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14)
“처음엔 다른 이유가 더 있나 의심했어요.”
처음에 여우가 세열에게 의심을 샀을 때,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부러 티를 내서 자신의 있을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우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바로 세열이 여우를 크게 의심하는 것이다.
만약 세열이 작정하고 여우를 몰아내려 했다면, 결국 여우는 물러나야만 하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수할 필요 없는 위험을 대체 왜 감수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 보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한 가지 떠오르더라고요.”
다른 어떤 거대한 음모의 한 축 같은 것이 아니다.
“남자가 봐도 세열 씨는 훈훈해요. 전역하고 머리가 그 모양인데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죠. 대화를 해보니까 성격도 유쾌하고 좋더라고요.”
전역 직후의 방황, 망설임과 의심같은 것이 조금 있지만, 사소한 문제다.
“그런 사람이 가족들을 아끼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그 가족에 슬그머니 껴있는 여우가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겠죠.”
태주의 말에 여우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그런데, 관계의 진전은 불가능해요.”
“응? 왜? 그냥 꼬시면 되잖아. 옛날이야기 들어보면 여우 저거 남자 잘만 꼬시던데.”
월이는 이전에 무용담처럼 풀어놓은 여러 이야기를 들은 터라, 여우가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안 될 만한 이유가 있어?”
“안되지. 지금 이대로는 안 돼.”
태주는 웃었다.
“여우가 아무리 전문가라도 이건 불가능해.”
“왜? 엄청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
“차라리 길 가다 만난 사람이었다면 정말 손쉽게 구워삶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여우는 세열을 제대로 ‘꼬실’ 수가 없다.
“하지만 오빠랑은 연애할 수가 없잖아?”
“아?”
월이는 갑작스럽게 상상치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지금 여우와 세열의 관계는 남매다. 이도 저도 못하는 여우 입장에서는 속이 타는 일이다. 자신이 반해버린 남자가 신 포도였던 셈이다.
“뭐, 의붓남매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매는 남매지. 결국,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는 될 수 없었단 말이야.”
자극적인 로맨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여우는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적극적으로 세열에게 도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
월이는 조금 경악한 목소리를 했다.
“그거 혹시 근,으웁!”
태주는 적당한 크기의 빵을 월이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자, 조금 위험수위의 발언은 거기까지. 여우는 진짜 여동생이 아니니까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세열이 여우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세열 씨의 여동생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거고.”
여우의 안전한 울타리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만 거다.
“자칫 했다가 여정 씨와 세열 씨의 오해를 살까 두려웠겠지. 여우는 그래서 세열 씨를 우리에게 보낸 거야.”
월이는 입안에 들어온 빵을 꾸역꾸역 삼킨 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그러니까.”
월이는 여우를 쳐다봤다.
“큐피드로 쓰려고 했단 말이야?”
“정확해.”
정말로 별 것 아닌, 그저 자신의 연애 사업을 위해서 이용해 먹은 거다.
“전날에 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가 어떤 분위기의 장소인지 철저하게 파악하고 갔어. 뭐, 아무리 여우라도 원래는 사무소를 찾을 수 없었겠지만.”
아마 그 부분은 소장이 재미 삼아 낄낄대며 알 수 있도록 해 준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우는 적당해 보이는 장소를 찾았어.”
옛날처럼 크게 사나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고,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무턱대고 해치우지 않고, 사람을 돕는 것을 우선하게 할 만한 곳.
사무소야말로,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기 가장 무난한 곳이다.
“남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 주면서, 자기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증명해 줄 곳이었던 거지.”
그러니 목숨을 거는 계약을 하는 걸 위험하다 여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 증명을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까.
여우에게 지금 상황은 꽤 위험했지만, 동시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잘 하면 최고의 친구와 좋은 연인을 손에 넣고, 가족이 된다. 망한다면, 그 모두를 잃는다.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친구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 그 둘 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결벽적일 정도로 올바른 여우여야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여동생분을 돌려보내고 싶었겠죠.”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여우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여정 씨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거 같긴 하네요.”
착한 척이라면 착한 척이다. 하지만 그런 걸 굳이 사악한 행위라고 할 만큼 태주가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여우는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자금 문제 해결은 대부분 당신이 했다지만, 그 신분이나 기타 등등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동생분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도 있고요.”
여우는 절대로 여정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말한 부분에 틀린 점은 없나 보네요.”
태주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동안, 여우는 제대로 된 반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같이 남의 비밀 털어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굴었을 텐데.”
여우는 한껏 찌푸린 눈이 되었다. 거의 눈으로 욕을 하는 듯한 시선이다.
“그런데 하는 말 들어보면 저를 그리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 거잖아요. 왜 저를 굳이 지금 붙잡은 거예요?”
여우는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뭐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세열 씨가 보이는 곳에 계속 있었어요. 지금도 혹시 몰라서 따라가려고 했는데, 굳이 제가 더 따라가지 못하게 막았잖아요.”
그랬다. 태주는 일부러 여우가 세열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렇죠.”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당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거랑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건 다른 문제라서요.”
아무리 여우의 술수 때문에 이번 일을 시작한 거라고는 해도 이 일은 분명히 해야 할 일이다.
“당신이 하는 일에 악의가 없다지만, 세열 씨에게 이 사건은 꽤 혼란스러운 상황이잖아요?”
그러니 여우를 잠시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엑! 왜요?! 나쁜 짓은 안 했는데요!”
여우는 당황해 말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했죠.”
그러나 조금 배려가 모자랐다.
“당신 덕분에 여정 씨가 2년 새 많이 변했죠? 그 2년을 지켜보지 못한 세열 씨에게는 여정 씨의 변화가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에요.”
군대에 다녀와서, 제대로 바깥에 적응하는 과정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갑자기 여동생이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세열의 의심을 사는 것은 분명히 여우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겠지만, 동시에 세열에겐 꽤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손님은 여동생을 찾아 달라고, 그리고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말했어요.”
“어, 그렇게 부탁을 했어요?”
의뢰에서 세열의 생각은 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네. 정말로 여동생분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진심 어린 걱정이다. 그건 가족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 사람의 장점을 드러내는 부분이지만 동시에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있는 고민보다, 그 부분을 먼저 우선해야 할 만큼.
“그런데 그건 오해죠. 동생분은 스스로 선택해서 독립했어요.”
세열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전과 달라진 여동생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그러니 최소한 지금은 두 사람이 알아서 이야기를 좀 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당신은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연애 상담 비슷한 것이나 하게 된 건지.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이기적이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여우가 조금 성급했기 때문에 세열은 엄청나게 불안을 겪어야 했다.
여우는 조금 샐쭉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박하지 않았다. 본인도 조금 마음이 급했다는 자각은 당연히 있었다.
그저 여우는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천천히 그저 기회를 놓치고 있을 뿐인 것 같아서, 본인이 망가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떠넘겨 버리고 말았다.
여우는 별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 이런 방법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구요.”
“그랬군요.”
“네?”
한소리 더 들을 줄 알았던 여우는 조금 당황했다.
“더 뭐라고 한소리 안 해요?”
“제가 할 소리는 아니라서.”
태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래서, 뭐. 저희도 전에 쓴 계약서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이미 도와드렸어요.”
이런 걸 왜 내미는 건가 싶었던 여우는 화면에 있는 숫자를 읽을 수 있었다.
“53분…32초…?”
통화 시간을 본 여우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사고가 멈췄다. 태주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미 도와드렸다고요.”
아무리 여우라도, 이런 방법을 눈치챌 수는 없다. 처음 당하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 당한다.
이런 종류의 기술을 괴담 속의 존재들은 늘 간과하는 편이니까.
“아주 작은 전자파 소음이야 주의한다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 한들 아주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카페에서 그런 소리를 구분해서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대상이 옆에 있다면 더더욱.
“월이 표현이 적당하네요. 큐피드라.”
원래 신화에서도 막무가내인 어린아이다. 그 화살은 결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쏴주지 않는다.
사랑의 전달자임과 동시에 막나가는 신이라, 꽤 재미있는 일 아닌가. 태주도 같은 일을 하려고 했으니.
“우리를 큐피드로 쓰려고 했다면, 감수하셔야죠?”
상대가 사소한 장난을 한다면, 맞받아쳐 주는 것이다.
“짜잔, 대신해드렸답니다?”
정신을 아직 제대로 차리지 못한 여우는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뭘요?”
“하고 싶었던 거요. 고백이었던 거잖아요?”
여우에 대한 조금 자세한 분석과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가에 대한 추론을, 왜 굳이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 했는가.
자세히 상황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둘이서 듣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다면 더 좋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너무 불안했던 거잖아요? 그래서 본인 없는 곳에서 솔직하게 모두 말할 수 있게 만들어 드렸어요.”
여우는 드디어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대신해드릴게요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기대. 이미 본인도 상황을 이해했음에도 여우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네, 대신했어요.”
태주는 웃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짜잔?”
일부러 양팔을 구연동화를 하듯 벌리면서, 태주는 웃었다. 당연히 열받으라고 하는 짓이다.
여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이거 미친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