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7)
태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이제 다시 자리를 돌려주려고 했는데 여정 씨가 받지 않았다는 말이죠?”
“정확해요. 그래서 제가 이곳으로 온 거라고요.”
“흠.”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되네요.”
태주의 말에 여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말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어쨌든 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했다구요.”
“뭐, 그건 알겠지만요.”
태주는 여우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당신의 목적은 여정 씨에게 다시 그 자리를 돌려주는 것… 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렇죠. 그리고 그 자리에 없어서 모르겠지만, 우리 오빠…가 아니라 세열 씨의 부탁도 비슷한 거 아니었어요? 아마 여동생을 도와달라거나, 뭐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랬죠.”
좀 더 정확히는 여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럼 일단은 우리 같은 편 아니에요?”
여우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목적이 같잖아요?”
여우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여우의 목적은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고, 세열의 목적은 여동생을 찾아내는 것이니.
“목적이야 같은데….”
태주는 조금 한숨을 쉬었다.
“그럼, 지금 여정 씨가 어디 있는지부터 알려주시죠.”
“그거야, 뭐 어렵지는 않은데.”
여우는 씩 웃었다. 여우가 순순히 월이에게 붙잡혀준 이유는, 그리고 태주 앞에서도 나름 당당한 모습으로 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걸 혼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하게 저를 안 해친다고 하면 알려드리죠.”
“약으셨네.”
“약았죠.”
여우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 여우니까요! 빠져나갈 굴은 늘 마련해 놓는다고요!”
태주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좋아요, 제대로 된 약속이나 하나 할까요.”
* * *
태주는 잠시 시간을 들여 계약서를 만들었다. 잠시 로비를 비워야 하긴 했지만, 월이가 있으니 여우가 도망치거나 할 일은 없다. 애초에 본인도 바라는 게 있으니 도망칠 생각 자체가 없었겠지만.
“문제 있나요?”
태주는 다 만든 계약서를 여우에게 보여줬다.
“참고로 갑이 저고, 을이 그쪽입니다.”
여우는 피곤한 눈으로 대충 계약서를 훑어봤다.
1. 갑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을은 갑에게 진실을 말하며 협력한다.
2. 갑의 목표가 달성되거나 그것이 확실해졌을 때, 갑은 을이 원하는 것을 돕는다.
3.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갑과 을의 부탁은 상호 거절이 가능하다.
4. 갑과 을은 서로에게 일부러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5. 갑과 을이 동시에 계약을 파기하길 원하거나, 목표가 달성될 경우 이 계약서의 효력은 종료된다.
“없는 것 같은데요.”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순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수준의 계약서지만 어길 때의 페널티는 꽤 무섭다.
대놓고 어긴다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장 찍으면 되는 거죠?”
여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냥 손가락을 갖다 댔다. 인주도 없이 지문이 찍히는 걸 보면 재주도 좋다 싶다.
“그나저나 꽤 피곤해 보이시네요.”
태주는 조금 지쳐 보이는 여우를 보며 말했다.
“힘드신가요?”
“그야 그렇죠. 여기에 잡혀서 끌려 온데다, 말도 한참을 했으니.”
태주가 계약서를 만드는 동안, 여우는 월이에게 붙잡혀서 ‘조금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까지 말하다 결국 지치고 말았다.
“알면 왜 안 말렸어요?”
여우는 지친 채로 태주 쪽을 쳐다봤다.
“그 정도 이야기는 괜찮잖아요? 좋아서 하는 이야기는 몇 시간을 해도 멀쩡하던 분이.”
“그때 그거야 제가 좋아서 하던 이야기고, 이건 제가 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란 말이에요.”
여우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레몬에이드를 세 번을 리필했다.
“이거라도 안 먹으면서 하면 못 버텼을걸요. 아, 이거 마약레몬에이드라고 하고 팔면 잘 팔리지 않을까요?”
“그런 거 먹는 사람은 당신뿐일 걸요.”
태주는 컵에 남은 액체의 점도를 슬쩍 본 뒤 진저리를 쳤다. 리필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여우가 요구하는 시럽 양은 점점 늘었고, 나중에는 걸쭉한 레몬에이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에 가까워졌다.
“저런 걸 어떻게 먹지?”
“아, 왜요! 스트레스 엄청 받아서 그러죠!”
여우는 신경질을 부렸다.
“혹시 계약서 일부러 천천히 만든 거 아니에요!?”
“이런 걸 처음 써 보는 건데 어떻게 빨리 만들어요?”
태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여우는 오히려 그럴듯하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이런 걸 많이 써본 사람이면 그거야말로 못 믿을 사람이라구요.”
그러나 여우는 동시에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이걸 순순히 써주시네요? 이런 위험한 거 자주 해 봤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그래도 손해는 안 볼 자신이 있어서요.”
태주의 말에 여우는 조금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다시 원래의 웃는 상으로 돌아왔다. 태주는 곧바로 질문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말한 데 거짓은 없죠?”
계약서의 효력은 지금부터고, 이전에 말한 것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태주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우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말했다.
“와, 이걸 바로 써먹으시네? 최소한 제가 말한 건 다 사실이에요.”
“뭐, 확인차 한 번쯤 이런 질문은 던져야 할 테니까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정 씨는 멀쩡하게 잘 있다는 건 확실하고?”
“솔직히 마음은 잘 몰라도 몸은 그렇죠. 장소야 뭐, 조금 있다 알려드리죠. 당장 가실 것도 아니잖아요?”
“내일쯤으로 생각하고 있긴 해요. 그 장소가 멀리 있을까요?”
태주의 질문에 여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멀지는 않아요. 제가 자리 다시 돌려받으면 살려고 구해 놓은 집에 틀어박혀 있거든요.”
“허.”
분명 풀려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참 요령도 좋다 싶다.
“집도 구했어요?”
“그거야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이죠! 물론 뭐 신분 같은 건 저 나름의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방법으로…”
여우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월이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거 그냥 주술아냐?”
“…주술이에요. 하지만 신분 마련에만 사용한 거라구요. 공짜로 뜯어내거나 하진 않았어요. 사기 같은 건 아니라구요.”
여우는 황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 있어선 이쪽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일단은 이 정도로 할까요? 내일쯤 다시 만나야 할 텐데.”
시간이 좀 늦었다.
“우리 오빠 자리 비우면 그때 눈치 보고 오죠, 뭐.”
여우는 약간 지친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주는 물었다.
“얼굴 보기 싫은가 봐요?”
“싫은 건 아니고, 지금 보긴 좀 민망해서.”
여우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죠.”
태주는 여우를 보냈다.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제 나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마시구요.”
“당신이 여우라는 건 이미 말했는데요.”
“아이, 그러니까 제가 막 나쁜 녀석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달라구요. 여우라는 건 어차피 밝힐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긴 한데.”
“적당히 나쁜 출신의 여우가 아니라고 말해드리죠.”
“앗? 정말요?”
“네. 사실 이미 그럴 확률이 높다고 전해놨어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업… 이라고 해야 하나 본래 해야 할 일은 내버려 두고 있으니 불량이라면 불량이긴 하지만요.”
“나 참, 저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원. 아무튼, 부탁 좀 할게요!”
여우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는 문으로 나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에서 더는 소리가 나지 않을 때쯤 월이가 물었다.
“저 말을 어디까지 믿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다 하네? 무슨 바람이 불었냐?”
“아니, 그냥. 뭔가 미심쩍어서.”
월이는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이유 모를 본능적인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다.
동물적인 감각이라 표현해야 할 거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내가 이야기를 좀 한참 들었잖아?”
“그래. 잘 듣더라? 지루하면 중간에 때려칠 줄 알았는데.”
“좀 재미있긴 하더라구.”
태주 설명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월이가 생판 남의 이야기를 두 시간 이상 집중해서 들었다는 건, 그만큼 여우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여우가 그렇게나 피곤해한 건 결국 반쯤 자업자득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뭐가 미심쩍은데?”
태주의 질문에 월이는 표현이 잘 정리되지 않던 듯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뭐랄까, 진짜 여우 같았다고 해야 하나? 나쁜 여우는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좋은 여우라는 생각도 안 들고.”
월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잘생긴 남자 보고 꼬리치다가 잡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
악행이라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선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월이는 여우의 성향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 결말은 알고 있다.
“마지막이 치정싸움 끝에 봉인당하는 게 뭐랄까 좀 막장드라마 같기도 하고….”
태주가 흘린 말에 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이가 한참 들은 이야기는 결국 조금 수위 높은 고전 연애 썰 같은 거였을 뿐이다. 듣다 보면 재미있기는 한데, 아무리 들어도 태주가 말한 것처럼 수행하는 여우로 보이지는 않는다.
“진짜 본인 말대로 나쁜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월이는 그래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나쁜 짓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한도 내에서 이래저래 할 거 다 하고 돌아다닌 것 같은 그런 느낌?”
“좀 그렇지? 내가 그래서 불량이라고 말한 거긴 한데.”
태주는 살짝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월이의 생각은 꽤 정확했다.
“내가 저번에 어떤 여우는 수행자라고 말했지?”
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천년이나 걸린다고 말했던가?”
월이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산 것의 50배를 넘게 살아야 천년이다.
“근데 그거 미친 거 아냐? 그렇게 오래 걸릴 필요가 있어?”
“그래. 당연히 그 정도로 필요하지. 천호라는 건 거의 신선에 가까운 거니까 말이야.”
한낱 미물이 신이 될 정도의 수행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걸린다.
“헥, 그래서 진짜 된 여우는 있고?”
“글쎄, 천호 이야기가 있는 것 보면 최소한 비슷한 건 있었겠지? 게다가, 여우 요괴가 아무래도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나게 종류가 많으니까 어떻게 보면 있는 게 당연해.”
시행 횟수가 충분히 많다면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누군가는 당첨이 된다.
“복권 긁는 확률이라도, 누군가는 당첨이 된다는 말이야.”
“와, 그렇게까지 해서 되고 싶은가 그게? 그거 그렇게 쎈가?”
월이는 결국 그런 게 궁금한 듯 물었다. 태주는 결국 웃고 말았다.
“글쎄? 꽤 영험한 존재니까 강하기야 하겠지. 이제 와서 볼 일이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태주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기지개를 켰다.
“당첨될 확률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복권 긁기를 위해서 천년을 수행해야 한다면, 너는 할 거야?”
“절대 안 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월이는 말했다.
“그 여우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거야. 굳이 사람으로 비유하면 진급을 포기한 간부와도 비슷하다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면 나는 못 알아들어!”
“하긴 그렇겠네. 너한테 비유하면 학업을 포기한 학생만큼 학교생활이 편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되려나.”
“딱 나네. 내가 지금 엄청 편하거든. 설이는 왜 그렇게 피곤하게 공부하나 몰라.”
월이의 말이 태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고 너무 자기만 하진 말고. 어쨌든, 아무리 신선처럼 수행하는 종류의 여우라고는 해도 그게 수행인 이상 쉽지는 않을 거 아냐?”
“어… 그런가?”
“너도 학생이지만 공부가 쉽진 않잖아.”
월이는 빠르게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야. 천호가 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권이라면 특권이지만 동시에 그걸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해. 그러니까 이 여우는 그걸 적당히 포기한 거야”
태주는 여우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어차피 열심히 하는 놈들도 한번 실수로 골로 가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놀다 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마 그게 여우의 마음이었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마음가짐이 꽤 유쾌해지지. 작정하고 누구 하나를 해치려 들면 끔찍해지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