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9)
월이는 내려오자마자 세열이 있자 흠칫했다.
“엑? 왜 벌써 와?”
버릇없어 보이는 말투지만, 본인이 저렇게 당황해서야 그런 말을 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세열은 쓴웃음을 지었고, 태주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휴, 너도 좀 일찍 일어나고 그래라. 아무리 쉬는 날이지만 너무 게으른 거 아냐?”
태주의 핀잔에 월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니, 저분이 너무 일찍 온 거라구!”
월이는 그렇게 말한 뒤 이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쪼르르 내려와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말했다.
“엥, 근데 여우는 어디 가고? 여우도 오는 거 아냐?”
여우 이야기를 듣자 세열은 진짜 오나 싶어 문 쪽을 쳐다봤다. 태주는 살짝 웃었다.
“아니, 안 오겠지. 오더라도 최소한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문 쪽은 안 보고 계셔도 될 거에요.”
다시 보겠다고는 했어도 시간을 정하지 않은 약속이니 그렇게밖에는 짐작할 수 없다.
“어제 손님 얼굴 보기 민망하다고 주장하면서 상황을 뻔히 보면서 나타나지 않은 게 여우거든요. 그런데도 지금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잖아요?”
“그렇겠네요. 어쨌든, 그렇다면 저희는 뭘 해야 하죠?”
“여동생을 찾으시는 게 목적이라고 하셨으니까, 어제 여우가 알려준 곳으로 가야 하겠죠.”
“정말 그곳에 있을까요?”
“여우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요.”
세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태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바로 거기로 가진 않을 거예요. 아마 오늘 일을 마무리 지을 때나 되어야 거기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요?”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여동생께 어떤 문제가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세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오늘도 여우 이야기만 잔뜩 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씀하셨죠.”
“네. 지금 여우와 여동생분의 자리를 원래대로 바꾸지 않는 건 여동생분의 의지에요. 여우가 여동생분이 거절한 이유를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일부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쳐도 그 부분만은 여전히 사실이에요.”
그러니 여우의 말대로라면 여동생을 찾는다 해도, 여동생은 여전히 여우와 자리를 바꾸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세열은 여우가 제시한 이유를 믿지 않았다. 가족이 보기에 그런 이유는 말도 안 된다는 판단을 태주는 부정할 수 없었다. 태주는 여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그러나, 여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명백했다.
“여우는 최소한 자기 의지로 그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었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여우는 꽤 진심이에요.”
“그건….”
세열은 말하고 싶은 것은 있으나 결국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세열 역시 여우가 목숨을 담보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찾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죠.”
“여동생을 만나신다 쳐도, 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면 결국은 저흰 여동생을 다시 데리고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한 가지만 같이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확인이요?”
세열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무슨 확인이요?”
“아, 별건 아니고.”
태주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가정 내에 문제는 없으시다 하셨잖아요?”
“그랬죠.”
최소한 겉보기에는 확실히 없었다.
“그럼 다른 쪽은 어떨까요?”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다른 곳에 문제가 있는 것이 뻔하다.
“학교생활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도 포함해서요.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데, 가족들은 아무런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겠죠? 혹시 동생분이 아르바이트 같은 건 하시나요?”
“한다고는 들었어요. 대충만 듣기는 했는데.”
세열은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한 듯 말했다.
“그게 어디더라?”
“그건 천천히 떠올려 주세요. 일단 다른 부분부터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어차피 운전하다 보면 시간은 널널하다.
“학교생활도 잘 하고 계신다고요.”
“네, 그것도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어떻게 잘 하고 있었나요?”
“장학금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성적도 높고.”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열은 황급히 덧붙였다.
“근데 자세히는 몰라요. 진짜로 방금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군대에 가 계신 동안 있었던 일이니 당연히 자세히는 모르실 수밖에 없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니 그 이상으로 알 리가 없다.
“그럼 직접 가보지 않으면 어렵겠네요.”
“가서 볼 게 있을까요?”
세열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중고등학교처럼 빡빡한 보안 수준은 아니더라도 대학교 역시 다른 사람들이 가 봐야 볼 수 있는 것은 외관 정도가 다다. 태주는 웃었다.
“그 여우가 알려준 장소는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니까요. 그냥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태주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주의 말에 세열은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가보죠, 뭐. 저도 방문은 처음이네요.”
* * *
“생각보다 엄청 머네.”
차에서 내린 월이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 사무소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 걸렸나?”
태주는 월이를 어처구니 없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근데, 네가 그런 말 해도 되냐? 잠만 자놓고?”
“아, 왜. 중간에 깼는데도 도착 안 해서 다시 잤으니까 나도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얼마나 먼 지 대충 감이 온다구.”
월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사무소 사람들끼리만 있을 때 그러는 거야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그러는 모습은 솔직히 영 보기 좋지 않다.
태주는 조수석 예절에 대해 나중에 가르쳐야 하나 싶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너는 다음에 보자.”
“그래도 진짜 멀긴 멀었네요.”
세열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저도 사실 찾아가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혹시, 손님이 사는 곳에서 출발하면 더 가까운가요?”
태주는 세열의 집 주소를 모른다. 혹시 그 집에서 출발하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까 싶었던 태주는 질문했다.
“한 시간 반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 아니에요. 제가 사는 곳에서 출발하면 시간이 더 걸려요. 왕복으로 하면 다섯 시간 걸린다는 것 같던데요?”
태주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 다섯 시간이지, 거기에 쓰는 시간이 하루에 다섯 시간이면 일주일이면 25시간이다.
일주일 중 하루가 넘는 시간을 통학에 온전히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수강신청 때마다 하루씩 비우긴 한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일주일에 20시간이네요.”
여전히 적은 시간이 아니다. 끔찍한 체력 소모가 있겠다 싶어 태주는 질린 눈이 되었다.
“동생분이 차는 없으셨죠?”
“없죠. 면허는 땄다고 하던데요. 차가 없으니 사실 크게 의미는 없죠.”
“하긴, 면허가 있어도 차를 직접 가지는 건 운전 연습도 그렇고 비용도 그렇고… 좀 복잡하죠.”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중교통이면 통학이 엄청 힘들었겠네요. 안 그래도 1호선 라인인데.”
“그러게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네요.”
고생깨나 했겠구나 싶어 세열 역시 눈을 찌푸렸다.
“차를 얻어타고 온 저도 이럴 정도인데.”
세 사람은 천천히 캠퍼스 안으로 향했다. 월이는 이런 학교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 눈을 크게 떴다.
“와, 근데 진짜 크다. 그래서 대학교인가?”
월이는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건물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래서 대학교 맞지?”
“크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실제로 규모가 되게 작은 대학교도 있는 걸로 아는데.”
서울 안에 있는 한 대학교는 조금 큰 고등학교보다 작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다. 태주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대체로 크긴 하지. 대학교라는 게 아무래도 그냥 학교이기만 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하네. 그럼 이 학교는 큰 편이야? 작은 건 아니지?”
이런 질문을 들으니 월이가 또래의 학생처럼 보인다. 태주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글쎄, 대학교 중에서는 그렇게 드문 수준의 크기는 아닌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중간 정도 아닐까?”
태주의 말을 들은 월이는 경악했다.
“진짜? 이런 줄 알았으면 저번에 학교에서 견학 간다고 할 때 가볼걸!”
어차피 진학할 생각이 없으니 가보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싶어 그냥 땡땡이 쳤었다.
“생각보다 구경하는 맛이 있네.”
월이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뭐, 심심하면 잠깐 돌아보고 오던가.”
“뭐? 진짜?”
월이는 흥미가 생긴 듯 태주를 쳐다봤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너 사실 뭐 할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잖아?”
“어….”
사실 그랬다. 월이는 시선을 피했다. 누구와 싸워야 해서 온 게 아니고 그냥 혼자 남기 싫다고 따라온 거라 월이는 이번에 정말로 별로 할 일이 없다.
“이번엔 그리 위험한 일도 아니니까. 정해진 시간까지 정문으로 돌아와. 길 잃고 그러진 말고.”
태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월이는 좋다고 저 멀리 달려갔다.
설령 길을 잃더라도 사실 중간중간에 길 안내가 붙어있으니 적당히 정문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다.
“저 친구는 잠시 견학하라고 내버려 두죠. 지금은 할 일이 없으니까요.”
“상관은 없는데… 저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뭐죠?”
세열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학과 사무실을 한번 방문해 보려고요.”
“네?”
세열은 당황했다.
“어떻게요?”
“어떻게 하긴요, 그냥 가면 되는 거죠. 동생분이 어느 학과인지는 아시죠?”
“아니, 설마 그걸 모르지야 않죠…. 그런데 용건이 없잖아요?”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과 사무실에 가봐야 민폐이기만 한 거 아닌가 싶어 세열은 주저했다.
“용건이야 만들면 상관없죠. 애초에 뭘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여동생분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러 가는 거니까요.”
여우의 말마따나, 여동생이 두루두루 인기가 좋은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만 대도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이다.
“적당히, 한번 찔러 보면 되겠죠. 용건은… 그냥 혹시 여동생이 학교에 들러서 뭐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라면 큰 민폐는 아니다. 혹시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그럴만한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저희가 뭔가를 착각했다고 하면 되니까요.”
“그게 먹힐까요?”
“의외로 먹혀요.”
태주는 살짝 웃었다. 의외로 사람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라는 애매한 말로도 쉽게 마음을 연다.
“게다가, 정 애매하면 방금 그 친구 이름이라도 팔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