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오래된 용 (4)
처음 협박을 들은 날짜에서 이틀이 지났다.
“삼 일 내로 오라고 말했던가?”
태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그리 여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한 날짜를 기준으로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다.
당연하게도, 날짜를 착각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일부러 하루 일찍 온 거다.
“거, 참.”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라고 한 장소로 가니 쓸데없이 웅장한 바람이 분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언제 소나기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다.
“바람이 센데.”
태주는 중얼거렸다. 예보 상으로는 전국이 맑은 날씨일 거라 말했는데, 이 날씨는 아무리 봐도 맑은 날은 아니다.
“이건 분명 용 때문이겠지. 자기가 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태주는 눈을 찌푸렸다.
“기상청 직원들이 고생 좀 하겠어.”
이유도 모르고 예보가 계속 빗나가고 있으니, 잘은 몰라도 좀 골치가 아플 것이다. 설마 용이 있어서 날씨가 변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겠지.
태주는 한숨을 쉬며 건물의 안으로 향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쓰여 있는 표시는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은 관계자니까.”
건물 안쪽은 불이 다 꺼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전기가 아직 완전히 끊긴 건 아닌 듯 비상구 정도는 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길을 헤맬 리는 없다.
내부 사람의 안내까지 받았던 곳이다. 길은 정확히 알고 있다.
다만, 조금 쓸쓸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름대로 열정이 있는, 활기찬 모습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던 장소다.
그랬던 장소가 이젠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당연하기는 하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이곳 사람들은 잠시 떠났다. 그러니 이곳에는 아무도 있을 수가 없다.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된 태주는 눈을 찌푸렸다.
“이것도 소장이 어느 정도 생각을 해 둔 거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지금 이 행동을, 과연 어디까지 알고 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소장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장소였을 것이다.
조금 큰 소리가 나도, 망가져도 괜찮은. 그러나 충분히 넓은 그런 장소를 소장은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관객이 넘을 마지막 문. 원래는 공연장의 입구가 되는 문이다. 그래도 은은하게, 이쪽에는 조명들이 조금 켜져 있다.
태주는 고개를 한번 좌우로 세게 털었다. 잡념을 털어내려는 것이다.
태주는 이제, 용 앞에 서야 한다. 아주 잠깐만 멈춰서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익숙한 삐걱거림과 함께 들어가자, 그곳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잠시 멈췄다.
이 장소에는 노인의 존재감이 가득하다.
새하얀 긴 수염과 틀어 올린 머리도 물론 시선을 빼앗아가는 요소 중 하나지만, 그것만이 그 노인을 돋보이게 하고 있지 않다.
노인을 눈에 띄도록 하는 건 멀리서도 보이는 그 자세와 태도다. 흔히 나이든 이에게서 느껴져야만 하는 쇠락함이 그 노인에게는 없다.
“저 무대, 한 사람의 존재감으로 그걸 다 채울 수 있는 거였나?”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저것이 그냥 사람일 리가 없다는 그런 생각이 확실히 든다.
“흐음, 하루가 이른 데다 처음 보는 놈이지만 상관없는 사람일 리는 없겠지.”
노인은, 용은 태주를 보고는 말했다.
그리 크게 말하는 것도 아닌데 이 장소 전체에 울려 퍼지는 그런 깊은 목소리다.
“내가 누군지는 알겠나?”
“네.”
태주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 용이군요.”
“그래. 역시 아는군.”
용은 웃으며 말했다. 웃었다고는 하지만 인자하거나 따듯함이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미소는 전혀 아니다. 그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차가운 미소다.
“그 여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어떻게 잘도 아는군, 감이 좋은 건가? 굳이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뇨, 아마 모르는 쪽이 감이 너무 없는 게 아닐까요?”
용의 말을 들은 태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저건 자각도 없이 저러고 있는 거다. 상대를 위축시키려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말로 평범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태주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시아는,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도 않고 그저 보면 안다는 말 정도만 했을 뿐이다.
정말로 그렇다. 애초에 용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봤더라도 태주는 이 노인이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살기나, 특별한 기운 같은 것을 느낄 필요도 없다.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아우라가 분명히 있다.
태주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눈으로는 대놓고 용의 모습을 살폈다. 경계는 하지 않는다.
조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그 하찮은 수준의 조심은 상대가 그럴 마음만 먹으면 의미가 없다.
예상대로, 용은 별 감흥이 없는 눈으로 태주를 내려다봤다.
“혼자 온 건가?”
“네.”
태주는 양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다.
“당신과 지금 싸울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용은 눈을 감고는 말했다.
“왜 혼자 왔지? 나는 분명히 흡혈귀를 잡은 녀석을 데리고 오라 말했는데.”
용은 느긋하게 말했다.
“나를 얕봤을 리는 없을 테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용의 저 말투는 그저,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이상하기에 묻는 그런 담담한 말투이기 때문이다.
흡혈귀에게서 느꼈던 부자연스러움이나 거추장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괜히 용은 아니라는 건가. 태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혼자 온 이유가 뭐지? 혼자 오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나?”
“비슷합니다. 혼자 오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정도는 했죠. 이번에 저는 일종의 사절 같은 거라서요. 내일 본격적으로 방문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어서.”
“사전교섭이라도 하러 왔다는 말인가?”
용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그리 기분이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은, 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절 비슷한 역할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일단 질문 몇 가지를 드리고 싶어서요.”
“질문?”
용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질문이라고?”
“네.”
“흐음.”
노인은 눈을 뜨고는 무대 위에서 높게 뛰었다. 무대 위에서 아래쪽, 그러니까 태주가 서 있는 의자 사이의 복도 쪽으로 뛰어내렸지만, 발이 땅에 닿는 일은 없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우.”
이미 노인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거대한 머리와 날카로운 뿔과 이빨, 그리고 길게 늘어진 수염이 보인다.
온몸은 노란색과 초록색 그사이 어딘가에 속하는 색으로 된 비늘에 덮여 있고, 네 개의 발에는 사람 머리보다 더 커 보이는 발톱이 각자 네 개씩 보인다.
흔히 말하는 동양적인 용의 모습에서, 조금 더 사납고 날카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런 각 부분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전부 감안하더라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그 크기다. 일자로 쭉 선다면, 아마 꼬리는 바닥에 닿고 머리는 천장에 닿고도 남을 것이다.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거리가 조금 멀어진다면, 아마 지금 이 거리에서 몇십 미터 정도 뒤로 가면 한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엄청난데.”
이 정도로 거대하다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무섭기 이전에,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게 진짜 판타지지….”
장엄하기까지 하다. 늘 평범하지 않은 이런 것을 봐 오는 사람에게도 특별히 엄청난 것은 있는 법이다.
늘 여행을 하며 다양한 것을 보는 사람도, 그랜드 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것을 보면 특별히 느끼는 것은 있는 법이다.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태주의 앞에서 용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하나 물으마.”
용은, 깊은 굴속에서 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그런 으르렁거림이 섞인 목소리다.
“네가 질문을 해도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아니면, 교섭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이라도 한 건가? 혹여 사신으로 오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나? 그것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유의미한 규칙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니다. 인간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으니.”
태주는 눈을 조금 찌푸렸다. 이쯤 되면 월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용은 지금 기분이 나쁘다.
“아니요. 사신으로 온다면 멀쩡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용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주를 쳐다봤다.
“당연하지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사람의 관습을 지키는 데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굳이 해치지 않는 것과 나를 귀찮게 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지.”
용은 위협하듯 말했다. 그저 아마 꼬리로 취급되는 것 같은 부분을 조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온 사방이 망가지고 있다.
낡은 의자들이 사방으로 튀고, 철거하지 않은 일부 조명들이 깨진다. 안 그래도 어두운 장소가, 조금 더 어두워졌다.
흩날리는 파편들 속에서, 태주는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말해봐라.”
용은 그 태도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물었다.
“딱 한 번의 기회를 주마. 내가 널 해치지 않을 이유가 있나?”
한 번이라, 생각보다 후하다. 태주는 작게 웃었다.
“해치지 않을 이유라, 사실 그건 당신의 기분에 달렸을 뿐이니까 무의미한 내용이네요. 이러니저러니 합리적인 이유를 대도, 그걸로 당신의 기분이 상하면 전 결국 끝이니까요.”
태주는 대담하게 말했다.
“해치지 않을 이유는, 그러니까 전혀 없는 셈이죠.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뭐가 있다는 말이지?”
“교섭의 여지요.”
태주는 그렇게 말한 뒤 용을 쳐다봤다.
“당신도 인정하겠죠. 당신은 충성심이 높지 않아요. 아예 없는 건지, 있기는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흡혈귀보다 충성심이 높아 보이지는 않아요. 다른 원하는 게 있다는 말이죠.
본인 말에 따르면 전능의 밑에 있기는 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이 원하는 것에 그대로 따르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게다가, 딱히 흡혈귀의 복수를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태주는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랬다면, 누나는 그때 죽었겠죠.”
그러나 시아는 죽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상대에게는 그럴 의지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소장을 자기가 데리고 있다고 협박을 한다는 것 자체도 원하는 건 따로 있다는 말이고요.”
태주는 당당하게, 용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면, 소장을 그냥 그대로 들고 그 전능에게 가면 됐어요. 정 그게 어렵다면, 연락해서 그걸 이쪽으로 오게 하거나.”
하지만 용은 그중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한 것은 소장을 데리고 있다며 시아에게 협박을 하는 것 정도다.
“그래서 당신은 교섭의 여지가 있는 존재예요.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죠.”
용이 사람이 없을 법한 장소를 잘 알아서 이런 곳으로 불렀을 리는 없다. 소장이 알려주지 않고는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장소다.
소장 역시, 용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용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확실히 있다. 태주는 조금 안심하고 말했다.
“제가 아직 안 죽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