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15)
흡혈귀의 뒤에서 월이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따라잡힐 리는 없다.
가까워질지언정 잡히지는 않는다.
반응이 늦은 시점에서, 흡혈귀는 절대적 우위에 섰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늑대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
조금 웃으면서 흡혈귀는 설이를 향해 달려갔다.
약자들이라면 약자답게, 그때의 자신처럼 그렇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다.
결국, 늑대의 동정심에 의존한 그런 허접한 집단이다. 지금도 봐라. 늑대가 아니라면 자신을 막을 자는 없지 않은가. 늑대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하는 기습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지 않았나.
이상의 신부 따위는 이젠 아무래도 좋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확실히 살아남는 거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 앞의 여자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흡혈귀는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작전이 통했다는 약간의 우월감과 만족감에 한 행동이었다. 흡혈귀는 지금 대체 늑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키고 있던 사람이 다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비통한 얼굴을 흡혈귀는 보고 싶었다.
하지만 흡혈귀가 본 얼굴은 조금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당황하거나 낭패한 표정은 이해가 간다.
“어째서?”
하지만 왜 저렇게 자신처럼 만족스럽게 웃고 있단 말인가.
“멍청이.”
월이는 히죽 웃었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걸까? 흡혈귀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젠 아예 발도 멈췄다.
“나만 널 막을 수 있는 줄 알아?”
월이의 말에 그제야 흡혈귀는 다시 앞을 봤다.
“무슨!”
흡혈귀는 경악했다.
아주 거대한 지네가, 흡혈귀의 눈앞에 있었다.
월이가 팔에서 몸이 자라난다는 불합리한 광경을 보고 당황했듯, 흡혈귀 역시 갑작스럽게 거대한 지네가 나타났다는 불합리한 사실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런 의문도 아니다.
이미 이게 대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이미 시간이 걸렸다.
“그거, 너 못 막을걸?”
월이는 웃었다.
“나도 그냥은 못 피할 뻔했다고.”
흡혈귀는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말하려 입을 연 순간 거대한 화염이 흡혈귀를 덮쳤다.
“비장의 수단?”
월이는 비웃었다.
“그런 게 없는 녀석이 어딨어? 멍청아!”
* * *
흡혈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입이라도 닫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흡혈귀는 겉도 바삭, 속도 바삭하게 구워질 수밖에 없었다.
불사라는 것은 무적과는 다르다. 죽지 않더라도 온몸 구석구석 모두 타버리면 움직일 수 없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움찔거리지도 못하는 채로 흡혈귀는 쓰러졌다.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코가 민감한 월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와!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반면 설이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 호칭이 생각보다 의외라 태주는 웃고 말았다.
“그거 할아버지라 부르는구나?”
하긴, 지네 님이라 부르긴 좀 그렇다. 하지만 할아버지라.
그래도 본인이 정한 호칭이라면 나쁠 건 없다.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싶기도 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타이밍이었어요!”
지네는 그 말을 듣고는 굉장히 겸손한 몸짓을 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이 이상 무리를 할 이유는 없고, 더 나와 있는 것 자체로 설이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 행동이 우아해 보일 수가 있지…?”
태주가 무심코 그런 의문을 품을 만큼 지네의 몸짓은 세련되었다.
“안에서 계시던 사이 연습 꽤 하신 것 같던데요.”
“연습?”
“네. 아무래도 안에서 먼저 일어나 계셨어서.”
배시시 웃는 설이의 표정을 본 태주는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사람을 잡아먹던 괴물이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연습을 했다.
그건 태주가 보기에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저기 저 흡혈귀도 그러지 못해 저 꼴이 된 것 아닌가.
“하긴 저거 꽤 오래… 아니, 저분이라 해야 하나?”
저쪽이 사람에 존중을 표한다면 이쪽도 그냥 지네라 부르기는 그렇다.
슬슬 호칭 정리가 조금 필요하겠다 싶어서 태주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빨리 들어가신 건 좀 아쉽네요.”
설이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네 언니처럼 무리해서 나온 걸 테니까.”
“그거야 그렇죠.”
설이 역시 그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런데, 저분은 어떻게 해요?”
설이는 순수한 의문으로 물었다.
“기절하신 것 같은데.”
“앗.”
태주는 황급히 연화를 살폈다. 연화는 뒤로 넘어가서 눈을 감고 있었다.
“기절했나?”
하긴 그럴 수도 있다. 한순간에 충격적인 장면들이 연이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마 마지막 거대 지네가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솔직히 태주가 봐도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되는 사이즈긴 하다.
설이가 쪼르르 달려가 연화의 상태를 살폈다.
“그래도 다친 데는 없어 보여요.”
연화는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그렇겠지.”
아직 반쯤 붉은 마스크다. 고작 뒤로 넘어갔다고 다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쩌면 차라리 기절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직 끔찍한 광경은 다 끝난 게 아니니까.
“설아, 네가 잠시 살피고 있어 줘.”
“네에-.”
기절한 연화를 잠시 뒤로 하고 태주는 흡혈귀를 살폈다.
“어우! 숯이잖아, 이거.”
오히려 이쯤 되면 보기 끔찍할 정도다. 금발의 잘생긴 청년의 모습은 없고 있는 것은 그저 까맣게 그을린 사람 형태의 무언가일 뿐이다.
월이는 그러나 그 모습을 개의치 않고 비웃고 놀렸다.
“쌤통이다 멍청아!
그러나 한참 월이가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흡혈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안 듣나…?”
월이는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못 듣는 거겠지.”
아마 들을 틈이 없을 거다. 그 정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 중 하나가 화상이라고 하니까. 게다가 독도 좀 섞여 있으니 통증으로 따지면 엄청난 정도일걸?”
슬슬 무슨 소리 같은 것을 내는 걸 보면 조금씩 낫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생각은 못 할 거다.
오히려, 죽지 않았기에 그 통증을 온전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낫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약점이라 말할 수도 없는 부분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 차라리 그대로 죽는 편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월이는 뜨악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나 그런 거 맞을 뻔했던 거야?!”
“응.”
태주의 끄덕임에 월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소리쳤다.
“야! 니네 지네 불러!!!”
“갑자기?”
그때 알고 화냈던 게 아니었나. 태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사람한테 불을 뿜어?!!”
“넌 그때 지네 반 토막 내놓고 무슨 소리야?”
“저렇게 될 뻔했잖아!”
월이는 소리를 빽 지르며 흡혈귀였던 것을 손가락으로 휙 가리켰다.
하긴 저 꼴은 좀 끔찍하긴 하다. 물론 월이는 방어력 자체가 높은 타입이라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차피 지금은 다시 못 나오니까 그거 따지는 건 나중에 하고.”
태주는 다시 흡혈귀를 쳐다봤다. 보기 조금 안 좋을 뿐이지 태주 역시도 흡혈귀에 대한 동정심은 없다.
“어디, 비장의 수단 한두 개 정도 더 꺼내 보시지?”
태주는 웃었다.
“없으면 끝인데?”
“그으으…”
아주 미약한 신음이지만, 그래도 흡혈귀는 조금씩 재생하고 있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걸 보면 속은 이미 거의 다 나아가는 것 아닐까.
“나… 왜…”
아직은 간신히 한두 단어씩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뭐라는 거야?”
월이는 귀찮다는 듯 숯덩이를 발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나는 왜 졌냐는 말 아닐까.”
추측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던질 말은 그 정도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약해서 졌지.”
월이는 그렇게만 말했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태주는 조금 웃었다.
분명 흡혈귀는 속았다. 준비되지 않은 채 철저하게 준비된 상황에 끌려 들어왔으니 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흡혈귀가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다면 여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월이 말은 맞는 말이다.
“이야, 그래도 확실히 그새 말을 할 수 있게 되네.”
아직 피부 등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말을 한다. 진짜 흡혈귀라도 그 상황에서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불사는 불사야.”
하긴, 팔에서 몸을 자라나게 하는 미친 짓도 하는 녀석이니 이 정도에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새 조금 더 회복된 것인지 흡혈귀는 말했다.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였다.
“왜 하필 저런 게….”
억울한 목소리였다.
“그 지네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길 수 있었다.”
이렇게 되고도 인정하지 않는 건 그저 아집일 뿐이다.
“그게 없으면 시도도 안 했지.”
안전장치 없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태주는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아직도 왜 졌는지 이해를 못 하네.”
하긴 어쩔 수 없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흡혈귀가 스스로 터득한 귀족다운 모습의 세부적인 부분이 하나같이 잘못되어 있었음에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처럼.
“왜 졌는지 궁금해?”
약간의 측은지심이다. 태주는 흡혈귀에게 말했다.
“왜냐.”
이런 구석이 솔직한 걸 보면 분명 가능성은 있었을 텐데. 태주는 조금 더 씁쓸함을 느끼면서 말했다.
“강하냐 약하냐 하면 넌 강해. 우리의 준비가 조금 미흡했거나, 월이가 없으면 우리는 무조건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거야.”
하지만 그 정도 강함으로는 부족하다. 혼자서 모두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강한 게 아니라면, 흡혈귀는 공존을 택해야 했다.
“그래도 넌 네가 약자이던 시절을 극복하지 못했어.”
“더 강해져야 했다는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니까 못 이기는 거 아냐.”
아쉽다. 태주는 조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강자가 약자에게 할 수 있는 게 착취뿐이라 알고 있으니 전제부터 틀려먹었지.”
협력하지 않는다. 불필요하다 여긴다. 약자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태도가 어떻게 완성이 되었는지 짐작이 가기에 태주는 안타까웠다.
흡혈귀가 자신을 모방해 붉은 마스크를 만들었다면, 흡혈귀 역시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말일 테니까.
피해자였던 시절의 흡혈귀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그래서 아쉽다.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괴담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태주는 알았기 때문에 너무 아쉽다.
“너는 어쩌면 우리와 같이 공존할 수도 있었을 거야.”
불사의 흡혈귀, 약점이 없는 흡혈귀는 분명 사람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흡혈귀는 사람을 죽였다.
보고 배운 것이 빼앗는 것밖에 없으니 그런 것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더 좋은 결말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람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면 그렇게 처리할 뿐이다.
태주는 가라앉은 눈으로 흡혈귀를 내려다봤다.
이미 여기까지 결판이 난 시점에서 흡혈귀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우리는 이미 의뢰를 받았지.”
지훈이 처음 한 의뢰를 이제야 끝낼 수 있다. 꽤 오래 걸렸다.
태주는 쓰러진 흡혈귀의 몸 옆에서 신체 일부를 주웠다. 새까맣게 타서 원래 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촉이 썩 좋지는 않다.
태주는 그걸 작은 봉투에 담고는 말했다.
“곧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