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6)
“그, 뭐냐. 제가 갇혔다는 이야기는 방금 했죠?”
“남자 꼬시다 봉인 당했다고 했지.”
월이는 뒤에서 맞장구를 쳤다.
“근데, 나 그 이야기 궁금한데.”
“저, 저거부터 이야기해요?!”
당황한 여우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시간 남으면 하세요. 일부터 해야죠.”
“시간이 남으면 결국 해야 하는 건가요….”
여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 이야기는 별로 안 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월이의 말이니 거절도 못 할 거였다.
“…좋아요. 어쨌든 전 그렇게 봉인 당해 있었어요. 그래도 그년이 양심은 있어서 엄청 튼튼하게 봉인한 건 아니고, 한 오륙십 년 지나면 슬슬 봉인이 약해지게 만들었더라고요.”
“왜 애매한 오륙십 년이야?”
월이의 질문에 여우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는 말했다.
“뻔하잖아요? 지들 늙어 죽고 나서 풀어준다는 거죠. 나름대로 봐준다고 선심 쓰듯 말하던데! …사실 봐준 것도 맞긴 한데!”
그래도 갇힌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봐준 거랍시고 이야기하면 화만 날 뿐이다.
“뭐, 좋게 생각하면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아요.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기도 하고. 새로 노려볼만한 것도 하나 생겼고.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은 꽤 길었단 말이죠.”
“아하.”
월이는 꽤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꽤 오래 어디 갇혀있었다는 거구나.”
“네. 심지어 봉인이 약해지는 건 약해지는 건데, 아무리 약해져도 이게 안에서 뚫기는 영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죠, 시간이 지나면 봉인이 약해진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본인 힘도 서서히 약해질 테니까.”
봉인한 사람도, 봉인 당한 당사자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태주의 말에 여우는 손뼉을 한번 치며 말했다.
“정확해요! 어쨌든 결국, 누가 와서 풀어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했죠.”
“그 풀어준 게 동생분인 모양이네요. 이름이 여정 씨라 했던가요?”
여우는 어제, 그런 이름을 댔었다.
“그렇죠. 기억하고 있네요?”
“그 정도는 기억하죠.”
태주의 말에 여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그 애가 절 도와줬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요. 믿어져요?”
여우는 그때, 꽤 감동받았다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세상에는 그렇게 악독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렇게나 친절한 애들도 있다는 말이에요! 지나가다 여우를 돕다니! 옛날에는 지나가다 여우 괴롭히던 사람밖에 없었는데!”
“뭐, 믿고 자시고. 요즘 사람들은 요괴가 나쁘다는 인식 자체가 없으니까요.”
대놓고 무섭게 구는 것들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냥 솔직히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사람이 분명 꽤 있을 거다.
말 못 하는 동물을 돕는 것이 본인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음에도 돕는 것이 요즘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저한테는 감동적인 일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랑 자리를 바꾼 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월이는 그쪽 이야기는 별로 관심 없는 듯 뚱한 태도로 물었다. 여우는 움찔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돌아갔다.
“뭐,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널 도와주겠다고 말을 했죠. 중간에 때려치긴 했어도 수행자 출신이란 말이에요? 그냥 사람한테 받기만 하는 건 신경 쓰인단 말이죠.”
“뭘 도와주기로 했죠?”
“처음엔, 인간관계요.”
“인간관계?”
여우의 답변에 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수긍했다.
생각보다 말이 된다.
“뭐, 작정하고 그렇게 하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 전개였겠네요.”
“여우가 무슨 인간관계를 도와줘?”
월이는 선뜻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태주는 월이 눈높이에 맞춰 간략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우는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 없이 섞여 들어가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악한 여우든, 비교적 선한 여우든 그렇다.
“눈치 보는 데는 아주 귀재라고 해야 하나.”
“그렇죠! 누가 뭐래도 전 여우라구요!”
여우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좋아하는 걸 잘 파악해서 제시할 수 있어요. 그런 걸 못하는 여우는 없다구요.”
좋게 말하면 요령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약삭빠르다. 그게 바로 여우다.
“그리고 그걸 사용해서 좀 도우려고 했던 거죠.”
* * *
“좋아,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줄게!”
풀려난 직후, 여우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그것도 은인의 부탁인데! 물론 당장은 별로 대단한 건 못 하지만….”
뭔가 주술 같은 것을 시도하거나, 자체적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뭐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멍청하게 힘만 가졌던 종류의 요괴가 아니고, 지혜로운 여우였으니까.
“가능한 건 도와줄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여정은 망설이다가 그렇게 말했다.
“나,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여정의 부탁은 여우에게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의아하기까지 한 질문이었다.
“뭐? 그러니까… 친해지고 싶다고? 누구 좋아하는 남자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여우는 아무래도 그런 쪽 전문이다. 그런 거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여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두루두루 말이에요.”
여정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해도 내성적인 성격을 고칠 수 없다. 대학에 가서도 계속 그럴까 봐 가족들이 걱정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혹시 이 성격을 고칠 수는 없을까 하는 거예요. 대학 가서 좀 바뀌어 보려구요.”
“그러니까, 특정 한 사람은 말고? 두루두루 친하게?”
“네.”
“고작 그런 게 부탁이라고? 그게 어렵나?”
본능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 여우에게는 별 것 아닌 부탁이지만 여정에겐 꽤 심각한 부탁이다. 여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렵더라고요, 저한테는. 아버지 말고 다른 가족들과는 친해지기도 좀 어렵기도 했고요. 지금은 그래도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가족들?”
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족은 그냥 가족 아냐?”
“그게, 저희 부모님이 재혼을 하셔서….”
“응? 재가를 하셨다구?”
여우는 처음에 재혼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낯설어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뭐 그런 일도 있는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야, 가족들이 널 따돌린다는 말이야?”
“아니에요. 옛날에 가까이 가기가 좀 꺼려졌다는 말이에요. 지금도 조금 어렵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요. 사실, 저희 부모님이 재혼하실 때 이미 다른 두 오빠는 다 나이가 좀 있었으니까요. 지금 보면 다 좋은 분들이긴 하지만….”
막내인 세열과는 그래도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 외의 다른 오빠들은 나이 차가 5살 이상 나고 있었다. 여정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다 보니 더욱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조금 어려웠죠. 제가 보기엔 모르는 아줌마에, 모르는 아저씨 둘이 갑자기 가족이라고 들어온 기분이었거든요.”
당시엔 그 사실이 좀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멀리했던 기억도 있다.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세열과는 빨리 친해졌지만, 나머지 사람들과 가족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저랑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과 친해지는 데도 한참이 걸렸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곳으로 가면….”
“헤….”
여정의 말을 들은 여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고민했다. 여우에게도 이런 종류의 고민 상담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조금 성격을 바꿔 보고 싶다는 거지?”
“네. 정확해요.”
“으음, 나한테도 뭐 대단한 방법은 없는데.”
여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차라리 어떤 한 사람을 유혹해 달라는 건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탁이 이렇다면 여우에게도 별 뾰족한 수는 없다.
물론 이런저런 조언이야 가능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여우는 그걸 아주 의식해서 한다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해내는 것에 더 가깝다 보니 본인조차 그걸 정확히 전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부럽네요….”
“어쩔 수 없지. 난 여우니까!”
여우는 그렇게 말했다. 여정은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뭔가 괜찮은 생각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우는 잠시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예 직접 보여줄까?”
“뭘요?”
“사람 사귀는 법.”
여우는 그렇게 말했다. 여정은 귀가 솔깃한지 질문했다.
“그걸 어떻게 보여주는데요?”
가능만 하다면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뻔히 보이는 태도다.
“우리, 서로 자리를 바꾸자.”
여우의 말에 여정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자신 없어 하는 몇 가지 행동을 내가 몇 번 시범을 보여주겠다는 거야. 직접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자리라는 게?”
여정의 질문에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내가 네 모습으로, 네 역할을 해 보겠다는 말이야.”
여우의 말에 여정은 말문이 막혔다.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옛날이야기에서 좀 본 거 같은데.”
“내가 딴 맘 먹으면 위험해지지.”
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한테 이걸 줄게.”
“이게 뭐예요?”
여우는 뭔가가 담긴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여정은 뭔지도 모르고 받아들었다.
“구슬.”
“구슬이요?”
“엄청 중요한 거야. 그게 있으면 나는 꼼짝 못 할 정도로. 내가 네 자리를 돌려받고 싶을 때, 그걸 나한테 줘.”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제가 원할 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꽤 괜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보여주세요.”
* * *
“몰랐던 사실이네요.”
태주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세열 씨랑 여정 씨는 친남매가 아니라고요?”
“아니죠. 애초에 이름부터가 좀 다르잖아요?”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열 씨의 두 오빠의 이름은 한열, 두열이에요. 세열 씨는 그래서 세열이고요.”
“…이름 너무 대충 아냐?”
월이의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들은 여우는 대신 변명하듯 말했다.
“뭐, 제가 부모님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세열이란 이름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그렇지 않더라도 딸 이름을 네열이나 뭐 그런 식으로 짓지는 않겠죠.”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건 확실히 처음 듣는 내용이네요.”
“친남매가 아니라는 거 말이죠?”
꽤 중요한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태주는 말했다.
“그다음에 하실 이야기가 뭐죠?”
“그게 다예요.”
여우는 거기서 이야기를 끝냈다. 월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말했다.
“뭐? 그게 다라고?”
“앗! 아니! 굳이 말하자면 말할 건 있지만! 그래도 제가 여정이 생활 대신한 이야기까지 듣고 싶으신 건 아니잖아요?”
월이의 의문에 여우는 움찔하면서 대답했다. 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어쨌든 대학 이후로는 드릴만 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뭔가 불법적인 걸 저지르진 않았죠?”
태주의 질문에 여우는 눈을 한껏 찌푸린 채 말했다.
“여우를 뭘로 보고? 대리시험 같은 것도 신경 쓰여서 일부러 시험 때는 제가 대신 안 해줬다구요! 저는 정당한 방법으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그런! 그야말로 학교의 에이스가 되었다구요! 자질구레한 것들 도움이야 주지만!”
“꽤 요령 좋네요.”
여우는 그 말을 듣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없으면 여기로 그 오빠분을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문제가 뭐였죠?”
태주의 질문에 여우는 곧바로 다시 축 처진 채 말했다.
“저는 성심성의껏 도와줬고, 여정이한테 한 말을 지켰죠.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걸 열심히 보여준 거예요. 근데, 뭐랄까.”
여우는 소심하게 말했다.
“별로 지금 자리를 돌려받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잘 해 버려서요.”
어느 날 여우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서 여정에게 자리를 다시 돌려줄까? 하고 물었을 때, 여정이 거부했다.
“저는 언제든 원하면 이 자리를 돌려주기로 약속했어요. 근데, 정작 자리를 돌려받고 싶지 않아 할 줄은 몰랐죠. 그렇다고 억지로 돌려줄 수도 없어요. 구슬을 가진 건 그 아이이고, 그걸 안 주면 저는 그냥 조금 귀엽고 뛰어난 여우 같은 계집애일 뿐이니까!”
“와, 미쳤나 봐.”
월이는 어처구니없어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이번엔 여우도 위축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정말로 그런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