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12)
“위험하지 않은가.”
간신히, 아주 간발의 차이로 흡혈귀는 월이의 공격을 피했다.
흡혈귀는 거드름을 피웠다.
“이것 참, 기습은 안 통할 거라고 말했는데도.”
기습은 실패다.
사실, 맨 처음에 한 기습이야 당연히 상대가 그 존재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뿐이니 제대로 먹혔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이기는 했던 이유는 딱 둘 뿐이다.
월이의 압도적인 신체능력, 그리고 흡혈귀의 주의가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분산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단 한 호흡 만에 그만한 거리를 좁히다니. 확실히 엄청나게 빨라. 나한테 같은 일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없겠지.”
그건 꽤 대단한 일이라며 흡혈귀는 순순히 칭찬했다.
“하지만 나를 너무 얕봤군? 내가 그대보다 조금 느리다고는 해도 충분히 빠르다네.”
한 끗 차이다. 결코 좁힐 수 없지만, 일격이라면 무리 없이 피할 수 있다.
“감사해야겠군.”
흡혈귀의 뜬금없는 말에 월이는 눈을 치켜떴다.
“뭘?”
“감사한다 말했다네. 왜냐하면 이번 일격으로 내가 그대를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거든, 공주여.”
월이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공주라고 부르면 다음엔 네 목이라도 자를 거야.”
“방금 실패하지 않았나.”
흡혈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처음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후속 공격이 들어온다면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흡혈귀는 양팔을 과장되게 벌렸다.
“하지만 그대는 더 공격하기를 포기했지. 그 뒤에 미약한 존재 때문에.”
흡혈귀는 웃었다.
“그렇다면 그게 있는 한 그대는 나를 결코 이길 수 없어.”
흡혈귀는 웃었다. 월이는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저 헛소리에 일일이 계속 반응해 주다가는 아마 홧병이 나고 말 거다.
“자, 그 이야기는 이쯤 하고.”
흡혈귀는 다시 태주를 바라봤다. 말은 위세 좋게 하기는 했지만 월이를 경계하는 모습은 여전했다.
“왜 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다고.”
흡혈귀는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러 왔느냐는 말이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용건이라면…”
흡혈귀는 뒷말은 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저런 눈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런 것과 대화를 할 때 필요한 건 상대에게 쩔쩔매는 게 아니다. 필요한 일은 그저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너무 그러지 마시죠? 제가 말씀드려서 기습을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 봅니다.”
“건방지구나. 애초에 네가 내 주의를 분산시킨 게 아니었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흡혈귀는 웃었다.
“게다가 몸이 조금 잘린다 해도 내게 큰 타격은 아니야.”
하지만 오히려 이런 당당한 태도가 흡혈귀는 더 마음에 드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는 하다. 그저 굽신거리는 이가 하는 칭찬과 어느 때나 당당한 이가 하는 칭찬은 다르다. 이전에 한 태주의 칭찬이 의미 있으려면 태주는 당당한 사람일 필요가 있다.
“허나 네 말도 사실이니 공로는 인정한다 치지. 건방지게 이 대화에 끼어든 것도 불문에 부치도록 하마.”
예상대로 이기는 하지만 태주의 생각보다도 태도가 더 유하다.
“하지만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거든.”
그만큼이나 설이가 마음에 든 걸까. 흡혈귀는 아량을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태주가 해야 할 일은 적극적인 줄타기니까.
“일단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을 위한 물건이지요.”
흡혈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너 따위에게 받을 게 있었던가?”
“받을 것이 아닙니다. 받아야만 하는 것이죠.”
당돌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흠,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빨리 다오. 이곳은 데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
흡혈귀는 사납게 웃었다.
“곧 싸움이 일어날 거다. 조금 떨어져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켜 줄 생각은 없거든.”
“뭐, 저희를 지켜 주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자구책이야 당연히 있으니. 그보다 드릴 물건 말인데.”
태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흡혈귀가 눈을 약간 찌푸릴 때 태주는 다시 말했다.
“그냥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이상하다. 흡혈귀는 조금 눈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내가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무언가를 주기 위해 왔는데 그냥 줄 수는 없다니.”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 대체 목적이 뭘까 싶었던 흡혈귀는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거기에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아무래도 지켜야 하는 쪽의 인간이니 까다롭게 굴어야 하거든요.”
점점 더 뜬구름이다. 흡혈귀가 뭐라 불평을 말하기도 전에 태주는 말했다. 이전까지 하던 대화보다 조금 호흡을 빨리 가져가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말할 수 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
“궁금하지 않으시냐 물었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조금 귀찮아하는 듯한 눈이다. 흡혈귀의 눈이 좀 더 날카로워졌다.
태주는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표정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늑대가, 옛 왕이 왜 저 애를 물었는지 말입니다.”
“…뭐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늑대가 왜 저 아이를 물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뭐랄까, 꽤 귀족적인 이유였지요. 괜히 왕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흡혈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애초에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곧바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흡혈귀에게 그건 매력적인 질문이었다.
“당신이 공주라 부르는 저 자가 왜 선택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야!”
공주라는 말이 또 들리자 월이는 화가 난 채 소리쳤다. 하지만 태주는 무시했다.
하지만 오히려 좋다. 저러라고 일부러 화를 참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 월이의 저 태도는 흡혈귀에게 꽤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저 이야기를 하자마자 화를 내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흡혈귀는 말했다. 이렇게나 뜸을 들이고 흥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조금 궁금하기는 하군”
흡혈귀가 알기로 애초에 그 늑대는 자기 종족의 멸망을 우선시한 괴물이었다.
왜 동족을 죽였는지 흡혈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 멸망시킨 주제에 왜 굳이 동족 하나를 새로 만든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저 우연이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마지막에 충동을 참지 못해서 물었나? 아니면 다른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우연은 아니겠지?”
만약 고작 우연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라면 갈기갈기 찢어 주리라. 흡혈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을 짐작한 것인지 태주는 바로 말했다.
“마주친 건 우연이지요.”
태주는 말했다.
“하지만 마주친 게 우연이라 해서 선택하는 것조차 우연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제 뒤의 사람을 고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군, 그런 말인가.”
흡혈귀는 납득이 가는 듯 말했다.
“만난 것은 우연이지만 저자를 공주로 삼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건 말이 된다. 흡혈귀는 조금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예, 물론이지요.”
태주는 여전히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말했다.
“그 자세는 풀어도 된다. 아무리 내게 대항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 하더라도 네가 무기 한 둘 들어봐야 내게 큰 의미는 없으니.”
“아뇨, 하지만 이게 또 나름대로의 성의 표시라.”
하지만 태주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게. 예의를 지키는 것은 마음에 드니. 하지만 동양에 그런 풍습이 있지는 않았을 텐데.”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정말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래, 뭐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그 특별한 이유가 뭔가?”
“이름 때문입니다.”
“이름이라.”
“늑대들이 달을 좋아하는 건 아실 겁니다. 달만 뜨면 짖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태주는 말했다.
“저 친구의 이름은 달이라는 뜻입니다. 단순 명쾌한 이름이지요.”
“설마,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예, 고작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뭐랄까, 조금 시시하군.”
진심으로 실망한 듯 흡혈귀는 말했다.
“재미가 없어.”
“그런가요?”
태주는 물었다.
“당신이 저기 저 연화 씨를 붉은 마스크로 만든 이유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요.”
“뭐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흡혈귀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너… 알고 있었나?”
“뭘 말이죠?”
일부러 모른 척하며 태주는 말을 돌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흡혈귀는 뭔가가 크게 이상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잠깐.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야.”
흡혈귀는 경계심을 부쩍 끌어올렸다.
“네놈, 어떻게 저 늑대를 문 이를 알고 있지?”
저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심은 이제 들지 않는다.
저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모습이야말로 그 사실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평범한 사람이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애초에 너는 왜 왔지?”
갑작스러운 등장에 흡혈귀 역시 잠시 미뤄두었던 의문이었다.
“나는 분명, 네 뒤의 레이디에게만 오라는 암시를 걸었을 텐데.”
“아휴, 그게 제 체질 때문이라.”
태주는 대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대체 왜, 너만이 이야기하고 있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동안, 경계하던 늑대는 달려들지 않았다. 붉은 마스크도 달려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암시를 걸어 둔 그 여자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당찬 태도를 기억하는 흡혈귀로서는 의아한 일이다.
“왜 저만이 이야기하고 있느냐고요?”
태주는 천천히 말했다.
“글쎄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대체로 이런 류의 설명은 제가 잘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혹은 체력 문제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텐션이 많이 낮아지거든요.”
“그건 참, 간단한 이유로군.”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자면.”
태주는 손가락으로 월이 방향을 가리켰다.
“당신이 찾던 여자는 저기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태주는 갑작스럽게 손가락으로 월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흡혈귀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흡혈귀는 월이의 뒤에 있는 설이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낮에 봤던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방금까지는 저기에 있지 않았나?”
언제부터 저기에 있던 사람이 바뀌었지?
순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분명, 그 여자는 저 태주라는 인간의 뒤에 있었을 텐데.
“언제 저기에?”
그리고 그 순간, 흡혈귀의 등허리에서 옆구리 부위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일렬로 몸에 네 개의 구멍이 났다.
누가? 어떻게?
흡혈귀는 자신의 몸에 공격을 가한 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알았다.
“너는…”
“단 한 번, 찍으면 된다. 잘 하셨습니다.”
태주는 웃었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대성공이다.
“등을 보이는 상대 정도면 해볼 만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