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8)
흡혈귀는 차가운 눈으로 태주를 노려봤다.
“나는 자네에게 대답하라 한 적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이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수였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태주는 내심 당황했지만 이렇게 되었다면 뻔뻔하게 나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니, 남의 여동생한테 갑자기 그런 소리 하는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안 합니까?”
태주는 정중하게, 하지만 경계하는 말투를 사용했다.
“대뜸 좋지 못한 말씀을 드린 건 사과드리지만, 그래도 제가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지금 해야 할 일 자체는 명확하다.
자신이 위협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어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해칠 경우 설이의 환심을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추측을 주는 것이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도 상대는 자신들의 정체를 모른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지만, 그래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위기는 곧 기회다.
“실례했군, 레이디의 가족이었나.”
다행히 흡혈귀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흡혈귀는 처음에 태주를 경쟁 상대로 이해했던 모양이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잠시 물러나 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나는 그대의 여동생과 대화를 하고 싶으니.”
흡혈귀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 정도 존중은 해 주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태주도 그리 쉽게 물러나 줄 수는 없다.
“죄송하지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뒤에서 깜짝 놀란 설이가 태주의 등을 툭툭 쳤다. 언제 그랬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컨셉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제가 제 여동생이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꽤 자주 일어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태주는 자연스럽게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는 정보를 흘렸다. 흡혈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흡혈귀에게는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물론 당신이 겉보기에 그리 나쁜 사람이나 모자라신 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제가 쉽게 물러나면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태주는 적당히 상대에 대한 칭찬을 섞어 가면서 말했다.
적당히 상대를 띄워준다. 상대가 귀족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이전처럼 적대적으로 굴 수는 없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렇게 마냥 매몰차게 물러나라 할 수는 없겠군, 어쨌든 뒤에 그분은 그러기에 합당한 분이니.”
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태주는 공주 운운하는 단어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작정하고 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듣고 있으면 분명 정신이 나갈 것 같기는 하다. 그것도 자신을 늑대인간으로서 특별시 하는 멘트라면 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분과 대화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정도 말을 듣고 흡혈귀가 물러날 리도 없다. 흡혈귀는 당당하게 물었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는지 날 선 태도는 지운 모습이었다.
태주는 흡혈귀의 이런 태도가 조금 의외였다. 단순히 설이가 가진 재능, 그러니까 다른 괴담들에게 간단히 호의를 사는 종류의 재능 때문에만 이렇게 치근덕거리는 것 같지는 않다.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니다. 혹시 흡혈귀는 지금 꽤 진심인 것은 아닐까. 태주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글쎄요. 그런 질문을 하는 분은 처음이라 저도 대답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것은 예상 밖이다.
흡혈귀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태주를 무시하고 뒤에 직접 물었다.
“거부하기 위해서만 있는 수문장이라, 그렇다면 그대가 아니라 뒤에 있는 레이디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네, 네?”
설이는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대도 듣고 있지 않았나?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은데.”
낭패다. 아직 이런 상황에 순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설이가 준비되지는 않았다.
태주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그 순간에 설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호오?”
흡혈귀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태주도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꼭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렇다면 그대여, 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대가 제게 진심이라 해도 제가 그대에게 진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태주는 경악했다. 물론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는 됐다.
‘이건…’
평소의 설이 말투가 아니다. 하지만 태주는 이런 말투를 알았다.
왜 하필 지금인가.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예상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태주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의문은 대체 왜 나오려 마음먹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 저 사람이라면 설이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꽤 순조롭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태주는 개입하기를 포기했다. 괜히 의도를 모르는 채 끼어들어 그림을 망치는 것보다는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낫다.
“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왜 제게 말을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나에게 진심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꽤 슬픈 말이군.”
흡혈귀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여지가 있는 말이다. 흡혈귀는 그 여지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 진심이 될 방법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있긴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지….”
흡혈귀는 망설이는 태도의 설이를 보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 그러니 알려주지 않겠나?”
“그렇게까지 제 마음을 사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이는 물었다.
“굳이 제게 집착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말했지 않은가. 그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흡혈귀는 과장되게 양팔을 벌렸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했다네. 꽤 오랫동안 여행을 했지.”
“무슨 여행이었나요?”
“나에게 걸맞은, 아름다운 신부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네.”
흡혈귀의 말에 태주는 미미하게 눈 끝이 떨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흡혈귀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도 여행 중이신가요?”
“아니, 사실 지금은 여행 중이 아니야. 세계를 꽤 돌아다녀 보던 중, 이 부근에서 그렇게 신부를 찾는 일은 그만뒀다네. 한번 생각을 바꿔서 다른 시도를 해 보면 어떨까 싶었거든.”
“생각을 바꾸셨다니요?”
“음,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세상에 없으면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흡혈귀는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네. 아직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설이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조금 좋지 못하게 들리는군요.”
“그렇군. 다른 여자 앞에서 하기엔 실례되는 말이었어.”
하지만 오히려 그 태도가 흡혈귀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래, 그대와 같은 인물을 만날 줄 알았다면 나도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았을 게야.”
흡혈귀는 꽤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대야말로 내가 찾던 이상 그 자체라네.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 내려 하던 인공적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럴 땐 내 부족한 표현력이 원망스럽군.”
흡혈귀는 눈을 붉게 빛내며 말했다.
“그대가 나와 함께 해 줄 거라는 약속을 해 준다면, 나는 지금까지 나의 신부를 만들기 위해 하던 모든 행위를 청산하겠네.”
청산이라. 상대가 사람이라면 그냥 헤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마 이 경우에는 상대를 죽여 없앨 생각일 것이다.
그편이 깔끔하니까.
설이는 눈치채지 못한 척 웃었다.
“제게 꽤 진심이시군요?”
“거짓을 말하지는 않겠네. 나는 진심으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상대가 괴물이 아니라면, 이건 꽤 괜찮은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저 역겨울 뿐이다.
“진심 어린 말은 그 자체로 꽤 마음에 울리는 게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할 일이 뭐란 말인가?”
흡혈귀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가능한 일이라면, 도와주도록 하지.”
“도와주신다…. 허나 이것은 다른 이에게 발설하기 조금 곤란한 일이라.”
설이는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흡혈귀는 애가 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태주의 가슴도 타들어 갔다.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흡혈귀에게 저렇게 구는 걸까.
“말해 주게. 아무리 그래도 이유도 모른 채 물러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정 그러시다면.”
설이는 마지못하다는 태도로, 하지만 그리 오래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저는 지금, 한 늑대인간을 찾고 있습니다.”
“늑대인간을 찾고 있다고?”
흡혈귀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설이는 조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역시 믿지 않으시는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이전에 우연히 늑대인간을 만났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였으나, 그건 분명 늑대인간이었습니다.”
설이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태주 역시 표정이 굳었다.
이제야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건 도박수다.
“늑대인간이라.”
흡혈귀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대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그 라이칸스로프를 만난 적이 있다네. 그것도 꽤 최근의 일이지.”
흡혈귀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 묻겠네. 그대는 어떻게 그자와 만났지?”
일부러 선수를 친다. 상대가 경계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먼저 말한다. 실패한다면 흡혈귀는 큰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성공한다면 앞으로, 최소한 그게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기 전까지 설이를 의심하기는 어렵게 된다.
“어떻게 늑대인간과 만났는가,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저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하지요.”
“우연히 만났다?”
“그쪽에서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과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우연히, 흡혈귀와 지금 만난 것처럼 늑대인간과 마주쳤다는 말에 흡혈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자신들과 함께하자는 제의했습니다. 저는 두려워 거절했지만, 아직도 제게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그건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이지?”
“불규칙적입니다. 허나 자주 있는 일이지요. 제겐 이전부터 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런 것들에게 끌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니.”
설이는 흡혈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그 늑대인간이 물러나게 해 줄 수 있으십니까?”
그 질문은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너 역시 그렇기에 자신에게 온 것 아니냐는 종류의 질문이기도 했다.
흡혈귀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그대는 이미 아는 쪽의 사람이었는가.”
“당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제게 말을 거는 이들은 다 그런 이들이었기에.”
“저 앞의 남자가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 점점 더 이해가 가는군. 그리고 나는 그대가 점점 더 탐이 난다네.”
흡혈귀는 약간 웃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흡혈귀라네. 그대들이 뱀파이어라 부르는 바로 그 종족이지. 그대가 말한 그 라이칸스로프에 대해서는 마침 나 역시도 조사 중이었지.”
“그렇습니까.”
“하지만 문제가 조금 있었지, 나는 그 라이칸스로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네. 어느 조직에 속해 있다는 정도는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흡혈귀는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나는 이길 수 있네. 그저 정보가 조금 모자랄 뿐이야. 고작 세상에 나타난지 몇 년도 채 안 된 어린것에게 질 리가 없지. 나를 너무 무시하지는 말게.”
“하지만 늑대인간은 강합니다. 저는 괜히 다른 이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증명해야 할 뿐이겠군.”
흡혈귀는 불타는 눈으로 말했다.
“정보가 있다면 넘겨주게. 내가 맞설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터이니.”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건 조금 운명적인 어떤 감정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설이는 조금 걱정하는 듯한, 그리고 조금은 촉촉한 그런 고혹적인 눈으로 말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