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불길 속 무언가 (18)
빌딩의 숲이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장소다.
한쪽에는 다 낡은 상가들이 있다. 건물도 낮고, 후줄근한 모습이다.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반쯤 비어있는 상가들이 있고, 이제는 대체 누가 보는가 싶은 오래된 불법 복제 DVD를 파는 장소가 있다.
상가의 끝자락 구석에는 컨테이너가 잔뜩 놓여 있고 목장갑을 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이렇게만 들으면 아주 낡아버리기만 한 그런 장소 같지만, 그 바로 옆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커다란 역이 하나 있다.
게다가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쇼핑몰과 붙어있기도 하다. 이 상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고작 도로 하나. 그것도 넓지도 않은 평범한 차선의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구역은 마치 완전히 다른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높이 세워진 한 호텔의 옥상에 두 남자가 서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노인이다.
머리도 하얗게 세고, 수염도 하얗다. 심지어 나라를 특별히 특정하기 어려운 종류의 오래된 복장을 하고 있기도 하니 더 그렇게 보인다.
외양만 보고는 이것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동양 쪽 어떤 나라의 노인이라는 것과 자세히 보면 꽤 건장한 몸이라는 것뿐이다.
바람이 분다. 마치 도사처럼 생긴 노인은 조금 길게 자란 수염을 휘날리며 말했다.
“화려하군, 반대쪽과는 전혀 달라.”
노인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지금 서 있는 호텔의 외벽에 있는 네온의 색이 계속해서 바뀌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붉은색에서 보랏빛을 향해서, 그리고 다시 하얀색에서 붉은색으로.
“…그 녀석이라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군. 여러모로 화려한 것에 집착하던 녀석이었으니 말이야. 화려한 것에 대한 갈망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우월감을 뽐내는 걸 참으로 좋아하는 녀석이었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한번 휘 둘러봤다.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어. 물론 취향만큼은 결정적일 정도로 나와 맞지 않았지. 나에게 외견상의 화려함이라는 것은 이래저래 무의미하기에.”
노인의 시선에는 아주 조금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슬픔까지는 아니다. 그저, 그렇게 끝날 줄 몰랐을 뿐이다.
“별 것 아니었어. 생각보다 더 못난 녀석이던데.”
바람에 섞여 들려오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노인은 눈썹을 살짝 꿈틀대고는 말했다.
“그래, 그리 감상에 젖은 건 아니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네가 아무리 초를 치더라도 그리 불쾌하지는 않다는 말이지.”
노인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무례함에는 관대한 편이니 말이야. 주관적인 평가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동의는 할 수 있을 게야.”
“어이쿠, 관대하셔라.”
“그래, 그런 정도의 말로 화를 내지는 않아. 이렇게 오래 살면서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런 값싼 말 따위에 일희일비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는 게 있지.“
노인은, 그러나 전혀 인자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긴 삶에서 느끼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면, 기다림이 그리 길어서 좋을 건 없다는 점이야.”
노인은 아주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나는 기다림에는 관대하지 않아. 이 나이가 되고 나면 아끼다 써먹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거든. 게다가, 이미 꽤 오랜 기간을 기다렸으니 말이야. 자네는 혹시 나이가 많은 이들이 모두 기다림에 관대하다는 생각을 하는 겐가?”
“그럴리가.”
소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기다림에 관대하다는 생각이야, 뭐 당연히 안 하지. 나는 너를 대강은 아는걸. 그 녀석 때문에 다른 것들처럼 그리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소장은 느긋하게 말했다. 노인은 그 느긋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소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나? 내가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그저 은근한 압박감을 줄 뿐이다. 문제는, 그 압박감에 실제로 물리적인 영향력이 있다는 점이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다. 근처의 벌레들은 피하고, 분명히 무생물일 전깃불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네온사인 전체가 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소장은 그저 웃었다.
“오, 이게 그 살기인가? 제대로 느껴본 건 처음 같은데. 피부가 찌릿한걸. 역시 아는 것과 경험하는 건 차이가 있긴 있어.”
여러모로 무협지 같은 녀석이라고, 소장은 오히려 낄낄거렸다. 당연히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노인은 이쯤 되면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널 해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겐가? 그 여자 때문에? 나는 충성하지 않는다. 그냥 더 큰 힘에 따를 뿐이지.”
“물론 해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뭐, 그 녀석 때문은 아니겠지만.”
소장은 그렇게 말한 뒤 노인을 마주 보며 말했다. 진지하지는 않은 눈이지만, 절대로 겁먹은 눈이 아니다.
“네가 기다림에 관대하지 않다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소장은 그렇게 말하며 노인을 쳐다봤다.
“오히려 철저하고, 잔인하지. 굳이 거기서 새끼까지 죽이려 들고 말이야.”
“그걸 알면서도 잘도 건방지게 있지 않나.”
“당연하지.”
그 낮은 으르렁거림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면서, 소장은 웃었다.
“관대하지 않더라도 기다릴 필요성 정도는 그 나이 먹었으면 알 거 아냐? 피차 원하는 걸 뻔히 알면서, 괜히 그렇게 꼬장 피워 봐야 약속한 시간이 더 빨라지지 않아.”
“내가 질려서 약속을 어긴다 해도? 그렇게 굴 건가?”
협박하듯 노인은 말했지만, 소장은 역으로 배짱을 부렸다.
“어디 해 보시지, 머리를 날리든, 심장을 찌르든, 뭐 맘대로 해. 죽진 않겠지만 완벽하게 무력화될걸?”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짓이다. 소장은 웃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를 가져다 바쳐야겠지.”
“짜증 나는 녀석.”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게 더 짜증이 난다. 노인은 소장을 더 압박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저런 태도로 나오는 상대를 압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러니 해야 할 것은 하나의 선언뿐이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기다려 보기로 하지.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고 있으니까.”
노인은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그대로 걸었다.
“허나 만약, 그 모든 준비가 다 끝났는데 그게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면.”
난간 앞에서 그대로 멈춘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때는 감당할 수 있겠나?”
무슨 일을 할지,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다는 종류의 협박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뭘 하든 사람이 감당할 수는 없을 텐데?“
빈말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런 진중한 말투다. 하지만 여전히, 소장은 너스레를 떨 뿐이다.
“감당이야 뭐, 내가 할 일이 아니지. 나는 이번에 중립이라고, 중립. 그러고 나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
“중립이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떴다.
“알기는 알았지만, 자네도 참 특이한 종류의 인간이야.”
“글쎄, 여기까지 와서 보면 내가 인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소장은 조금은 씁쓸하게,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의심할 필요는 없어. 심지어는, 나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우린 서로 기다리기나 할 수밖에 없다고.”
소장은 그렇게 말한 뒤, 노인에게 겁도 없이 물었다.
“그러니, 시간이나 때우자고. 걔는 요즘 뭐 하고 지내냐? 흡혈귀는 대답을 안 해 주던데.”
* * *
“이유는 아래층에 있어요.”
알쏭달쏭한 말이다. 승현은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태주는 그저 웃으며 내려가 보면 안다는 말만을 했다.
하지만, 내려가는 도중에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충돌음…?”
승현은 눈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태주는 표정이 굳었다.
“평범한 충돌음치고는 좀 큰데요.”
승현의 말대로다. 지금 들리는 것은 단순한 충돌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소리다.
이건 말 그대로 뭔가 완전히 개박살이 나는 소리다.
“앗! 이 녀석! 도망치지 마! 차라리 맞서 싸우라구!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소리를 들으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조금 알 것 같다. 태주는 이마를 짚은 채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미치겠네, 진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승현은 눈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승현은 어느새 사고 현장에 들어온 소방관의 눈이 되었다.
“음, 소리는 크지만 아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닐 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몸을 긴장시키실 필요는 없어요.”
물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태주도 아직 모른다.
“대충 어떤 종류의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것 같거든요.“
아마도 월이겠지.
태주는 손님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입술을 조금 비죽거리며 문을 열어었다.
위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다 듣고 있었을 텐데, 그러니 이제 곧 내려올 때가 되었다는 걸 듣고 있었을 텐데, 왜 또 이렇게 소란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문을 열자, 태주의 예상대로 책상과 의자 몇 개가 복구도 불가능할 정도로 제대로 망가져 있다.
그리고, 월이는 잔뜩 독기를 품은 채 흉흉한 눈을 한 채다.
“순순히 잡히란 말이야!
“왜 또 이 꼴이야? 뒤에 손님도 계신데.”
태주는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누나는 어디 있고?”
설이가 조금 쭈뼛거리다 대답했다.
“으으 아뇨, 잠시 생각할 게 있다고 혼자 밖에 나갔는데요. 뭐랄까 지금 이 꼴은 그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아하, 하….”
설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태주는 곧바로 월이 쪽을 쳐다보고는 물었다. 잘 모르겠으면, 굳이 이상한 추리를 할 필요는 없다.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일만 생기면 나부터 의심하는 건 그만해! 이번엔 내 잘못 아니란 말야!”
“진짜기는 해요.”
“‘기’는 빼 ‘기’는! 괜히 거짓말 같잖아!”
월이가 와락 소리쳤다. 하지만 둘이서 어떻게 말하든 지금 이 꼴이 정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는 없다.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
“그럼, 이 책상과 의자는? 여기 이렇게 의자랑 책상을 박살낼 수 있는 게 너 말고 더 있어?”
“아냐! 지네 걔도 가능은 하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래서 지금 지네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는 거야 뭐야?”
태주는 차분하게, 억지를 부리는 월이를 내려다봤다.
“그! 뭐냐, 물론 그건 아니긴 한데.”
월이는 그렇게 큰 소리를 냈다가, 그 변명은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부순 거긴 한데 이번엔 진짜 내 탓 아냐! 저 도마뱀 녀석이 도망을 계속 친다고!”
“도마뱀이라니.”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이제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월이는 크게 소리쳤다.
“저게 계속 밖으로 탈출하려고 하잖아! 어떻게든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월이는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시선을 어느 한 곳에서 떼고 있지 않았다. 태주는 그 방향을 바라봤다.
“저쪽?”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에 모습을 숨긴 ‘그게’ 있는 건가. 태주는 물었다.
“지금 저쪽에 있는 거야?”
“그래. 저기 있어. 무슨 경계심 많은 고양이 상대하는 것 같더라.”
월이는 질린 듯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도망을 가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간다. 오히려, 정말로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아니, 당연하잖아. 자고 일어났더니 엄청 쎈 게 눈앞에 있으면 그야 바로 도망가지 않을까?”
“그렇지?”
딱히 칭찬은 아니었는데. 월이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 듯 슬쩍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히 이번에는 잘못 판단한 건 아닌 모양인데.”
“앗!”
설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리고, 승현 역시 당황했다.
“도망쳤어요!”
“어디로? 밖으로?”
잠시 눈을 뗀 그 새, 어디 바깥으로 도망가 버린 걸까 싶어 태주는 당황했다. 하지만 설이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뇨! 손님 주머니 속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