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오래된 용 (12)
“어쩐지 너무 늦는다 싶더니만.”
태주는 머리를 짚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도 두 사람이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싶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껏해야 뭐 주문이 제대로 안 된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겨우 그걸로 이렇게 늦을 리가 없잖아!”
월이는 발칵 화를 냈다.
“내가 진짜로 바보인 줄 알아?”
사실,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은 채 태주는 말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 아냐. 그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늦어서.”
태주의 말을 들은 월이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던 듯 말했다.
“큭, 맞는 말이야.”
“뭘 그렇게 분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큰일은 안 나서 다행이다. 갑자기 만난 것 치고는 잘 대처했고.”
태주의 칭찬을 들은 설이는 순순히 기뻐했지만, 월이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듯 말했다.
“하여튼, 갑자기 그런 게 나타나는 건 반칙이야!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월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밥 사러 갔는데 대체 왜 용이 거기에 있냐는 말이야!”
“뻔하지 뭐.”
태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아도 그렇고 두 사람도 그렇고. 하지만 태주는 만나지 않았다. 태주는 어디 있는지 모를 소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또 소장이겠지. 이런 우연이 두 번 있을 리 없잖아.”
이쯤 되면 너무 노골적이다. 태주는 ‘내가 한 거야, 알고 있지?’ 하고 묻는 소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주는 한숨을 살짝 쉬며 말했다. 정직한 방식의 힌트를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방해하는 사람은 아니니 이것도 제 딴에는 힌트를 주려 한 행동일 것이다. 휘말린 입장에서는 절대 곱게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생했어.”
“정말 그래.”
월이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겼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다른 햄버거집이라도 가지 그랬어?”
“뭔가 그건 또 내키지 않아서. 괜히 억울하달까. 원래 먹으려던 거랑 다른 메뉴를 먹는 건 괜찮은데, 더 못한 똑같은 걸 먹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한다구. 하여튼, 진짜 그 이상한 녀석 때문에.”
월이는 우적거리며 샌드위치를 씹었다.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침착하게 미친 녀석이 강하기까지 하면 정말, 정신이 멍해진단 말이야.”
하지만 그만큼 이상하기 때문에 그런 정신 나간 짓을 반복하면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지친 표정으로 월이를 따라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겼다.
“저희는 잠시 쉴게요….”
“그래. 고생했으니 좀 쉬어.”
태주는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본 뒤 말했다. 마음 같아서야 마음껏 쉬게 해 주고 싶지만, 잘하면 내일 바로 용과 맞서야 할 테니 분명 마음 편하게 쉬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없었으면, 이번에 몇 가지는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겠어.”
용은 태주 생각보다 조금 더 미친놈이고, 그렇기에 몇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설이는 슬쩍 웃고는 구석으로 향했다. 태주는 시아 쪽을 보고는 물었다.
“손님은요?”
“글쎄, 얼마나 더 걸릴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신경이야 쓰고 있지만, 대화 내용까지 알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요? 들어간 지 꽤 된 건 기억을 하고 있는데요.”
“글쎄, 금방 끝날 이야기는 아니니 오래 걸리는 게 정상이야.”
시아는 그렇게 말한 뒤, 다리를 쭉 뻗고는 말했다.
“게다가, 글쎄.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조언이 없기도 하니까.”
중요한 사람을 아예 잃어버리는 경험이나, 혹은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못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 시아에게는 없다.
“그런 경험이 있는 건 안쪽에 있는 둘이지.”
그러니 승현과 이무기에게 그럴듯한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옥분과 지네다.
“마침 그 둘도 한쪽은 사람이었고, 한쪽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둘 다 사람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중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냐.”
안 그래도 개인 사정에 대한 이야기다. 불필요한 사람이 끼어들어 모두 들으려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나도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듣겠지만 지금은 그런 억지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니 말이다.”
“뭐어, 그거야 어쩔 수 없죠.”
태주는 미묘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 전 단계까지는 말할 수 있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무기나 승현씨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것 말이에요. 언뜻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잖아요?”
시아는 눈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글쎄, 지금까지 본 바로는 승현씨야 별 문제가 없다."
시아의 말을 들은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원래 어느 정도는 튼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무기 쪽에는 문제가 있나 보네요.”
“당연하게도. 방금 대화를 하기 위해 들어가기 직전까지, 용의 이야기를 하고 듣는 중에도 계속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시아는 조금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무기라 말은 하지만, 그래도 새끼다. 눈앞에서 부모가 그런 이유로 죽었다 한다면, 그야 문제가 있지 않겠니?”
“뭐어, 그렇겠죠.”
너무 당연한 말이다. 태주 역시 더 할 말이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대충 어떤 감정일지 짐작은 가네요. 그래도 마음이야 알겠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하지 않다.
“그래도 오늘만 넘지는 않으면 상관은 없겠죠.”
“그래. 그리고 어차피 나도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긴 하니까.”
시아는 시계를 한번 힐끗 보고는 말했다. 시아가 할 일은, 내일 용과 만나는 과정에서 발생할 만한 변수를 조절하기 위한 사전 조율이다. 그리고 그 일은 모두 마쳤다.
“너도 지금은 시간이 남을 테니, 잠시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우리끼리 말이야.”
시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말려도 소용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말하마. 이번은, 최소한 이번만은 네가 그렇게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가 없을 거다.”
태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난처하게 웃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조금 위험한 일은 있었지. 실패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실패하면 확실히 죽는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이번에도 굳이 앞에 나서서 할 필요는 없을 게다.”
“그럴 지도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아무도 욕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려운 길을 때려치우고 쉬운 길을 택하더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당연하죠. 이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소장도 그걸 바랄걸요? 이번에도 그렇듯, 상대방을 속이는 건 제 일이에요.”
태주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속이는 것 자체는 또 이번에는 쉬운 일일 거란 말이죠.”
용을 속이는 것 자체는, 위험하긴 하겠지만 동시에 생각보다는 쉬운 일이다. 어떤 의미로는 흡혈귀보다 쉽다. 다만, 강하기 때문에 속이지 않을 뿐이다.
리스크가 무한하다면, 성공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안 하는 게 정상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설명을 들었지. 네가 하려는 게 가능성이 꽤 있다는 사실은 이해했단다.”
그러나 상대는 일종의 사상범이다. 쾌락살인과도 다르고 강도 같은 것과도 다르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미쳐있는 종류의 살해자다.
심지어 옆에 월이가 있더라도 이번에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번이 더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그런 당연한 걱정을 하는 시아를 본 태주는 결국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렇겠죠.”
태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시아의 걱정은 아주 타당하고, 심지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늘 그랬어요.”
“늘 그렇다니?”
“누나에게는 이번 일이 특히 위험한 일로 보이겠지만, 사실 제가 보기에는 흡혈귀나 용이나 다를 바 없어요. 어느 쪽이든 제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인 걸 들키면 사실상 바로 골로 가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흡혈귀와 용이 차이가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태주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어차피, 저한테는 똑같은 일이에요.”
긴장이야 늘 한다. 위험이야 늘 겪는다. 이번에도 그럴 뿐이다.
“저한테는 언제나와 같은 야바위니까요.”
용에게도 통할 만한 트릭 따위는 몇 개나 있다. 다만,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를 승현의 의견에 따라 달리해야 하기에 고민 중일 뿐이다.
시아는 물었다.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니?”
“글쎄요.”
태주는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나오든 용을 이겨낼 방법은 있어요. 자만하고, 욕심이 많은 용이라면 결국 사람 손에 쓰러지는 게 국룰이잖아요?”
“허.”
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 의견은 생각지도 않고 벌써 쓰러트릴 생각부터 하고 있었지?”
“뭐어, 늘 최악을 대비하는 게 오래가는 방법 아니겠어요?”
태주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그리고, 손님은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사람은 그런 것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말했다.
“분명히 그래요.”
* * *
“오늘도 하늘은 영 안 좋은데.”
월이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하품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차마 오늘은 그럴 수 없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아.”
두 사람은 이미 반쯤은 폐허가 된 극장의 안쪽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글쎄, 아마 오늘 안에 한번은 올걸?”
태주는 말했다. 승현이 바라는 것은 아주 명확했다. 그리고, 태주의 예상대로 이기도 했다.
“분명 오늘은 비가 올 거야.”
“예언이야?”
월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태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예언은 아니야.”
하지만, 빗나가면 곤란하다. 뭔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그래도 맞을 거야. 아마.”
“몰라. 자신 있나 봐.”
월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태주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넌 자신 없어?”
“없어.”
월이는 즉답했다. 재빠른 대답에 태주는 오히려 조금 당황했다.
“응?”
“왜?”
“아니, 솔직히 허세라도 좀 부릴 줄 알았는데.”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기에 이번에도 억지로라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월이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그런 거 부려서 뭐해? 사람이 솔직해야지. 그 전능인지 뭔지 빼면 제일 쎈 게 나타날 거라는데 대책 없이 자신이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놀라울 정도의 정론이다. 실제로 태주는 조금 놀라며 말했다.
“조금 놀랐네. 솔직히 엄청나게 허세 부릴 줄 알았는데.”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바로 솔직하게 말하는 거 은근 기분 나쁜데.”
월이는 그렇게 말한 뒤 눈을 찌푸렸다.
“왜, 자신 없어서 싫어?”
“아니.”
월이 말대로, 긴장하고 자신 없는 쪽이 정상이다. 긴장한 와중에도 조금은 웃음이 난다.
“아마, 이번에 뭐가 잘못된다면 그건 너 때문은 아닐 거야.”
이번에 월이는 딱 필요한 정도로만 쫄아있다. 생각보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필요 이상으로 쫄거나, 아니면 방심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가 예언가라도 된 줄 알아.”
“글쎄, 오늘 한 말이 다 맞으면 한번 점이라도 배워볼까?”
“난 점 같은 거 안믿어.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믿을 리가 없잖아.”
“늑대인간이 할 말은 아닌데.”
태주는 웃으며 말했다. 월이는 뭐라 반박하려다가는 곧바로 천장 쪽을 쳐다봤다.
“왔다.”
월이가 먼저 중얼거렸다. 태주는 삐딱하게 기대있던 벽에서 몸을 떼고 바르게 섰다.
“슬슬, 오나?”
노인의 형상이 뚫린 천장을 통해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착지하는 자세 같은 것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떨어졌다.
“오늘은 네가 먼저 왔구나.”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눈으로, 용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