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5)
전화가 끊어졌다. 연화는 지친 표정을 지었다.
“어렵네요… 이거.”
새벽 네 시가 넘었는데도 깨어 있었던 연화의 부모님은 연화에게 기관총처럼 걱정의 말을 쏟아부었다.
그 걱정은 듣기만 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걸 넘어서 안심시키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잖아요?”
태주의 말에 연화는 태주를 조금 째려봤지만, 결국은 고개를 떨궜다.
말 그대로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기 때문이었다.
“…쟤는 잘 자네요.”
연화는 전화하는 동안에도 깨지 않고 잘 잠들어있는 지훈을 조금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최면에 당한 거라서요. 한동안 잠도 좀 설쳤을 거고…. 몸에 이상은 없으니 푹 자게 내버려 두죠, 뭐.”
연화가 바로 그 잠을 설치게 한 장본인 중 하나다 보니 탓할 수도 없다. 연화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내일 부모님이랑 만나면 더 잔소리 듣겠죠?”
“뭐, 그렇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포화는 오직 연화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태주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일단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태주는 그렇게 인사를 한 뒤 아직도 구석에서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 월이의 뒷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그래? 나와. 손님들 자야 하니까.”
그래도 이쯤 시간이 흐르고 나니 월이도 좀 침착해졌다. 물론 완전히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제는 중얼거리는 건 멈췄다.
하지만 아직도 눈에는 독기가 보였다. 진정만 했을 뿐 화는 전혀 풀리지 않은 것이다.
“하나만 말하자.”
잠자코 나온 월이는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밖에 나가서 공주님 소리 하면… 너도 내가 어디 매달아 놓을 거야.”
월이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화내는 것 같은 말투지만 조금 작은 목소리다. 아직도 채 수치심이 다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와, 무서워라.”
태주는 웃었다.
“야, 웃어?”
협박하듯 말하기는 하지만 지금 월이가 그럴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태주는 계속 웃었다.
“아니, 웃기긴 하잖아. 어쨌든 그래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한데, 어차피 흡혈귀 만나면 다 들키는 거 아냐?”
“윽…,”
월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흡혈귀가 다시 자신을 공주라고 부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거기에 방금 안에 두 사람 입단속도 해야 할 거고.”
지훈이 그 공주님 운운하는 멘트를 들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긴 하지만, 연화는 확실히 들었다. 그걸 넘어 아예 직접 공주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혹시 안에 있는 두 사람한테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 건 아니지?”
아무리 싫어도 그럴 순 없다. 결국 월이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놈은 진짜 내가 죽일 거야… 최소한 죽을 만큼 아프게는 만들 거야.”
월이가 조용히 분노하는 사이 카페 쪽 문이 열리며 설이가 들어왔다.
“아, 마침 나오셨네요?”
“왜, 무슨 일 있어?”
“아, 소장님이 돌아왔거든요.”
“뭐? 소장님?”
두 사람은 잠시 얼굴을 마주 봤다. 그렇다면 지금 호칭가지고 시답잖은 말이나 할 때가 아니다.
며칠이나 자리를 비운 소장이 왔다면, 분명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될 거다.
“지금 바로 갈게.”
두 사람은 황급히 카페로 향했다.
* * *
“오랜만이야?”
말 그대로 오랜만이다. 보통은 자리를 비우더라도 하루 이틀이면 돌아오던 소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주일 정도 소장은 자리를 비웠다.
이곳이 자리를 잡은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소장은 묘하게도 피곤해 보였다. 이런 표정 역시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확실히 이번 일이 별일은 별일이구나. 태주는 조금 각오가 생겼다.
“밖에서 어느 정도는 보고 있었지. 내가 없어도 잘하고 있던데?”
소장은 여전히 능글맞은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안정감 차이는 엄청나다.
그걸 소장도 안다. 그래서 평소에 소장이 자리를 늘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소장은 자리를 비웠다. 그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저희야 뭐 늘 최선을 다하죠.”
태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소장은 대체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온 거예요?”
“미안,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었어. 그냥은 나도 모르겠는 점이 있었거든.”
소장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은 웃지 못했다.
“소장이 직접 확인하다니, 그런 일도 다 있나 봅니다.”
시아는 긴장한 태도로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소장이 모르는 점이 있다고 밝히는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태주만 조금 눈을 찌푸린 채였다.
“뭐, 그래. 하지만 가끔 이런 일도 있더라고. 태주는 경험해 본 적 있을 텐데?”
“저야 알죠. 그거 그런데 엄청 예전이잖아요? 아직 여기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있었던… 그거 엄청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태주는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소장이 왜 모르는 일이 있었는지가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선해야 하는 건 소장이 무엇을 왜 몰랐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죠. 그래서 그 일이 지금 저희가 하는 일이랑 연관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없겠냐?”
소장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있어. 내가 모르는 일이 세상에 그리 많은 건 아니거든.”
“그럼 어디까지 알려줄 수 있어요?”
태주는 그 점부터 물었다.
소장은 알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사실, 어떤 의미로는 소장이 모르는 것이 있다 해도 사실 평소와 크게 달라질 건 없다.
하지만 소장은 조금 뜸을 들였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잠시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 라… 일단 약속 하나를 하지. 이번 일이 끝나면 알려주마.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이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숨길 필요도 없는 것 같네.”
하지만 그 말은 지금은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래. 지금 말하면 전에 말한 그 무서운 사람이 눈치챌 여지가 있거든.”
소장의 말에 태주는 더 추궁하는 걸 관뒀다.
“그럼 말해도 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데요?”
“어디 보자… 직접 말해줄 수가 없으니 나도 답답한데.”
태주의 질문에 소장은 머리를 한번 긁적이고는 말했다.
“일단 하나 알려주마. 이번에 너희가 마주쳤던 그 녀석은 약점이 없다. 죽일 방법이 딱히 없다는 말이지. 불사라 말해도 되겠네.”
소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말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정보다.
“불사라?”
시아는 의외라는 듯 소장의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은 흐르는 물도, 태양도, 말뚝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 그런 건 그 녀석에게는 약점이 아니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효과는 없다.”
소장은 단언했다. 흡혈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약점 중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시아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건 참, 귀찮은 일이군요.”
약점이 없는 불사. 그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꽤 끔찍한 일이다.
“게다가 팔을 자르면 팔이 난다. 다리를 자르면 다리가 난다.”
이미 월이가 경험한 일이다. 잘린 순간 다시 돋아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잘리고 몇십 초면 복구가 된다.
“목을 잘라도 죽지 않아. 정신이야 잠시 잃겠지만 곧 다시 살아날걸?”
소장은 웃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그런 걸 어떻게 잡지?”
월이가 무심코 중얼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녀석을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처리해야 해. 이번 일의 핵심 목표라고 할 수 있겠지.”
소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목표를 말했다. 하지만 이 중에 그런 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소장이 직접 ‘목표’를 언급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목표라고요?”
태주조차 소장이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소장은 씩 웃었다.
“그 남자 손님의 의뢰랑 조금 겹치는 면도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개인적으로 요청하는 일이야. 꽤 어려운 일이긴 하지.”
소장은 씩 웃었다.
“상대방은 불사고, 약점도 없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우리는 붙잡아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해. 할 수 있겠냐?”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해 보인다. 소장이 시킨 일이 아니라면 태주는 당당하게 불가능하다 말했을 것이다.
“난이도를 점점 올리시네요. 지금만 해도 빡센데.”
태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소장은 절대 불가능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모두 제공하도록 하지. 이번에는 이전까지 모아 뒀던 비품들을 꺼내 써도 좋아. 이럴 때 쓰라고 모은 거니까.”
그 말은 창고에 있는 먼지만 쌓이던 물건들을 제대로 써먹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좀 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아의 말에 소장은 웃으며 덧붙였다.
“실패해도 책망하지 않으마. 그리고 이번에 너희가 그 녀석을 붙잡으면 보너스도 주지. 내가 고작 돈 따위를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원한다면 돈으로 주기야 하겠지만, 하고 소장은 덧붙였다. 하지만 그리 돈이 급한 사람은 이곳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보너스라는 울림은, 마음속에 어떤 자극을 주는 법이다. 돈이 아닌 뭔가 대단한 것.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참.”
태주는 웃었다.
“보람 있는 일이겠는데요.”
“자, 그럼 정리해 보자. 이번 적은 어떤 녀석이지? 이것저것 생각나는 거 전부 말해보자고.”
소장이 말한 ‘보너스’의 존재 덕분에 분위기를 탄 태주는 정리를 시작했다. 어디선가 작은 화이트보드까지 들고 와서는 펜으로 찍찍 그림까지 그려가며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 이곳에 저런 칠판이 있었어?”
“옛날에 누나가 설이 기초개념 잡아줄 때 썼던 거야. 왜 너만 모르냐?”
“어? 나만 모르는 거야?”
월이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정말로 나머지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은 반응이 아니다.
“진짜?”
“진짜. 어쨌든, 일단 너부터 말해봐. 손님을 제외하면 느낀 점은 네가 제일 많을 거 아냐?”
“그렇지?”
이중에 흡혈귀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어쨌거나 월이 뿐이다.
“그놈 정말 재수 없었는데…,”
월이는 눈을 찌푸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 것이다.
“뭘 말해야 하지? 에잇, 그냥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고 해도 뭐가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월이의 말에 다들 피식 웃었다.
“외모는 어땠지? 연화의 증언에서 추가할 게 있나?”
곧바로 시아는 질문을 던졌다.
“잘생긴 거 빼면 별로 특이하지 않아. 조금 창백하고, 금발에 잘생긴 미남… 연화가 말한 그대로야.”
태주는 보드에 간단하게 끄적였다. 외모상 특이한 점 없음, 잘생긴 금발.
“하는 말투나 그런 것도 엄청 호들갑스러워. 진짜 닭살 돋는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내가 욕하니까 말투가 천박하느니 어쩌고 하던데.”
지금 생각해 보니 화가 나는 듯 월이는 살짝 이를 갈았다. 당시에는 이미 다른 부분에서 화가 나 있었으니 신경도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하나같이 신경을 긁지 않는 구석이 없다.
“그런가.”
태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신기하네.”
태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인도 정작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뭘 잘 아는 게 아냐?”
태주의 말에 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자른 팔은 분명 오른손이었지?”
“응.”
월이는 짧게 긍정했다.
“그렇다면 잘렸던 팔을 앞으로 살짝 뻗어 인사를 했다는 건 좌우가 틀려먹었다는 말이거든.”
태주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팔이 자라난 걸 과시하려고 그런 거 아닐까요?”
설이의 말처럼 태주도 처음엔 그런 걸까 싶어 넘어갔다. 하지만 틀린 구석이 하나가 아니라면 사실 우연히 틀린 거라 보기는 어렵다.
“글쎄, 나도 그거 하나만 가지고 실수라 말하긴 어렵다 생각하지만.”
하지만 뒤에 나오는 제왕학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게 정말로 몰라서 그런 말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전략전술과 제왕학을 착각하는 건 과시 같은 게 아니잖아?”
굳이 따지자면 제왕학에 전략전술이 들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전술을 제왕학이라 표현할 필요는 없다.
이것 역시 지적하기는 애매한, 조금 이상한 부분이다.
“게다가 사실, 귀족이니 뭐니 하지만 제대로 규칙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세한 부분은 생략하고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수준으로 멈춘다.
어떤 의미로는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귀족이라는 걸 강조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 귀족적인 건 전혀 모르면서 귀족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멍청이 정도로 생각되는데.”
시아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게 맞을지도 모르죠.”
태주도 긍정했다. 전체적으로 뭔가 좀 어설프다.
“그래서 사실은 진짜 귀족이라기보다는 귀족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에요. 애초에 늑대인간에 대해 별생각도 없는 것 같아 보이고요.”
흡혈귀는 월이를 보고 웃었다. 진심으로 반가운 듯한 그런 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종족을 전멸시킨 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귀족적인데 집착한다면 그런 부분에서 초연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런 몇 가지 태도들은 서로 같이 있을 수 없다. 모순인 셈이다. 그걸 이해했는지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고들 구석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군?”
시아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완전무결한 괴담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결국 괴담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니, 당연하지.”
두 사람은 살짝 웃었다. 아주 사소한 빈틈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그럼….”
태주는 화이트보드에서 상대방에 대해 확실하다 확인된 단어들만 추렸다.
“외모상 특이한 점 없음, 잘생긴 금발. 귀족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잘 알지는 못한다. 늑대인간에 대한 두려움이나 반감이 없다. 조심성이 많다, 자신의 힘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태주는 전부 확인한 뒤 말했다.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답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