다 먼저 의뢰한 사람이 있고, 그 의뢰는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태주는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 의뢰부터 처리한 다음에, 당신의 요청을 처리할 생각이에요.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용은 눈을 찌푸렸다.
“네 녀석, 내가 말한 것을 들어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군.”
“그럴 리가요?”
태주는 웃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죽어 있었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 계약이 가짜가 아니라는 확인은 본인이 그렇게나 많이 해 놓고.”
태주는 대놓고 용을 놀리듯 말했다.
“저는 굳이 당신과의 약속을 거절할 생각이 없어요. 그냥 순서의 문제가 좀 있을 뿐이에요.”
용은 눈을 감았다. 용도 그 계약이 실제로 목숨을 버리는 짓이라는 건 경험상 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일부러 미룬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데.”
지금까지 본 용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눈을 감곤 했다. 물론 겨우 그 틈을 타 기습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정도로 용에게 기습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일단 들어보지. 사실 이제와 조금 기다리는 데 문제는 없으니. 그 문제 해결은 얼마나 걸리지? 누가 어떤 의뢰를 한 거냐.”
“그게, 또 저희보다는 다른 데 걸린 문제라서.”
용의 질문에 태주는 머리를 조금 긁적이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지금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 것 치고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이, 용은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뭐냐?”
용은 눈을 뜨지도 않고 물었다. 태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별 건 아니고… 저희 손님이 당신에게 이걸 꼭 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말이에요.”
“이걸?”
“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지금까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 * *
어젯밤, 방에서 나온 승현은 굳은 표정으로 그런 질문을 했었다.
“저희는 용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는 걸까요?”
지네의 이야기는 들었다. 생각하는 데 도움은 되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사자에게는 사자의 도덕이라면, 용에게는 용의 도덕이다. 과연 그렇다면 인간의 잣대로 용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승현은 그런 의문을 품었다.
“꽤 철학적인 질문을 가져오셨는데요. 그건 저도 자주…는 아니고 가끔 고민하는 문제인데.”
태주는 조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결론을 내지 않기로 했어요. 정답을 판단하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거든요.”
어쨌든 사람의 판단이다. 사람이 아닌 것이 그 판단을 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안에서 대화를 해도 말이에요.”
안쪽에서 한 이야기는 도움은 되었지만, 용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명쾌한 답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는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는 뭐랄까, 납득이 안 가요.”
승현은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의 결과와 감정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다.
“본인은, 지금까지 본인이 그렇게 행동해온 데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아무 가치 판단도 안 하고 있는 걸까요?”
승현은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생겼다.
“이무기도 그게 궁금한 것 같더라고요. 본인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런 인식이 없었던 건지.”
승현은 이무기 역시 그걸 듣고 나서 행동하고 싶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꽤 곤란한 일이다. 남의 말을 들을 생각 없는, 그러나 너무 강해서 정말로 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그런 용을 상대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니.
“꽤 어려운 의뢰가 되겠네요.”
“너무 어려운가요?”
말과는 다르게, 태주는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뭐 그건 저희가 고민할 문제고 손님이 의뢰하시는 건 자유죠. 어쨌든 저희가 손님에게 맞춰야지 손님이 저희에게 맞추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게 아예 불가능하거나, 손님에게 오히려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한번 말리기는 하겠지만요.”
하지만 이번 일은 어려울 뿐 불가능은 아니고,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 잘못된 소망도 아니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 손님이 원하는 건, 용에게 잘못을 묻겠다. 그걸로 이해하면 될까요?”
“으음, 네 일단은요?”
“그럼 결론은 간단하네요.”
태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싸워서 이기면 되겠어요.”
승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