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7)
해가 중천에 떴는데 흡혈귀를 찾아다니는 것도 웃기다. 바보짓을 하는 것 같아 태주는 무심코 웃었다.
“여기도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럼 다음으로 가야지.”
태주의 대답에 설이는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계획이라 할 수 있어요?”
“계획이지.”
태주는 당당하게 말했다.
“이건 그냥 돌아다니는 거잖아요.”
설이의 말대로다.
두 사람은 지금, 그저 설이가 괴담 속의 존재들이 최근에 머무른 자리에 남는 반짝이는 흔적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거리를 돌아다닐 뿐이다.
자신만만하게 계획이라 말한 것치고는 꽤 단순무식하다.
설이는 조금 실망했다. 어제 자기 전에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말하길래 다 계획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이렇게 하나하나 확인하고 다닐 뿐인 건 계획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거 오늘 안에 찾을 수 있는 게 맞아요?”
걷는 것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약 없이 걷기만 한다면 당연히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희가 고생하는 거 자체는 상관 없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는 게 효과가 있긴 해요?”
“효과가 있지.”
“있기야 하겠죠! 계속 시간을 쓰면 언젠가 만나기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 빨리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두 분을 영원히 보호할 수는 없잖아요?”
“아차, 너한테 설명을 안 해줬구나? 미안.”
태주는 그제야 깨달은 듯 황급히 말했다.
“월이한테 세부 사항을 설명하려 들면 맨날 귀찮다고 잘 안 들으려고 하거든. 보통은 둘이서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설명을 안 했네.”
하지만 지금 태주의 옆에 있는 건 월이가 아니다.
“어디 보자, 다음에 확인할 곳에 가면서 이야기하자. 일단 이것부터 말해야 할까. 이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 오히려 지금 이런 단순무식한 방법을 쓰는 건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거든.”
태주는 조금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네 말대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다 보면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아무리 네 눈이 있다고 해도 그래.”
“당연하죠!”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도 상당히 낮다. 우연히 지나가다 흡혈귀를 만날 확률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주로 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만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질 수 있겠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거야.”
태주는 조용조용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두 사람이 다니고 있는 곳은 하나같이 사람이 적은 곳이라 조용했고 목소리를 크게 낼 필요가 없다.
“흡혈귀와 만난 사람은 둘, 그리고 신문 기사에서 본 교사가 살해당한 위치까지 확인해보면 그 장소들에는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데요?”
“전형적인 베드타운 중에서도 새벽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정말로 없는, 그러면서도 사람 한 명이 잘 보일 수는 있는 장소. 의외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좋은 장소는 많지가 않거든.”
물론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지 쉬지 않고 돌아다녀야 찾을 수 있을 만한 숫자다. 시간이 더 있고 좀 더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핀다면 확률이 높은 곳을 더 걸러 낼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러니 어느 정도만 추린 뒤, 무식하게 대입한다.
“경우의 수가 아주 심각하게 많은 게 아니라면 종종 대입법을 쓰는게 빨라. 깔끔한 방법은 아니지만, 빠른 방법이지.”
태주 역시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은 타협해야 할 때다.
“최대 스물한 번 정도로 생각 중인데.”
“그 안 많은 게 20개는 넘잖아요. 애초에, 흡혈귀가 이 부근에 없으면 어떻게 하려구요?”
걱정스런 눈빛으로 설이는 쳐다봤다.
“아냐. 그래도 그 안에 있어. 그 흡혈귀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상대를 많이 경계한다면 보통 할 일은 둘 중 하나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모아서 언제라도 써먹을 수 있는 뭔가를 준비해 두거나, 혹은 아예 재빨리 저 멀리 도망가거나.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칠 리는 없어. 우리가 상대의 목표를 데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나름 자존심도 강해 보인다. 경계는 할지언정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선택을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할 만한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우리를 노리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겠지.”
“엥, 그럼 우리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 주변에서 자신들을 찾아내기 위해 쥐잡듯 뒤질 것이라면, 가장 위험한 건 자기 방어능력이 모자란 두 사람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태주는 웃었다.
“말했잖아. 하지만 우리는 아직 위험하지 않다고. 아무리 상대가 흡혈귀라고는 해도 우리를 경계하기 시작한 이상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우리의 전력을 모르니까.”
월이에게도 한 설명이다. 태주는 대강 요약해서 설명했다.
“상대는 나름대로 손익계산을 할 줄 아는 놈이니 오히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어.”
이런 경우는 화가 나면 앞뒤 안 가리는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더 상대하기 어렵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 상대는 우리를 조사하려 들 거야. 하지만 그 녀석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무소의 위치가 이 근처에서 멀지 않다는 정도야. 월이 기준으로 오 분 정도면 뛰어올 수 있는 거리라는 것 정도밖에 모르니까 말이야.”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사실만으로 사무소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리는 없다. 사람들에게 사무소는 알려지지 않았고, 드물게 사무소에 올 수 있었던 사람들 역시 일이 끝나고 나면 사무소의 위치 같은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최면을 걸어도, 암시를 걸어도 소용없다. 사무소에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현재 사건과 연관이 있는 사람뿐이다.
“그러니 아마 지금 꽤 답답할 거야.”
아는 걸 모두 말하게 하는 최면도, 암시도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진실을 숨기지 못하게 하는 건 분명히 무서운 방법이지만, 애초에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알아낼 방법은 아니다.
물론 시간을 언제까지나 쓰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꼬투리를 잡힐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이 아예 밖에 나가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지금 해야 해. 상대가 우리를 가장 모르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지금 이 두 사람처럼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이유가 흡혈귀에게는 없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지금 꽤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된다는 말이야. 오히려 지금이 가장 바빠야 할 때고.”
그렇구나. 설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럼 이번이 네 번째인데.”
태주는 도착해서는 말했다. 이다음부터는 설이가 자세히 살피는 게 일이다.
“아, 여기 뭔가 보여요.”
연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그런 괴담 속의 존재들이 남기는 것은 아주 미세한 흔적이지만, 상대가 흡혈귀씩이나 되면 흔적이 당연히 잘 보인다.
“그래? 생각보다 운이 좋았네. 반의 반도 채 돌아보기 전에 찾았으니.”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다. 역시 이럴 때는 무식하게 대입법을 쓰는 게 낫다며 태주는 웃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천천히, 조용하게 저 흔적을 따라가 보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놈인지 한번 보자고.”
* * *
설이가 본 흔적을 따라가자 나온 곳은 번화가다. 주말 낮이라 사람이 꽤 많이 보인다.
그곳에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이쪽을 경계해서 외모를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게 흡혈귀 맞지?”
거의 확신을 가진 채 태주는 설이에게 물었다. 설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요. 근데 생각보다 별일 안 하는데요?”
의외로 지금 흡혈귀가 하고 있는 건 그저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려 보면서 말을 거는 짓이다. 꽤 소소한 작업이지만 생각보다는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같아 보였다. 일단 흡혈귀를 매몰차게 거부하는 사람이 없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말을 거는 데 그리 특별한 방법을 쓸 필요도 없다.
금발의 훤칠하고도 창백한 미남. 멀리서 보기에도 딱 그런 느낌이다. 외국 배우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심지어 모국어로 말을 거는 데 굳이 거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흡혈귀가 낮에 사람들 사이에서 조사 같은 걸 하고 있다니, 말세야 말세.”
하지만 합리적이다. 햇빛이 약점이 아니라면 조사에 유리한 건 단연 낮이다. 아무래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럭저럭 잘하잖아?”
태주는 흡혈귀가 꽤 강제적인 방법으로 조사를 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최면이나 암시조차 거의 쓰지 않고 흡혈귀는 조사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사용하는 암시마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발설하는 것을 막는 정도에만 쓰고 있다. 저 정도라면 사실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는 수준이다. 확실히 저런 식이면 굳이 모습을 바꿀 필요도 없다.
“저 정도면 사람들에게 의심도 크게 사지 않고, 자기가 정보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널리 퍼지지 않겠지. 생각보다 잘하는데? 이전에도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건가?”
“진짜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네요.”
지금의 흡혈귀는 그냥 잘 생기고 한국어를 잘하는 지나가던 외국인 청년일 뿐이다. 흡혈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설이가 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대놓고 구경해도 괜찮아요?”
설이는 문득 불안해진 듯 물었다.
“괜찮아. 아예 눈이 마주칠 정도만 아니면 뭐….”
“진짜요?”
“주변을 한번 봐. 어차피 저만한 사람은 어딜 가나 시선이 가게 되어있어. 저게 흡혈귀가 아니더라도 그랬을 거야.”
상대는 가만히만 있어도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긴 인물이고, 안 그래도 흡혈귀를 쳐다보는 사람만 주변에 한 트럭이다.
그러니 한두 사람의 시선이 더해진다고 해서 흡혈귀에게 큰 차이는 없다.
“너무 뚫어질 정도로만 안 보면 괜찮겠지.”
태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근처 기둥에 기대섰다. 태주는 하품을 했다. 솔직히 조금 졸리다. 그 잠시간, 태주는 흡혈귀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설이는 당황했다.
“그런데 저 흡… 남자 이쪽을 보고 있는데요?”
“뭐?”
태주는 당황했다. 그리고 직접 본 뒤 조금 더 당황했다. 혹시 정체가 들킨 건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놀랍게도 저 흡혈귀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기묘하지만 그랬다.
“절 보고 있는데요?”
설이는 조금 기겁해서 말했다.
태주는 눈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는 자리를 피할 수도 없다.
“알겠지만 흡혈귀에 대한 건 모르는 척해.”
태주는 설이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보기엔 네 체질 때문인 것 같아. 우리 정체가 들킨 건 아닐 거야.”
작은 호감. 그 호감이 영향을 줬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설마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효과가 좋을지 몰랐다.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다.
“어쩌다 보니 호감이 드는 사람이 눈에 띄니 이쪽을 바라보는 거야. 혹시 말을 걸면 대화는 최대한 내가 할 테니까 너한테 묻는 말에만 대답해. 상대를 자극하지는 말고, 조금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는 태도로.”
조금 위험하다면 위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흡혈귀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대처만 잘한다면 괜찮다.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천천히, 그러나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흡혈귀는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흡혈귀가 충분히 가까이 오자 태주는 먼저 선수를 쳤다.
“무슨 일이시죠?”
태주는 그렇게 물으며 상대를 살폈다. 흡혈귀는 태주가 말을 걸자마자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
“네겐 관심 없다.”
흡혈귀는 적대적인 태도로 말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흡혈귀는 순전히 설이의 체질에 끌려 온 거다. 자신에게 적대적일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 그게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 자신을 적대하고, 한 사람에게 호의를 보여야 할 이유가.
태주가 그 이유를 정확히 추측하기도 전에 흡혈귀는 대놓고 설이에게 물었다.
“그 옆의 사람은 애인이신가?”
“아뇨? 그냥… 오빠인데요?”
설이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저놈 저거 눈이 맛이 가 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지금 흡혈귀는 확실히 설이에게 집착하고 있다.
작은 호감을 느끼는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눈앞의 흡혈귀가 보이는 태도는 작은 호감 정도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설이가 애인이냐는 질문을 긍정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거… 혹시?’
태주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첫눈에 반했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안 하겠지?’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해도 되겠군. 나는 그대에게 첫눈에 반했소. 혹시 본인과 함께할 생각 있소?”
흡혈귀의 말에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돌겠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