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16)
“내 최고의 계획이!”
“고백에 최고의 계획같은 거 세워봐야 뭐가 되겠어요?”
태주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고백에 있어 성대한 계획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받아줄지 말지는 원래 상대 맘 아닌가.
“그래도! 최소한! 이것보다는 나았겠죠! 무슨 짓이야 이게에에에!”
여우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는 일어났다.
“저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가면 안 돼요.”
태주는 웃었고, 여우는 천천히 오른쪽을 돌아봤다.
“뭘 봐?”
지금까지 월이는 빵을 먹으면서도 시선만은 단 한 번도 여우에게서 떼지 않았다.
“나 아무 짓도 안 해? 도망만 안 가면?”
여우는 일이 크게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처음 봉인당했을 때와 같은, 그런 기분.
“어차피 늦었잖아요. 이야기 좀 더 듣고 가시죠?”
태주는 웃었다.
“마침 이번엔 제가 알아서 보수를 받아 오라고 소장이 그러더라고요.”
원래대로라면, 이번 보수는 세열에게 받아야 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거 아무리 봐도 세열 씨한테 뭔가 받아내려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이곳에는 유도 아닌 유도를 당해서 왔으니, 그 사람에게 보수를 전부 내라고 하는 것은 강매에 가깝다.
“아예 안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분한테는 푼돈 정도만 받기로 했으니까요. 아직은 내부 결정이지만.”
그러니 나머지는 네가 내라는 표정으로 태주는 능글맞게 웃었다.
“그거 얼마나 하는데요! 내면 되잖아요, 내면!”
“얼마나 하느냐, 인가요?”
태주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그럼 넘겨주시죠?”
“뭘요?”
“구슬요.”
여우는 딱딱하게 굳었다.
“…구슬?”
믿을 수 없는 걸 들었다는 듯한 태도다. 태주는 웃었다.
“네, 구슬이요. 여우구슬 말이에요.”
지금이야 여우와 여정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지만, 처음 만났을 때 여우는 분명히 완전히 여정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돌려주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하지만 돌려받을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아직 여우가 여정을 믿지 않았던 그때, 과연 여우는 진짜를 넘겼을 것인가.
그랬을 리가 없다.
“지금이야 정말로 넘겨줘도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을 리 없죠.”
“미쳤어, 미쳤어!”
여우는 기가 막힌다는 태도로 말했다.
“미친 거 아니에요? 지금 이거 하나 해 주면서 구슬을 달라구요? 협박 아니에요?”
“협박이면 어쩌시게요?”
태주는 웃었다.
“어떻게 할 수나 있으시겠어요?”
여우는 외통수를 당한 듯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사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뭐, 세상 사람들이 다 착하진 않으니까요.”
태주는 그렇게 말한 뒤, 당근을 하나 내밀기로 했다. 애초에 받기만 할 생각은 없다.
이전에 여우가 조금의 속임수는 썼지만 줄 것을 줬듯, 태주 역시 줄 것은 줄 생각이다.
“이거, 받아요.”
갈색 대봉투다. 여우는 이게 뭔가 싶어 물었다.
“뭔데요?”
“당신이 가장 원하는 거요. 우리 소장한테 미리 받았죠.”
의심스러운 눈을 하는 여우를 본 태주는 씩 웃었다.
“강매하려고 했으면 강매를 당할 생각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 * *
“근데 이거 우리가 뭔가 해야 할 수준의 일이었어?”
여우가 자리를 비운 뒤, 월이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름 재미야 있었는데, 이전에 사람이 죽네 마네 하는 이야기 하다가 이런 사소한 일이나 하니까 뭔가 밸런스가 이상해.”
불만 아닌 불만을 표하는 월이를 보고 태주는 웃었다.
“차라리 이게 낫지. 뭐가 좀 잘못되어 봐야 고백이 성공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좀 더 낫지 않을까?”
“당연히 나도 사람이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월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사람 돕는 느낌이 아니라서.”
크림 묻은 손으로 빵을 먹던 월이는 그 손 그대로 볼을 긁적이다가 자기 손가락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태주는 살짝 한숨을 쉬며 옆에서 티슈 하나를 꺼내 넘겼다.
“손에 묻은 건 좀 닦지?”
“또 묻을 거라서.”
“볼에 묻히지나 말던가…. 어쨌든 확실히 평소 같지 않은 이야기긴 하지. 이번 손님은 크게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야.”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처럼 가지고 온 여우 때문에 조금 일이 이상하게 진행됐을 뿐, 큰 문제라 할 만한 건 없었다.
“세열 씨에게 문제가 없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 찾아올 정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어.”
누구나 한 번쯤 겪고, 또 누구나 극복하는 그런 일. 세열은 결코 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여우가 꼬아 놓은 부분만 풀어주면 그쪽 문제는 알아서 해결되겠지.”
그저 여동생과 한번,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
“그래서 그 정도만 했어. 조금 괘씸해서 좀 더 크게 엿먹인 느낌도 있지만.”
“괘씸하다고?”
“응. 여우가 원하는 걸,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한 거지.”
“원하는 거?”
월이는 갸웃거렸다.
“원치 않았던 걸 원치 않은 타이밍에 한 게 아니고?”
“아냐. 여우는 처음부터 사실을 들키려 했거든.”
“응?”
월이는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를 띄웠다. 태주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여우의 계획은 세열 씨와 여동생이 만나기만 해도 바로 들켜. 그러니까, 조금 오해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다라는 말이야.”
여우가 세운 계획은 의도를 마지막까지 숨기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네? 왜 그런 짓을 했대?”
“뭐, 흔들다리 효과도 노릴 겸, 자기가 확실히 무해하다는 어필도 할 겸 그랬겠지.”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세열은 깜짝 놀라겠지만, 사실 별일 아니다. 그 낙차를 이용한 틈에 뭔가 해 보려고 했던 게 여우의 계획일 것이다.
“뭐, 일단 분위기를 만들고 나면 자신이 있다는 그런 생각 아니었을까?”
별로 관심은 없다. 그게 자만인지, 혹은 진짜로 유의미한 방법인지는 태주는 정확히 모른다.
“근데 솔직히 아무리 심심했다지만 이용만 당하고 있자니 좀 짜증났거든.”
그래서 도움을 주되,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는 주지 않기로 했다.
태주가 말없이 그 두 사람에게 그 대화 내용을 전달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하긴, 아까 이야기 듣고 황당하긴 했어.”
월이는 그렇게 말한 뒤 태주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둘이 어떻게 될까? 좀 망하기는 했어도 고백은 어쨌든 한 거 아냐? 받아줄까?”
월이는 궁금은 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야 뭐, 나도 모르지.”
“잘 찍는다고 인증도 받았는데, 한번 찍어 보면?”
“찍어 보라고?”
월이의 말에 태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생각하기엔 나쁘지 않은 주제다.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받아주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세열 씨 취향 문제겠지만.”
“오? 왜?”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월이는 물었다.
“나라면 날 속인 놈을 가만히 안 둘 텐데?”
“속였다고는 해도 귀여운 수준이잖아? 너도 당하면 잠깐 화내겠지만 결국은 그냥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지. 그렇지 않아?”
태주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솔직히,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 중에 가장 별 볼 일 없는 사건이다.
“그래도 뭔가 기분은 나쁠 거 같은데.”
“물론 그래. 하지만 의외로 사람은 속았더라도 피해를 안 봤다면 관대해지기도 해서.”
심지어는 의도가 크게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생각보다 호의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
“게다가 여동생에게는 도움이 된 사람… 은 아니고 여우인 데다, 일단 자기 좋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자신을 속이려 했던 것도, 그저 있을 곳을 마련하고자 했다는 꽤 동정심을 살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그 이전에 취향에 안 맞는 게 있다거나 하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어쨌든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긴 한데.”
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는 덧붙였다.
“뭐, 잘 됐으면 좋겠네.”
조금 장난을 치기는 했어도 여우가 꽤 진심이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우구슬, 결국은 준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월이마저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뭐, 저걸 넘겨주고 나면 평범한 사람처럼 될 테니까. 아쉽긴 하겠지.”
지금처럼 대단한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있을 곳이 있다면, 여우에게 다른 잡다한 능력들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
있을 곳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신분과 비교하자면 결국 그 구슬은 쓸모가 크게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 여우에게 이 거래는 받아들이지 않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거래였다는 말이다.
“싫은 티 팍팍 내긴 했어도 사실 마지막까지 챙길 건 챙긴 셈이야.”
조금은 얼빵하게 당해서 불리한 거래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원래 계획만 조금 망가졌을 뿐이고 여우는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
원했던 타이밍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더 좋은 걸 얻을 수 있었으니까.
“애초에 구슬은, 계륵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지.”
“계륵이 뭐야?”
“닭의 갈비… 닭갈비 말하는 거 아니다? 어쨌든 먹기에는 애매하고 안 먹자니 아깝다는 건데.”
어쨌든 그걸로 요즘 세상에 별 대단한 건 할 수 없을 테니, 넘겨주고 신분씩이나 되는 걸 받는다면 충분히 이득이다.
“그런 거 넘겨주고 확실하게 맛있는 걸 챙겨간 셈이니까.”
괜히 여우 같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며 태주는 웃었다.
“어우, 세상 피곤하게 사네.”
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여우 본연의 모습이니까.”
일부러 그렇게 하려면 참 피곤하겠지만,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좀이 쑤신다.
“어떻게 보면 세열 씨가 한 말 그대로 한 것이기도 하고.”
굳이 자신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여우가 그렇게 바랐던 말이 아니었을까.
“멋있는 얼굴로 그런 멘트를 치면 반할 만도 하겠지.”
“…난 모르겠어.”
월이는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조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 * *
“어라, 이건 또.”
다음 날 점심을 넘어서, 조금 늦은 시간대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진짜시네요?”
“진짜요?”
“앗, 아뇨.”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세열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태주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여우를 먼저 만나버렸다 보니.”
“아, 그 이야기셨나요?”
처음 보지만, 여정임이 확실해 보이는 손님은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제가 진짜예요.”
그리 소극적이지는 않은, 그러나 여우가 보여준 것처럼 조금 과할 정도로 활기차지는 않은 그런 느낌의 차분한 여성이다.
“아무래도 제 친구기도 하고, 제 오빠기도 하니까요. 제가 대신 왔어요. 두 사람은 여기 또 오기 좀 부담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부담스럽다니요?”
“그 난리를 피워 놓고 별거 아닌 일이라 얼굴 보기 부끄러운 거겠죠.”
태주는 어쩔 수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손님 앞에서 대놓고 웃지 않고 싶지만,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별 거 아닌 일이라 다행이죠.”
여정은 틀린 말은 아니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영수증 금액만큼만 내면 된다구요?”
“네. 18만 7000원이요.”
“생각보단 얼마 안 하네요?”
“뭐, 여우한테 받을 건 따로 받아서요.”
“아, 이야기는 들었어요. 대신 진짜 신분이 생겼다던데요? 혹시 이거 거기에 필요했던 돈인가요? 생각보다 저렴하네요.”
빵값이라는 걸 모르고 그냥 뭔가 수상한 금액이라 생각한다면, 사실 싸게도 보인다. 태주는 그 비밀은 말하지 않고 그냥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비밀이에요.”
태주는 그렇게 대답한 뒤, 질문했다.
“그런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태주는 여우가 신분을 얻어내고, 도망치듯 자리를 비운 것까지밖에 모른다.
“어떻게 되긴요? 그 바보가 우리 오빠한테 울면서 고백하고, 뭐 그렇게 됐죠.”
“울었다고요?”
“의도하고 운 거겠죠. 오빠 안 보이는 데서 저한테 엄지손가락 날리던데요?”
감탄스러운 수준이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짚었다.
“대단하네요.”
“대단하죠.”
여정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 네.”
태주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오빠분이 고백은 받아 주셨나요?”
“아, 으음~”
여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걔, 제 말은 잘 들어야 할걸요?”
“거참.”
아무래도 눈앞의 손님이 여우의 영향을 세게 받긴 받았나 보다. 태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다음이야기*
“아니, 귀신의 일인데도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노인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중년의 무당은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해결이야… 할 수도 있겠지.”
나이가 들었음에도 선이 곱다. 젊은 시절에는 꽤 아름다웠을 그 무당은 살짝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약간은 안타깝다는 말투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이야.”
“못이든 안이든 그건 모르겠고, 자네가 해결 못 하면 대체 세상에 누가 해결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믿음을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지 않겠나.”
무당은 감은 눈을 뜨고는 말했다.
“…딸에게 부탁해 보지.”
“딸? 나한테는 전에 그 일 때려치웠다고 하지 않았나?”
노인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당이 이전에 술 먹고 하소연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당은 눈을 조금 찌푸리고는 말했다.
“팔자가 어디 가겠나. 결국, 비슷한 일을 하고 있긴 하더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무당은 황망한 노인의 얼굴을 뒤로하고는 말했다.
“피는 못 속이는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