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8)
“여우 이야기 하고 있었어?”
태주가 이야기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소장이 나타났다.
“어라, 간만이네요. 별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전혀. 그냥 심심해서 온 거야.”
소장은 늘 짓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소장님은 늘 심심해서 왔다고 하시잖아요?”
태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야. 그냥 심심해서 내려온 것뿐이라고. 네 예상대로 이번 일이 별일은 아니거든.”
소장은 그렇게 말한 뒤 덧붙였다.
“하지만 별일 아닌 일이라도 재미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야. 사실, 별 것 아닌 일들이 대부분 재미있는 법이라고.”
“그거야 뭐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요.”
너무 진지한 일은 재미로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 ‘심심풀이’로 접근하기는 나쁘지 않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이 대놓고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이번 일은 아주 심각한 종류의 사건은 아닌 모양이다.
“뭐, 그래. 최소한 이번 일에 실패한다고 누가 죽거나 다칠 일은 없지.”
소장은 웃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네가 직접 바깥에 한 번쯤 나가는 게 편하긴 할 거야. 그편이 빠르니까.”
태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월이가 당황해서는 소리쳤다.
“어, 진짜요!? 저 혼자 여기 있으라구요?!”
솔직히 말해서, 월이 혼자 있을 때 누군가가 온다면 별 도움은 안 될 거다.
혼자서 이것저것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월이가 남을 파악하는 능력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소장은 월이의 당황한 태도를 보고는 낄낄 웃었다.
“뭐 이상한 걱정 하고 있냐? 그럼 너도 나가. 내가 있으면 되지 뭐 문제 있어?”
“어? 아니, 그럼 괜찮긴 한데요….”
월이는 민망한 듯 몸이 축 처졌다. 소장은 살짝 웃더니 말했다.
“오랜만에 나도 앉아 있지 뭐.”
“소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고요?!”
“뭐, 그러고 싶은 날도 있는 거지. 내일 오전에 손님 오면 둘이 같이 나가 봐. 내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오- 그럼 사양 않고 나가 볼게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좀이 쑤시고 있던 차다.
“그래, 너무 일찍 들어오지는 말고.”
소장은 웃었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을 좀 즐겨 보고 싶으니까 말이야.”
“여기서 혼자 뭐 할 게 있어요?”
월이의 질문에 소장은 피식 웃었다.
“그거, 꼭 알고 싶은 질문이야?”
“으악! 아니거든요!”
* * *
다음날, 세열은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소를 찾아왔다.
“와, 엄청 빨리도 오셨네.”
문자를 보자마자 출발하지 않고서는 이런 시간에 도착할 수도 없다. 심지어 바로 위에 살고 있는 월이보다도 빨리 온 걸 보니 대단하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시나 봐요.”
세열은 태주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부터 던졌다.
“그런데 여우를 만나셨다고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가짜 여동생 행세를 하고 있던 본인을 그대로 만날 수 있었어요. 그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까지 일찍 오신 걸 보면 그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무리 태주가 아침 일찍부터 문자를 줬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달려오는 것은 정상적인 속도가 아니다.
“어제, 여동생이— 아니죠. 어쨌든 그 가짜조차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요.”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면서 세열은 말했다.
“물론, 그게 가짜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 와서 걱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러나 도저히 신경이 쓰여 오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세열은 말했다.
태주는 미소지었다.
“아니에요, 걱정하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을 아낀다는 말이니까요. 우스운 일은 아니죠.”
별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동생 걱정에 바로 달려왔다는 말이라면 오히려 보기 좋은 일이다. 태주는 살짝 웃었다.
“좋은 오빠시네요.”
태주의 말에 세열은 잠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어쨌든 모습이 안 보이니 걱정이 되더라고요. 뭔가 실감도 나고요. 그런데 어제 본인과 만났다고 하시니까 곧바로 온 거죠.”
“아마 여우가 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건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닐 거에요. 본인 말에 따르면 가짜인 게 들통난 채 얼굴 마주 보는 게 새삼 부끄럽다던데요.”
“그럴까요?”
조금 애매한 이유다. 태주 역시 그 이유가 거짓은 아니라도 전부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거기까지 파고들기엔 너무 사소한 부분이라 잠시 미뤘을 뿐이다. 일단 우선해야 할 것은 다른 부분이다.
“그나저나, 여우가 뭐라고 했나요? 협박 같은 거라도 하던가요?”
“자리를 돌려주고 싶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자리를 돌려줘요?”
세열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되물었다.
“여우는 ‘본인 말에 따르면’ 지금은 손님과 목적이 같다고 하더라고요.”
태주는 어제 여우와의 대화를 설명했다.
“손님과 목적 자체는 동일해 보여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래요.”
세열은 영 신뢰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그러니까 그게,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나요?”
“거짓말일 수는 없어요. 사실만 말하도록 계약을 맺었거든요.”
세열은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말도 안 되는데….”
세열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는 물었다.
“그럼, 그 여우는 순수한 선의로 제 여동생을 도왔는데, 제 여동생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세열은 눈을 찌푸렸다.
“그저 여우가 너무 잘했기 때문에?”
“네, 뭐 본인 주장은 그렇죠.”
세열은 뭔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조금 이상해요.”
“어떤 게요?”
“그게, 여동생은… 분명히 소극적이기는 했어도 그렇게 심지가 약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고작해야 뭔가를 너무 잘 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는 이유로 숨어버릴 아이가 아니라고요.”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니까요. 확실히 그런 성격적 부분은 함께 사는 사람이 보는 시선이 가장 정확할 지도 몰라요.”
여동생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여우가 하는 말과 세열이 하는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저는 진짜 여동생 분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니까요.”
태주도 알아야 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일단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할까요. 어제 부탁드린 건 조금 확인해 보셨나요?”
태주의 질문에 세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네, 하기는 했는데….”
세열은 중간에 말끝을 흐렸다. 태주는 되물었다.
“했는데요?”
세열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가족들은 여동생이 바꿔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정말요?”
“네. 전혀 의심조차 안 하는 것 같아요.”
태주의 부탁대로, 세열은 어제 다른 가족들을 한 번씩 떠봤다.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 이상하다는 점을 느끼지 못했고 두 형에게 은근히 물어봐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가족들도 동생의 변화를 알아요. 그저 본인이 노력해서 변한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에요.”
세열만 여정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 취급당했을 뿐이었다.
세열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냥, 좀 더 지나면 제가 알아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겠거니 생각하는 것 같아요.”
결국은 다른 가족들도 바뀐 건 알지만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 왜 다른 가족들은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여우가 일으킨 변화는 작은 게 아니다. 서서히 일으켰다고 하지만, 본인이라면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을 부분까지도 죄다 바꿨다.
“가족이라면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실제로 세열 씨는 그 차이를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도 왜 다른 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어… 글쎄요?”
세열은 눈을 깜빡거렸다.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다. 태주는 그냥 대놓고 말했다.
“여우의 말에 따르면, 그건 세열 씨만 유난히 가족들 사이에서 친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세열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영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인가요?”
“어쩌면요.”
하지만 그 정도만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여전히 조금 아리송하다.
“저번에 말씀드렸듯, 조금 더 가까운 사이인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도 몰랐다는 이유가 되기에는 좀….”
“다른 분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네! 당연하죠!”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는 말했다.
“역시, 그랬나?”
“역시라고요?”
세열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태주는 조금 웃으며 말했다.
“어제 여우와 만났을 때 조금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거든요.”
“어떤 점이 있었나요?”
“여우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여동생분을 꽤 아끼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손님 역시 신경 쓰이는 대상에 들어 있죠.”
“그런가요?"
“뭐, 손님은 그 자리에 없으셨지만 제가 보기엔 그랬다는 말이에요. 그에 비하면 다른 가족들의 존재는 여우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졌어요. 아,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그냥, 비교적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에요.”
여우는 다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사소하게 넘어가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신기하죠? 관심 없어 하는 쪽한테는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고, 관심을 주는 쪽한테는 의심을 사고 있다니요.”
보통은 주의 깊게 신경 쓰는 쪽에게 의심을 사게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을 그만큼 신경 쓴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한다는 말이니까.
“가장 신경 쓰는 사람에게 의심받는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죠. 연기력이 처참하다거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조금 이상하다. 태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기력이 처참했다면, 혹은 실수가 잦거나 하는 경우였다면 손님이 전역하는 그 긴 시간 동안 다른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죠.”
어제부터 가장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여우는 그만큼 미숙한 연기자가 아니다. 자신이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을 속이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말이다.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그저 여우가 티를 냈기 때문이에요.”
세열이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거나, 혹은 특별한 사람이라서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우는 굳이 당신을 고른 거예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사람으로 말이에요.”
“굳이 절 골랐다….”
“그렇죠. 그리고 그건,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만 그런 건 아닐 거에요.”
여우는 태주에게 분명 진실만을 말하기는 했지만, 아직 뭔가를 분명히 숨기고 있다.
“아마 세열 씨로 고른 이유는 알고 나면 허탈할 정도의,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태주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아마도, 하지만 분명히 듣고 보면 바보 같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