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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전문 사무소-132화 (132/269)

132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15)

태주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여우가 뭔가 소리를 치려 하는 것 같은 기색을 마지막으로 해서 전화는 끊어졌다.

당연히 전화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듣고 있었다.

“전화 끊어졌네.”

“저거 또 제 꾀에 당했네.”

“또라고?”

“쟤가 잔머리는 좋은데 가끔 바보짓을 하거든.”

여정의 말을 들은 세열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던 건지 가장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모두 들었다.

“바보라.”

“바보야. 머리는 좋지만. 방심 때문이라 해야 하나? 한가지 목표에 집중하면 시야가 약간 좁아지는 면이 있거든.”

그러나 그런 모습이야말로 여정이 아는 여우 모습 그대로다. 여정은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도 정말로, 큰 도움이 된 친구야.”

“친구…구나.”

세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나니 정말로 나쁜 친구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좋은 친구를 만났네.”

여정이 한참 전, 세열이 입대하기 전에 했던 걱정은 그렇게 간단히도 해결되어 있었다.

“정말 극복했구나.”

“그래, 뭐 그럴 수 있게 해 준 좋은 친구긴 하지. 방금 일 같은 걸 미리 말 안 해준 건 나도 좀 어처구니가 없긴 한데.”

여정은 목 뒤를 살짝 긁으며 말했다.

“나 몰래 내가 자취하는 걸 알게 만들고 싶었단 말이지?”

조금 찌푸린 표정이다. 솔직히 말해서 가장 날벼락을 맞은 사람은 여정이나 마찬가지다.

“아예 몰랐어?”

세열의 질문에 여정은 잠시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충 눈치 정도는 채고 있었지.”

“무슨 눈치?”

“쟤가 오빠 좋아하는 거? 그리고 곧 뭔가 하겠구나 싶었던 거?”

본인 앞에서 말하는 것도 조금 기분은 이상하지만, 하고 여정은 덧붙였다.

“그런 분위기 풀풀 풍기고 있었거든.”

세열의 휴가 때, 여우는 한번 여정을 대신해서 세열과 맥주 한 캔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게 여우였다고?”

“그래. 아마 그게 처음 만난 거였을 걸? 그때 이후로 엄청 오빠 칭찬을 하더라. 자신의 심금을 울리는 말을 하네 어쩌네 하면서.”

당시 세열이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에 여우는 감동받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나게 바삐 움직이더라고. 그런데 그게 티가 안 날 리가 있어?”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자취방 마련 계획에 자기 자신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되어서는, 결국 정말로 자취방을 하나 마련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여우의 태도변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거라고 여정은 말했다.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행동이 바뀌면 엄청나게 티가 나잖아.”

그래서 알았다고 여정은 밝혔다.

“아마 내가 여기 살고, 자기가 거기 살면 오빠랑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속셈 아니었을까?”

“그럼 그걸 알면서 나한테는 말을 안 했다고?”

세열은 조금 서운한 표정이 되었다.

“엥? 어떻게 말을 해? 우연히 여우를 도왔다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 여우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하라고? 퍽이나 믿었겠다.”

그건 여정 입장에서도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애초에 사람이라도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그냥 막 전하기 어렵잖아.”

“자취 시작한 것 정도는 말해주지.”

세열은 그래도 조금 아쉬워서 말했다. 부모님에게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자신에게는 말해 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알았다면 부모님께 어떻게든 같이 허락을 받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거나 할 수는 있었을 텐데.

“이러면 나한테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아니, 그것도 말하려면 여우의 정체를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말하다 보니 조금 궁색하다. 여정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구.”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세열도 그냥 아쉬워서 던져 본 말이다. 세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도 의외네.”

“뭐가?”

여정은 의아하다는 말투를 했다.

“옛날에는 아마 생각은 해도 실행에 못 옮겼을 텐데.”

“혼자라면 정말 그랬겠지. 여우 하는 거 보고 나도 같이 자극받아서 열심히 살았으니까.”

여정은 그렇기에 화를 낼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나 몰래 여기까지 일을 진행한 건 듣다 보니 조금 빡쳤는데, 그래도 나 대신 뒤통수 쎄게 한 번 때려준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야.”

여정에게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근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실패했네.”

“역시나 실패라니?”

“그런 거 있잖아.”

여정이 조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일이 끝나면 고백할 거야! 같은 말이 성공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서. 오빠 전역하고 나면 바로 어떻게든 해 볼 것처럼 굴더니,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나서 한 일이라는 게 이 정도 일이라니. 이게 뭐야?”

여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가 나 만나서 처음에 물었지? 뭘 하려는 지 아냐고?”

세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하려는 게 있다는 건 알았어. 이렇게 이상하게 할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아마 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했다면 지금보다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여정은 덧붙였지만, 이제 와서는 늦은 일이다.

“그나저나, 오빠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이거 일단은 고백받은 거잖아.”

“아?”

세열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본인이 직접 말한 건 아니긴 해도 결국 이젠 다 들었잖아?”

비밀로 하려던 것이나, 조금은 숨겨줄까 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전부 까발려졌다.

“그러면 오빠도 대답 정도는 준비해 둬야 하는 상황인 거 아냐?”

“어, 너무 갑작스러운데?”

“원래 이런 게 다 갑작스럽지. 사랑은 갑자기 시작하는 거라는데? 그러니까 정석이라는 게 없고 모두가 특별한 거야.”

“…너 연애도 시작했냐?”

설마 이것도 뒤처졌나 하는 생각에 세열은 질문했지만, 여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몇 년 전에 읽은 순정만화 대사였어. 그래도 연애만화니까 대충 들어맞지 않을까? 작가든 작가 친구든 경험담 같은 거 아냐?”

여정은 당당하게 그런 소리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지만, 뭔가 그럴듯한 말이다.

“그래서 어쩔 거야? 고백은 받아 줄 거야 말거야?”

“어….”

세열은 머리를 짚었다. 사랑은 갑자기 시작한다는 말이 맞을지 몰라도 고백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좀 당황스럽다.

게다가 애초에 진짜 고백이 아니기도 하다. 그걸 변명 삼아 세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몰라 나도.”

* * *

아주 먼 옛날, 봉인당하기도 한참 이전부터 여우는 사람을 좋아했다.

보고 있으면 재미있기도 하고, 자신들과 속고 속이는 관계로 남아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 사람과 깊은 관계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곁에서 잠시 노닥거리다 도망칠 수는 있었다.

다른 여우들은 말 그대로 잡아먹는 게 취향인 경우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여우에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악랄한 짓은 영 별로다.

“수행이나 해 볼까?”

그러나 하다 보니 이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하늘 위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사실 가봐야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다.

“거긴 사람이 없잖아. 잘생긴 사람은 더 없을 거고….”

그래서 여우는 수행자의 명함 정도만 유지한 채로 그냥 그렇게 살았다. 생각보다 자유롭고, 만족스러웠다.

누군가를 해칠 필요도 없고, 괜히 고생할 필요도 없다. 사람에게서 너무 멀어지지만 않은 채로 여우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즐기고 싶은 대로 즐겼다.

돌이켜 보면 그래도 꽤 유쾌한 삶이었다.

조금 사람들 틈에 섞여서 시간을 보내다가, 의심을 사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배척당할 낌새가 보인다면 도망친다.

처음 몇 번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다 보니 이게 익숙해진다.

어차피 사람의 마을은 많다. 정을 크게 붙이지만 않으면, 계속 돌아다닐 각오만 하면 꽤 괜찮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실수 없이 살 수는 없었다.

“불쌍한 척해도 안 봐준다. 불여시년.”

여우를 붙잡은 무당은 꽤 영험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손쉽게 붙잡혀 버리고 말 줄이야. 여우는 당황했다.

“방심했구나. 하지만 잡히면 끝이지. 아쉽게 됐구나.”

무당의 말투를 들은 여우는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나, 나 지금까지 엄청 나쁜 짓은 안 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몇백 년이나 산 것의 몸에 잔혹함이 배어있지 않으니 말이다.”

무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럼! 나 놔줘도 되는 거 아냐!…에요?”

여우는 재빨리 무당의 표정을 보고는 존댓말로 고쳤다.

“나 정말로 그리 나쁜 요괴 아닌데? 한 번만 봐 주면 안 돼…요?”

“싫어.”

무당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엑! 왜!”

여우는 부당하다면서 소리쳤지만, 무당은 완고했다.

여우는 혀를 내둘렀다.

일부러 이렇게 바보같이 굴고 있는 동안에도 상대는 전혀 방심하지 않는다. 빠져나갈 구멍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건 진짜배기다. 제 잘난맛에 사는 어설픈 뜨내기를 골탕 먹인 적은 꽤 많았지만, 이만큼 궁지에 몰린 적이 없다.

“사람들 목숨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다치게 하는 것도 아냐. 조금, 사는데 필요한 것들만을 챙긴 뒤로는 그리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결국은 무당에게 사정 봐 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잘 통하지 않았다.

“뭐, 요괴는 사람의 적이지. 굳이 이유가 없어도 그 퇴치가 내 업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긴 한데.”

무당의 말에 여우는 눈을 찌푸렸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일단 다른 사람들한테는 사악한 여우요괴를 퇴치한다고 말은 해놨지만 너는 사악하지도 않고 내겐 널 아예 퇴치해버릴 생각도 없으니까.”

“뭐?”

무당의 말을 들은 여우는 눈을 빛냈다.

“적당한 봉인이다. 그 이상으로는 정말로 봐 줄 생각이 없으니, 거기서 만족해.”

하지만 무당의 말에 여우는 다시 죽은 눈이 됐다.

“혹시 그냥 봉인 한 척하고 놔주는 건?”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봐주는 것임은 확실하지만, 하는 김에 그 정도는 해 줘도 되지 않은가. 못 먹을 감이라도 찔러나 보는 심정으로 여우는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답변은 가관이었다.

“사실은 내가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그렇게 해 줬을지도 모른다.”

“어?”

너무나도 의외의 말이다. 여우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런데, 저번에 네가 꼬리친 그 사람이 나도 좀 맘에 들어서 말이다.”

“…뭐?”

“그러니까 대충 50년 정도. 아니, 넉넉하게 60년이 낫겠군? 그 뒤에 풀려날 수 있도록 안배해 두마.”

“야!!!”

그렇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여우는 봉인당했다.

정신적인 팔짱을 끼면서, 여우는 상황을 복기했다. 애초에 생각 정도밖에는 할 게 없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

“다음에 나가면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나가면 다른 사람과 너무 가까워지지는 말아야지.”

“방심하지 말아야지.”

그러나 그 생각을 실현하려는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근데 60년은 훨씬 넘은 거 같은데?”

나갈 수 없다. 봉인은 실제로 약해졌으나, 본인도 그만큼 약해져 버렸다.

“얼빠진 년 아냐 이거!”

하지만 그렇게 욕해 봐야 그 얼빠진 년한테 잡힌 건 자신이다. 제 얼굴에 침 뱉기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우는 갇혀 있었다. 이백 년은 안 된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할 때쯤, 우연히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났다.

“도와줘!”

* * *

여정을 만난 지 몇 달이나 지났을 때였다. 방 안에서 편하게 누워있던 여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엥?”

생각해 보니 안에서 다짐했던 것들이 하나도 지켜지고 있지 않다.

“나 지금 한 곳에 엄청 오래 있고, 사람이랑 가깝고, 방심 엄청나게 하고 있는데??”

잠시 생각하던 여우는 머리를 조금 긁적거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인정할 때도 됐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좋은 사람이야.”

신뢰받고 있다. 여우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일이다.

늘 의심받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계획은 모두 무의미해졌으나,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이다.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지금의 이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근데 좀 한가한데.”

“한가해?”

같은 방에 있던 여정이 여우에게 물었다.

“어? 음, 조금? 이젠 내가 도와줄 일도 별로 없고.”

여우는 벌러덩 누워서 말했다. 여정은 저런 하는 표정을 짓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할 일 없으면 우리 오빠 나 대신 한번 만나보던가. 궁금하지 않아?”

“오빠분들? 이미 자주 봤잖아?”

“일 번이랑 이 번 말고. 삼 번. 아직 못 봤지? 사실 나랑 제일 친했던 오빠인데.”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도 있었댔지?”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곧 휴가라는데?”

“그럼 한번 만나보지 뭐.”

별생각 없이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의 이번 계획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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