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12)
세열은 조심스럽게 눈앞의 주소를 확인했다.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 보는 장소에, 처음 방문하는 집이다. 조심스러울 수밖에는 없다.
“아니, 아니지.”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그 이유가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 사소한 문제다. 세열이 망설이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저 여동생을 만나는 것이 조금 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처음 세열은 너무나도 달라진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여동생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그래서 그게 정말로 다른 사람, 아니 여우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
세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은 정말로 자신을 극복했고, 변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는 여동생이 아무도 모르게 자취를 시작해 버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세열은 놀라고 당황했다.
여자 혼자 산다는 그런 보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 사실 자체가 놀라웠을 뿐이다.
“독립이라….”
물론 여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금전적으로도, 가족을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래서 그 부분은 여우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식보다는 훨씬 쉽고 간편하다고 해도, 어쨌든 해냈다.
“정말로 성공했구나.”
자신이 했던 그 허접한 조언을 듣고는 정말로 여동생은 성장해 버렸다.
세열은 그게 조금 적응하기 힘들었다.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어떤 의미로는 가족들의 말이 정확했는지도 모른다.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망설임이 생긴다.
“이젠 입장이 바뀐 걸까?”
지금까지 세열은 명백히 오빠였다. 한 살 차이라고 해도 세열은 여정이 가야 할 길을 먼저 겪어본 선배였다.
가족이 된 이후, 항상 세열은 조언자였고, 여정은 도움을 받기만 하던 동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열은 동생보다 뒤쳐진 채다. 그 2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나 길었다.
“그 새 이런 차이가 났나.”
전역한 직후, 세열은 그런 생각을 했다. 부대 안에서의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리 긴 시간만은 아니었다고. 물론 삼십 초 만에 그 생각을 철회했지만.
확실한 건 그 시간은 여동생에게 일 년가량 역전당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방금 방문한 학교에서, 세열은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세열은 반년 정도 학교에 다니고 군대로 갔다. 아직 개론도 다 듣지 못했고, 이전에 듣던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여동생은 어느새 2학년이다. 학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뒤처진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하고 세열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열은 집 앞에서 있었다. 여우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아는 여동생은 이미 그곳에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공포인지, 망설임인지 모를 마음이 뒤섞인 채 세열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동생의 목소리다. 그래도 이건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목소리다.
“나야.”
“나가 누구야?”
“나 셋째인데?”
세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어? 어어?? 세열오빠라고?”
잠시 후 안에서는 뒤집힌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간신히 문이 열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여정을 보며 세열은 조금 미소지었다.
“앗, 하하… 여긴 어떻게 알고…?”
당황한 표정에, 숨기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피하는 시선.
“여전하구나.”
세열은 자신이 방금까지 하던 고민이 아주 바보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령 자신이 조금 뒤처지더라도, 이 녀석은 여전히 동생이구나 싶었다.
“여전하다니?”
“너 내 동생이라고.”
“무슨 말이래? 어, 근데 진짜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혹시 다른 가족들도 알아?”
엄청나게 쫄아 있는 모습. 이전에 많이 봤던 모습이다. 세열은 살짝 웃었다.
“하하. 아니 아직은 나만. 근데 나 계속 여기 서 있어야 해?”
“일단 들어와.”
여정은 정신이 없는 듯 허둥지둥했다. 그 모습이 당황한 기억 속의 여동생과 같았다.
“근데 혹시 여우… 만났어?”
여동생은 먼저 그 사실을 물었다. 세열은 작게 웃었다.
“그래. 아직 여우 직접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근데 여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뭐, 뭐가?”
세열은 태주에게 들은 질문을 던졌다.
“여우가 나한테 뭘 하려는지 알아?”
“어, 하. 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와.”
세열은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는 더럽게 못 하는 걸 보니 넌 내 진짜 여동생이 맞구나.”
“…이런.”
여동생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지금 들통나서는 안 될 것을 걸려 버린 것 같은 그런 표정.
“좀 이야기나 할까?”
“어어, 무슨 이야기…?”
“그냥 이야기. 오랜만에.”
* * *
“역시 남이 내린 게 맛있네.”
태주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여유로운 태도다. 커피는 사 먹는 것이라는 진리를, 태주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걸 커피머신을 사기 전에 깨달아야 했는데.
태주의 느긋한 태도에 여우가 분통이 터진 듯 말했다.
“맛이야 있겠죠! 비싼 곳에 왔으니까!”
여우는 화를 냈지만, 태주는 실실 웃을 뿐이다.
“그 정도는 사준다는 말을 했으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죠?”
“그래요, 솔직히 커피 한 잔? 괜찮아요. 가장 비싼 원두로 시켰어도 어쨌든 한 잔이니까.”
여우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저건 예상 밖이라구요! 안 그래도 돈 아껴 쓰는데!”
월이는 입맛을 다시며 접시에 빵을 종류별로 하나씩 담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음료수는 비슷비슷하게 다 먹어본 적 있지만, 빵은 사무소에서 구울 수가 없으니 이번 기회에 다 맛보려는 듯싶다.
“커피 한 잔 산다고 말했지, 빵 하나씩 사준다는 말은 안 했다고요!”
여우는 월이의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커피 말고 다른 거 먹어도 되냐고 했을 때 된다면서요. 그럼 본인한테 항의하세요.”
“다 알면서 진짜!”
차마 월이에게 직접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여우는 아주 크지는 않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더 나빠!”
태주는 살살 웃었다.
“뭐, 거짓말은 하지 않고 속인 걸 이 정도로 퉁치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원래대로라면 저희, 화내도 될 것 같은 입장인데.”
여우는 순간적으로 굳었다. 태주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한 번 더 커피를 홀짝였다.
여우는 이쪽을 이용하려고 했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 자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우가 한 일은 약간은 반칙에 가깝다.
“일방적으로 자기한테 유리하게 상황을 풀어가려고 했잖아요?”
거짓말은 하지 않고 상황을 좋게 만드는 것이 여우의 목표였다. 태주가 여우에 대해 잘 몰랐다면, 그리고 그런 종류의 방법을 이전에 여러 번 써보지 않았다면 속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신의 속내는 다 들켰단 말이에요. 괜히 정중한 척을 하거나, 푼수 짓을 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 들킨 김에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하자고요.”
여우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는데 화 안 내요?”
“차라리 미리 말했으면 하는 정도의 생각은 있지만, 사실 누구나 그 정도 생각은 하겠죠. 사람이나 여우나 자기 유리한 대로 상황 풀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래서 이 정도로 넘어가잖아요?”
“내 십만 원….”
아마 더 나올 것 같은데. 그러나 태주는 그 말을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여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받아들였다.
“그럼 그걸로 더 뭐라 하기 없기에요?”
“그거 가지고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할게요. 얻어먹는 게 있으니.”
이 정도면 무난한 거래 아니겠냐며 태주는 씩 웃었다.
“와! 빵 개많아!”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여우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걸 본 태주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죠.”
* * *
“음음,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월이는 하나만 들고 오기도 꽤 어려울 것 같은 쟁반을 두 개나 들고 왔다. 저쯤 되면 기예에 가깝다.
“재주도 좋다?”
태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칭찬은 아니었지만, 월이는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내가 균형감각은 원래 좀 좋아.”
뿌듯한 미소를 짓는 월이를 본 여우는 조금 슬픈 눈이 되었다. 여우가 상정한 십만 원은커녕 그 두 배쯤 되어 보이는 양이다.
“진짜로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온 거야?”
“응. 맛없어 보이는 건 빼고 가져오려고 했는데, 그런 건 없더라고.”
월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맨 위에 있는 크림 가득한 빵 하나를 집어 바로 베어 물었다.
“억지로 다 먹지는 말고.”
“뭐? 다 먹으면 안 돼? 어차피 포장해서 가 봐야 아무도 없잖아?”
“당연히 다 먹어도 되긴 해. 그냥 무리하지 말란 말이야.”
양이 양이다 보니 한마디 했지만 월이가 듣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월이는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이상한 눈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태주도 하고 보니 이상한 말이라 그냥 머리를 한번 긁적이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너무 별걱정을 다 했네. 어쨌든, 빵 먹는 동안 이야기를 좀 시작해 볼까.”
“…아무래도 억울해서 안 되겠어요, 저도 몇 개 먹을래요.”
갑작스런 큰 지출이 그리도 억울했던 걸까, 여우는 가장 달달해 보이는 빵으로 손을 뻗으려다 월이 눈치를 봤다.
“…저도 먹어도 되는 거죠?”
“뭐, 그러시던가?”
월이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낸 것은 여우인데 어째서인지 입장이 뒤집혀 있다.
태주는 그걸 무심코 지켜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뭐야, 갑자기 다들 먹는 분위기야?”
원래는 이야기를 시작할까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바보 같은 기분이 든다.
“너도 먹던가?”
“아니, 난 별로 배 안 고픈데.”
애초에 태주는 이런 디저트 계열의 빵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그럼 이야기나 하면 되는 거 아냐?”
월이는 그새 다음 빵을 집어 들며 이야기했다.
“원래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아니 이런 분위기는 예상외라고.”
태주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생각했다.
“하긴, 안 될 건 없나?”
빵더미 앞이라도 아무렴 어떤가 생각이 든 태주는 그냥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바보같은 종류의 사건이다.
“그럼, 일단 여우 요괴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부터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그러시든지.”
월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빵을 한번 크게 베어 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빵 많이 들고 와서 다행이네.”
여우는 몰래 눈을 흘기고는 말했다.
“여우에 대해 여우 본인 앞에서 이야기한다니, 자신이 꽤 있나 봐요?”
“뭐, 진짜 전문가라 하기엔 민망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말할 자신감이야 있죠.”
자기 판단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 남을 제대로 도울 수는 없는 법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여우에 대해 모르고서는 설명이 안 되니까요.”
태주의 말에 여우도 조금 궁금하기는 했는지 질문했다.
“그래서, 당신이 보기엔 여우가 어떤 건데요? 막 나쁘다거나 한가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이렇게 앉아있지는 않겠죠.”
아직도 여우에게는 악의가 없다. 그게 태주가 이렇게 장난스럽고, 유하게 대하는 이유다.
“여우 요괴는 있을 곳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들이에요.”
여우는 사실 그냥 그런 것뿐이라고, 태주는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여우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듣겠죠. 제가 종합해서 결론 내린 거니까.”
그러나 확실하다. 태주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이번에 자신이 있을 장소를 만들고 싶었던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