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오래된 용 (8)
머리를 말리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니 이십 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냥 샤워만 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었겠지만, 손님 앞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을 수는 없다 보니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태주는 계단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작게 웃으며 대답한 승현의 손에 잔이 하나 들려있었다. 시아가 어떻게든 서툴게나마 커피 한 잔을 내려준 모양이다.
“오히려 생각보다 오래 안 걸리셨네요. 씻는데 시간이 더 걸릴 거라 생각했어요. 무슨 철거현장에라도 계셨던 것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셨으니까요.”
생각보다 너무나 정확한 평가다. 이게 소방관의 경험치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태주는 일단 미소로 대충 상황을 넘겼다.
“무슨 일이라, 있긴 있었죠. 용과 직접 만났으니까요.”
승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표정이다.
“용과 만났다고요? 직접이요?”
“네, 직접이요. 사실 처음은 아니죠. 저번에 저기에 있는 저분도 한 번 만난 적이야 있으니까요.”
태주는 시아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용의 등장 때문에 한번 난장판이 되었던 당시 현장에 승현 역시 있었다.
“괜찮은 건가요?”
“네, 다행히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어요. 먼지 좀 뒤집어쓰고 끝난 정도면 정말로 별 일 아닌 수준이죠.”
승현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요, 용 때문에….”
승현은 무심코 사무소를 돌아다니고 있는 새끼 이무기를 봤다.
다행히, 이무기는 월이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이쪽 이야기에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태주 역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복잡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은 이무기는 귀엽다.
잠시 넋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는 한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태주는 일부러 승현에게 물었다.
“그래도 상태는 많이 좋아지셨나 보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마음 상태요.”
처음 봤을 때보다 표정이 좋다. 이래저래, 많이 나아진 모습이 보이니 그래도 보람은 있다.
승현 역시 자각이 있는지 작게 미소지었다.
“네, 정말 그래요. 저 녀석을 만난 뒤로는 한 번도 못 봤거든요.”
“못 보셨나요?”
“네. 최소한, 지금까지는요.”
“그건 정말로 다행이네요.”
“저 녀석도 저 녀석 나름 이제는 적응한 것 같고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뿐만 아니라 이무기도 괜찮은 상태라면 최고의 상황이다. 만족스러운 반응을 본 승현은 질문을 던졌다.
“참, 질문을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혹시 저 녀석, 말할 수 있나요?”
조금 의외의 질문이다. 태주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되물었다.
“말이요? 사람처럼 하는 말 말씀이신가요?”
“네. 제 말을 알아듣는 건 확실해 보이기는 하는데요.”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하는 것 같은데, 그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이야 어리니까 안 되는 거 같은데 앞으로 어떨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으음, 글쎄요.”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조금 큰 이무기들은 사람과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기는 한데, 새끼 이무기가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긴 하네요. 일단 시간이 지나면 할 수 있기는 한 거 아닐까요? 누나! 혹시 정확히 알아요?”
시아에게도 물었지만, 갑자기 물어봐야 시아가 알 리는 없다.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이무기의 새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니 말이다!”
“그렇대요. 저도 그 이상으로는 잘 모르겠네요.”
“으음, 나중에는 가능할 것 같지만 지금은 어려운 거라고 보면 될까요?”
승현은 조금 아쉽다는 듯 말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보는 편이 좋겠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셨던 건가요?”
태주의 질문을 들은 승현은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며칠이라 해야 하나, 고작해야 이틀이 다긴 한데 아무래도 궁금해져서요.”
“궁금해져요?”
“네. 저 꼬맹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궁금하거든요.”
꼬맹이, 그 표현을 들은 태주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승현은 민망한 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게, 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본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선택하는 건 뭔가 큰 잘못 같아서요.”
“보호자시네요.”
태주는 작게 신음했다.
“으음, 어렵네요. 사실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려운걸요.”
자식도 키워본 적 없고 동물도 키워본 적 없다. 누군가의 의지를 자신이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승현은 조금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는 않은 직업이니까요. 갑자기 이렇게 어린애 하나를 맡을 줄은 몰랐단 말이죠.”
“그런가요?”
태주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마침 잘됐네요.”
“잘 돼요?”
“네. 손님한테는 애초에, 이렇게까지 이무기의 의사를 고려할 의무 같은 건 없거든요.”
애초에, 어떤 의미로는 그저 떠넘겨진 책임에 불과하다.
“처음에 드리려고 했던 질문부터 해야겠네요. 손님은 여전히 이무기가 강요한 행동에 대해 별 불만이 없나요?”
승현 본인이야 그리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무기가 한 일이 사람 입장에서 민폐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태주는 이어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이무기에 대해 대신 변명해주듯 말하기는 했어요. 물론 거짓말을 섞지는 않았어요.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기는 하죠.”
이무기는 피해자다. 용에게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손님 입장에서 그런 것까지 참아줄 필요는 없어요. 사실 손님께 이번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요.”
이무기는 용에게는 피해자지만, 승현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가해자의 입장이다.
“손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고, 정신적으로 흔들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대뜸 ‘이번에는, 네가 구할 수 있는 것’을 내밀어요.”
이건 정상적인 거래 같은 행위라 할 수 없다. 지금 승현은 일방적으로 새끼의 보호를 떠맡은 셈이다. 그것도 꽤 강제적인 방법으로.
“물론 이제 와서 보호하느냐 마느냐를 묻는 건 아니에요. 손님께는, 이런 표현이 그리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만약, 다시 한번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면 다시 또 그런 환각을 보고 말 것이다.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되는 약을, 이무기는 줘 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그럼 뭘 질문하신 건가요?”
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굉장히 바보같이 들릴 건 알지만, 용은 강해요. 조금 극단적일 정도로요. 애초에 용이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설화라기보다 신화에 가깝죠. 인지도도 높고, 아무도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도 해요. 그러니 적으로는 가장 돌리고 싶지 않은 상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네, 잘 모르는 손님이 들어도 그런 판단이 가능할 정도로, 용이라는 건 대표적이죠.”
그리고 그렇기에, 태주는 물었다.
“그 새끼를… 아니, 어감이 이상한데. 어쨌든 새끼 이무기는 그런 것에 엮여 있어요. 아직도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도와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위험하다는 말이죠.”
물론, 목숨을 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승현은 안다. 이제와 승현에게 위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려 하는 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태주가 알려줘야 할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손님에게는 의무가 없다고요.”
승현이 이 모든 일을 감수하면서 저 조그마한 것을 지킬 이유는, 냉정하게 말해 전혀 없다. 이미 억지로 떠맡은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인도적인 수준의 결정이다.
“그러니까 손님은 그 이상으로 뭔가를 더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이미 처한 상황에 비해 승현은 새끼를 지나칠 정도로 잘 챙겨주고 있다.
“그러니까, 굳이 더 이상 어려운 길을 선택할 이유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고요.”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그렇겠네요. 저도 알고 있어요.”
“표정을 보니 별로 제 말에 동의하시는 것 같지는 않네요.”
“아뇨, 동의해요, 저한테 그럴 의무 같은 게 없다는 건 확실히 동의할 수 있어요.”
의무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태주는 승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선택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제가 일방적으로 강요만 받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처음에는 승현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꽤 혼란스러운 환각까지 이무기는 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탓할 수 있겠는가.
“글쎄요, 저라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살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말이에요.”
게다가,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서 나서는 것은 원래 자신이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다.
“게다가, 피해만 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때 불을 꺼 준 것은 누구였는가. 갑자기 비가 내린 것은 누구의 덕이었는가.
“그때 내린 비를 누가 내렸는지 저는 이제 알아요.”
그 생각을 하면, 저 아이를 자신이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제가 나은 건, 물론 불 속에서 도망친 저기 저 작은 꼬맹이를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불과 싸워서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따지고 보면 은혜다. 이무기의 그 행동이 없었다면 결국 그 불은 크게 번졌을 것이다.
하루 정도의 뉴스거리가 아니라, 아마 한 달 정도 되는 그런 뉴스거리 말이다.
“저희만 있었으면 그 불을 끌 수 없었을 거예요. 누구 한 명은, 결국 거기서 큰 부상을 입었을 지도 모르죠.”
적당한 때에 온 비 덕분에 불을 끌 수 있었다. 화재의 규모를 생각하면 없는 거나 다름없는 피해다. 부상자 하나. 그것도 고작해야 스스로의 부주의로 입은 비교적 경상자 하나가 이번 화재의 사상자의 전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무기의 덕분이에요.”
“사람을 위해서 그랬던 건 아닐 텐데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가 도움받은 건 사실이니까요.”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면, 줘야 할 거라 예상치 못한 도움을 마찬가지로 줄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승현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심이신 것 같네요.”
태주는 작게 웃었다. 너무 착한 사람이라 탈이다.
정말로, 이런 사람들만 세상에 있다면 세상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태주는 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이번 일에 더 관여하시면 위험해져요. 특히나 이번 용은 더하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용일 거거든요.”
태주의 말을 들은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도 옆에서 용산역 이야기는 들었다.
“용이 강할 거라는 건 저 작은 녀석만 봐도 알 수 있었어요.”
“저게요?”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새끼 이무기 쪽을 바라봤다. 어느새 이무기나 월이나, 심지어 설이까지도 그냥 장난치고 있다.
“아직 작잖아요? 제가 본 이무기와 비교하면 정말로 말도 안 되게 조그마한 상태에요.”
“그렇죠.”
“근데, 저 작은 게 저랑 비교했을 때 힘에서 크게 밀리지 않더라고요.”
대형견의 힘 정도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고, 승현은 말했다. 물론 덩치가 있다 보니 실제로 근력측정을 하면 아직은 승현이 좀 더 강하겠지만, 저만큼 작은 게 그 정도 힘이라는 게 문제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녀석이 집안을 한번 뒤집어엎을 뻔했어요. 어설프게나마 날기도 하죠. 솔직히 제 힘으로는 붙잡지 못할 거에요. 눈앞에 뻔히 있어도 말이에요.”
고작 새끼가 이 정도 힘이다. 승현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 큰 이무기는 얼마나 강했던 걸까? 그리고 그런 이무기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도록 만든 용은 과연 얼마나 강할까?
알 수 없다. 아마 승현은 평생 그 강한 정도가 어느 정도로 강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저 꼬맹이가 바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신 거네요.”
“네.”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걸 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요.”
태주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이 납득이 간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다면, 그야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할 법도 하다.
“그래서 처음에 그런 질문을 하셨던 거네요. 으음….”
태주는 조금 고민했다. 하지만, 혼자 고민해도 의미는 없다. 태주는 곧바로 물었다.
“누나! 저번에 제가 이야기한 거, 가능해요?”
“뭐? 어떤 거?”
"그 왜, 지네한테 통역 부탁하는 거요!”
“아아, 그거?”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이야 하겠지.”
“네? 저번에 이야기한 게 뭔데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낸 설이가 끼어들어 물었다.
“무슨 이야기 말씀하시는 건가요?”
“잠깐 지네 좀 나와 달라고 해 봐.”
태주는 승현 쪽을 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손님을 해칠 일만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