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여우비가 내리던 날 (5)
여자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태주를 쳐다봤다. 주황빛 머리가 푹 젖은 채인 데다, 옷도 꽤 헝클어져 있기에 몰골이 말이 아니다.
“저기, 괜찮으세요?”
이런 몰골로 끌고 올 줄은 몰랐기에 태주는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여우비가 멈춘 데서 월이가 여우를 붙잡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한 줄은 몰랐다.
“…억울해요!!”
월이의 손에 뒷목 쪽 옷깃을 잡혀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 여우는, 자신의 뾰로통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 애가 잘못했네요.”
태주는 조금 진심으로 사과했다. 일단 끌려온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곳에 끌려오자마자 험한 꼴을 당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데리고 올 줄은 몰랐어요.”
태주의 말에도 여우는 태주를 힐끗 보기만 할 뿐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다. 그저 뚱한 표정으로 구석에서 과설탕 레몬에이드를 쪽쪽 빨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항의를 하지 못하고 그저 삐진 티를 그대로 낼 뿐이다. 태주는 한숨을 쉬며 월이 쪽을 바라봤다. 월이는 그 눈을 마주 보고는 왈칵 화를 냈다.
“뭐가 우리 애가 잘못을 해! 네가 정중히 모셔 오라거나 하는 말 안 해서 나는 그냥 나쁜 거 잡아 오는 줄 알았지!”
월이는 암튼 제 탓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우겼다.
“그래, 뭐 나쁜 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명을 안 한 건 내 잘못이 맞을 수도 있는데….”
태주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탈취제 한 통을 머리에 부어버리는 건… 어휴, 말을 말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만 말하자 이제!”
태주가 뭐라거나 말거나 월이는 그래도 목적을 달성해서 기분이 좋은지, 태주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습이었다.
태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댁도 좀 항의를 해요. 그냥 가만히 머리에 그런 거 붓는 거 맞아주지 말고.”
“히익!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제가 미친 줄 알아요?”
여우는 부들부들 떨면서 작게 말했다.
태주는 왜 저러나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저번에는 그렇게 말 잘하던 분이 무슨?”
분명 세열이 오기 전날, 듣다가 지칠 정도로 말이 많았던 사람, 아니 여우다. 불평 한마디 제대로 못 할 성격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우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떻게 거기서 입을 열어요?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여우는 월이를 보고는 다시 한번 부르르 떨며 말했다.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태주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정도가 되나 하는 생각을 하다 깨달았다.
“아하.”
염두에 두지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월이를 보낸 건 적절하다 못해 효과가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늑대와 여우니까 그런 거구나.”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여우와 늑대는 같은 개과이나 크기 차이가 크다.
한쪽은 사람보다 크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한쪽은 간신히 닭이나 훔쳐 갈 수 있을 크기다.
자연에서 여우가 늑대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듯 괴담에서의 관계도 비슷하다.
단순히 힘으로만 따지자면, 늑대는 여우의 상위호환인 것이다.
“그걸 알면서 늑대를 저한테 보내요?! 제가 뭐 잘못도 안 했는데 이러기에요?”
여우는 그게 정말로 억울했는지 눈에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그냥 근처에서 눈치나 좀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엄청난 게 와서는….”
순간적으로 이대로 죽나 싶을 정도로 여우는 겁을 집어먹고 말았던 것이다.
“뭐, 그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네요.”
태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히 그게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여우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근처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갑자기 나타나선….”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그런 식으로 붙잡은 건 미안하지만, 대놓고 여우비를 그렇게 뿌리는데 어떻게 몰라요?”
태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갑자기 예보에도 없는 여우비가 내리는데, 여우와 관련된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건 너무 뻔하다.
“거기다 여우의 특징 중 하나니까요.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사람 구경하는 건 말이에요. 그러니 이 근처에 있을 게 뻔했죠.”
저 멀리서 사람 하는 거 구경하고 있다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재빨리 숨는다. 종종 닭 같은 작은 가축을 물어가긴 해도 크게 위협적인 동물도 아니다.
그렇기에 여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호기심 넘치는 악동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긴 하죠. 이번에도 그러다 이 꼴이 된 건데. 근데 여우를 꽤 잘 아시나 봐요?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야.”
불안한 와중에도 자기 생각이 맞은 건 자랑스러운 듯 여우는 힘겹게 웃었다.
“뭐, 여우만 잘 아는 건 아니지만요.”
물론 진짜 전문가라 할 사람은 따로 있긴 하지만 태주도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럼 눈치챈 거 아니에요? 제가 일부러 우리 오빠 여기로 데려온 거?”
여우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직 모르니까요. 모르죠, 잘못했는지 안 했는지는.”
태주의 말에 여우는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왜! 거기까지 알면 알 거 아니에요! 나 나쁜 여우 아니라니까!”
여우는 작은 데시벨로 느낌표를 붙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소리를 치고 싶지만, 저 반대편에서 삐딱하게 기대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월이를 보고 차마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뭐, 저도 당신이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당신이 선의로 가득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도망도 안 갔고,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요! 거리낄 게 없어서 그런 건데!”
그 말대로다. 월이는 여우를 손쉽게 붙잡았다. 솔직히 누가 뭐래도 오래 묵은 여우다. 작정하고 의도를 숨기려 하고 숨었다면 아마 세열은 이곳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왔더라도 제대로 분석하는 건 꽤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건 확실히 동의할 수 있는 말이긴 한데.”
“그럼!”
“하지만 아직도 우린 당신의 동기를 모르니까요.”
태주의 말에 여우는 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상황이 이렇게 유리한 건 오랜만이다. 태주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동기가 뭐예요?”
“무슨 동기요! 여기 찾아온 거?”
“뭐,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보다 좀 더 이전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동생분, 어떻게 된 거예요?”
굳이 상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으니, 태주 역시 그냥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분이 어쩌다 당신이랑 엮인 거예요?”
“계기라고 해도 별 거 아니라구요. 걔가 나를 도와줘서, 나도 걔를 좀 도와준 게 다예요. 근데, 너무 잘 도와줘 버려서 문제가 된 거죠.”
“너무 잘 도와줘요?”
태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우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전 여우에요. 당연히 사람 꼬시는 데는 일가견이 있죠.”
여우의 자신만만한 말에 멀리서 구경하던 월이가 한소리 했다.
“와, 여우 짓이라도 하나?”
“힉.”
여우는 방금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근데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는데 저기 저 늑대만 치워주면 안 돼요?”
여우는 태주에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말했다.
“너무 무서워요.”
“와, 저거 눈앞에서 보니까 진짜 여우 짓이네.”
월이는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를 했고, 여우는 다시 시무룩해져서 구석에 찌부러졌다.
“아니 근데 여우가 여우 짓 안 하면 어떻게 해! …요.”
어느 정도는 의도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게 여우다.
“그나저나, 대체 여기 뭐에요? 저번에 봤을 때는 저런 거 없었잖아요.”
“뭐? 저런 거?”
“…저런 분이요.”
“저건 왜 나이도 많은 게 나한테 존대야?”
월이가 끊임없이 시비를 걸자 여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해.”
“와, 저게 효과가 있나? 벌써 편들어주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네가 계속 그러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되잖아.”
태주는 찌푸린 눈으로 말했다. 월이는 시선을 피했다.
“일단 저 친구에 대한 답변부터 좀 하자면, 저 친구는 원래 여기 멤버에요. 저번에 어디 나가 있었고요.”
“그것부터 말해줬어야죠!”
“본인도 본인이 여우라는 거 말 안 했으면서 무슨….”
여우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뭐, 어쨌든 저한테 유혹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데 홀리지 않는 몸이다 보니 그냥 당황스럽기만 해서요.”
애교부리는 시늉을 해봐야 그냥 한심해 보일 뿐이다.
“이게 의도한 건 아니고… 그 뭐냐, 그게 좀 본능 같은 거라.”
여우는 그렇게 말한 뒤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귀문에 들어와서.”
“여기가 뭐 하는지 알고 데려왔던 거 아니었어요?”
“대충만 알고 정확히는 몰랐죠!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억울하다는 듯 여우는 툴툴댔다.
“대충 사람 도와준다는 정도만 파악했지, 여기에 저런 어-엄청난 게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자업자득이죠. 그럼 다시 동기 이야기로 돌아가죠. 저 친구는 신경 쓰지 말고.”
태주의 말에 여우는 한 번 더 움찔했지만, 이미 태주에게 한번 지적받은 월이는 그냥 구경만 할 뿐 더 놀려먹지는 않았다.
“좋아요, 궁금한 거 이야기는 해 줄게요. 그럼 나도 대신 하나 물어볼 건데, 그래도 괜찮죠?”
“…뭐라고요?”
갑작스럽게 당당한 태도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태도 변화다.
“왜요! 딱히 잘못한 거 아니고, 억지로 끌려온 데다! 갑자기 이상한 게 들이 부어져서 코가 마비될 지경인데, 그래도 협력해주는 아량을 보여줬으면 이 정도 요구는 해도 되잖아요!”
여우는 당당하게 외쳤다.
잔뜩 겁먹은 상황에서도 상황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게 돌아가는 걸 보고는 바로 챙길 건 챙긴다. 태주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뭐, 그 정도야.”
애초에 태주가 하려는 일은 여우를 퇴치하려는 게 아니다. 억지를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합리적인 주장이라면 어느 정도 들어줄 만도 하다.
“그럼 어디 한번 말이나 해 보시죠. 뭘 원하시는 건지.”
“여기, 사람 아닌 쪽의 의뢰도 들어줘요?”
여우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아닌 쪽이요?”
“예를 들면 제 부탁이라던가.”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하는 일은 아닌데요.”
태주의 말에 여우는 방긋 웃었다.
“그럼 비공식적으로는요?”
“비공식적으로는 뭐.”
태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수는 있겠네요. 사람에게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 도와드리는 거겠지만.”
“그런 거면 충분하죠! 좋았어! 역시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야!”
여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했다.
“옛날에는 속 좁은 인간밖에 없어서 힘들었단 말이죠! 괜히 여우라는 이유로 막 어디 봉인해 버리기나 하고!”
“봉인도 당했어요?”
태주의 질문에 여우는 잠시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꼬리 쳤다고 그 망할년이 절 가둬놨지 뭐에요.”
“자업자득이잖아….”
뒤에서 월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 태주도 이번엔 지적하지 않았다. 그 망할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유가 너무나도 한심하다. 여우는 찔린 듯 소리쳤다.
“그 외에 나쁜 짓은 안 했어요! 거기다가, 꽤 정직한 방법으로 꼬셨다구요!”
정직한 방법이라. 태주는 조금 웃었다. 아마 주술적인 매료나 기타 등등의 수단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겠지만, 표현이 조금 웃기다.
“그건 여우라서 봉인 당한 건 아닌 거 같은데요.”
태주의 말에 여우는 기분이 확 나빠진 듯 눈을 찌푸렸다.
“암튼, 도와준다는 거죠!”
“네, 뭐.”
조금 바보 같아 보이긴 하지만 승낙해도 큰 문제는 없겠다 싶어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한 조건 하에요.”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자세히 말해 주면 저도 도와주기로!”
“대신, 이상한 거 부탁하면 저도 제 뒤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할 거에요.”
“뒤? 힉!”
월이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여우는 하얗게 질렸다.
“저,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일방적인 약속 파기는 안 할게요. 서로 정직하게 이야기해 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