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마지막 흡혈귀 (4)
마지막 흡혈귀에, 있을 리가 없는 괴물이라. 시아는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지.”
“그래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태주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골치가 좀 아플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기묘한 사실에 집중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부분에 고민하는 것은 지금은 시아 혼자면 족하다.
태주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 녀석의 정체를 분석하는 게 아니다. 상대를 붙잡고, 사람을 보호할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럼 저는 잠시 월이 있는 곳에 갔다 와 볼게요. 혹시 새롭게 떠올리거나 알아낸 거 있으면 알려줘요.”
태주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은 많다.
“저 두 사람이 일어났나 모르겠네.”
* * *
“머리 아프네.”
갑작스러운 흡혈귀의 등장은 단순히 흡혈귀에 대한 문제 이상의 고민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보호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또 두 사람이 온종일 연락이 두절되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걸 어떻게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어서 전해줄 수 있는가.
큰일에는 늘 귀찮고 다양한 작은 일이 함께 했다.
“귀찮네, 귀찮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이 밤새 아예 집에도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미성년자 학생이 둘이니 이 부분에 특히나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만약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 수 있다면 사무소에서 보호하기 확실히 용이해 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주면 며칠 더 여기서 보호할 수도 있겠지.”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까. 태주는 방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저기, 진짜 공주님이신가요?”
“엉?”
태주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처음으로 들은 말이다. 갑작스럽게 듣기에는 지나치게 황당했다.
비몽사몽 간에 하는 질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눈이 너무 말똥거린다.
“저기, 공주님?”
연화는 어색한 표정으로 월이에게 말했다.
“어….”
태주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 연화가 월이한테 공주님이라고 부른 게 맞나?
일단 지금 자신의 귀가 의심되었기에 태주는 다시 물었다.
“공주님… 이라고요?”
“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자신의 귀가 맛이 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눈이 문제였던 건가?
“쟤 말하는 건가요?”
태주는 손가락으로 월이를 가리켰다.
“네. 저분이요.”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단순한 감사의 표현을 넘어 마치 어딘가 존경까지 하는 태도로 보였다.
“이상하다… 내 눈에도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태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연화가 월이에게 평범하게 감사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은 말이 된다.
연화에게 있어서 월이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자신들을 지켜준 히어로처럼 보일 거다. 그러니 존경에 가까운 감정을 표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공주님이라는 호칭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쟤가 공주님이라고요.”
태주의 확인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월이 쪽을 바라봤다.
애달픈 표정으로 월이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태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미리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주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혹시 네가 저렇게 부르라고 시켰냐?”
“아아아악!”
월이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정말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진짜 그놈 혀를 잘라버리던가, 성대를 잘라버리던가 할 거야! 진짜 미친 새끼아냐!”
어디에 화풀이할 수도 없다. 여기 있는 기물은 다 사무소 사람들이 쓰는 물건이고, 사람을 치면 다친다.
뭔가를 격렬하게 때려 부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으아아! 왜 나는 행복할 수가 없어!”
“아니, 뭐 원하면 나도 그렇게 불러 줄 수는 있는데.”
태주는 조금 웃었다. 상황이 솔직히 좀 웃기다.
“진심으로 싫으니까 제발 닥쳐!”
월이는 머리를 조금 쥐어뜯다가 원망하는 눈으로 연화를 바라봤다.
“넌 또 왜 그런 말을 해! 눈뜨자마자 갑자기!”
“어, 하지만 그 흡혈귀가 그렇게 불러서 저도 그렇게 불러야 하나 싶어서….”
그렇게 말하자 월이는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태주는 그 모습을 보고 짐작했다. 아무래도 흡혈귀가 월이를 공주라고 부른 것은 사실인가 보다.
하지만 이전에 월이가 상황을 설명할 때 그런 말은 없었다. 태주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우리한테는 그거 안 알려줬어?”
월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같으면 말하고 싶겠냐! 어! 누가 널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막! 어! 그러면 좋겠냐고.”
“음…”
태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그렇게 기분이 썩 좋지는 않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싫은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너처럼 그 정도로 싫진 않은데. 별생각은 없어.”
“왜!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건데! 그리고 왜 너도 갑자기 날 공주님이라 부르는 거야! 대체 누가 사람을 그딴 식으로 부르냐고!”
월이는 억울함의 화살을 연화에게 돌렸다. 연화는 난처하게 말했다.
“그래도 제가 이름을 모르고… 제가 보기에도 등이 기품있기도 해서….”
“뭐! 등? 등이 기품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월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태주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런 미친! 야! 이거 너 때문이잖아!”
월이는 타겟을 태주에게로 돌렸다.
“어…? 나?”
“그래! 네가 저 애가 등에 집착한다는 소문 만든 거 아냐!”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알아서 퍼진 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월이는 이미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런 소문 만들어질 때 킬킬 웃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태주는 잠시 황당해 머리를 긁적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책임이 있다면 마땅히 사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태주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소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군요.”
능글맞게 태주는 말했다.
“갸아아악!”
이젠 제대로 된 소리도 아니다. 이쯤 되면 어떤 의미가 있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포효다.
“역시 공주님이었네요.”
옆에서 진지하게 끄덕거리는 연화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월이는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참을성이나, 냉정함 같은 부류의 무언가였으리라.
“나… 집에 갈래….”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된 월이는 이제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나중에 그 새끼를 만나면 무조건 죽여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어어…,”
이 와중에 아직도 기묘한 신음만을 내며 지훈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거 참, 진짜 개판이네.”
태주는 머쓱하게 말했다.
* * *
“죽인다… 만나면 죽인다…”
월이는 마지막 결정타를 맞은 이후 그냥 구석에 처박혀서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너무 놀렸나. 태주는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만큼 인간적인 이유로 폭주하는 월이를 보는 일도 드물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월이는 잠시 내버려 두고 태주는 연화에게 물었다.
“정신이 드셨으면 이제 좀 이야기를 해 볼까요?”
“…네.”
연화가 태주를 보는 눈에는 아직 적대감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직도 뒤통수 맞은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물론 직접 때린 건 월이라지만, 아무래도 얼굴 팔린 건 태주였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연화는 아직도 월이가 연화의 뒤통수를 때린 걸 모른다. 그렇다면 연화는 월이에게 철저하게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을 거고, 반대로 태주 본인의 이미지는 영 믿음직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 곤란하지만, 아예 이렇게 된 거 이런 이미지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태주는 즉흥적으로 조금 전략을 세웠다.
“자, 일단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미 새벽 네 시입니다. 내일은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태주는 넌지시 시간을 얘기했다.
“어…?”
새벽 네 시? 연화는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그제야 깨달은 듯 황급히 소리쳤다.
“아아! 저 집에 연락해야 하는데!”
“그래요. 그건 저희도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인데요. 혹시 외박해도 상관없는 집은 아니죠?”
태주의 질문에 연화는 거의 비명 지르듯 말했다.
“그런 집이 어딨어요!”
큰일 났네, 하고 말하면서 연화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자,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제안입니다.”
일부러 수상쩍게 태주는 말했다.
“뭔데요?”
“아니, 그렇게 경계하지는 마시고요. 그냥 집에다 작은 거짓말을 하나 하자 이겁니다. 아무래도 집에다 흡혈귀 때문에 본인이 붉은 마스크가 되어버렸고, 지훈 씨는 죽을 뻔했고, 흡혈귀가 자신을 납치해 갈 거라 말하는 건 조금 어려우실 거 아니에요?”
“…”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제로 위험한 상황이죠.”
“…그렇죠.”
흡혈귀 같은 게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너무 두려운 일이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던 탓이다.
“저희는 어떻게 되나요?”
그렇기에 연화는 물었다.
“글쎄요. 연화 씨는 뭘 원하나요?”
태주는 물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전에는 괴담 속의 존재로서 왔지만, 지금은 일단 손님이라 볼 수 있다.
“저는 딱히… 그냥 그 흡혈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요.”
솔직히 무섭다. 이전까지는 뭐에 홀린 것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한번 되돌아오니 알겠다.
“그건 진짜 괴물이에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사냥꾼이 주는 무서움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재미있게도 연화가 한 말은 지훈이 한 말과 같았다.
“그래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태주는 짐작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저희가 다시 한번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왜, 그것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제안이에요?”
연화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거부해서는 안 되는 이전의 제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아뇨. 하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은 제안일 거예요.”
태주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연화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표정을 조금 더 찡그렸다. 하지만 의외로 이어지는 말은 연화가 딱 바라던 제안이었다.
“월이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싶었거든요. 아, 참고로 월이는 저 친구 이름이에요.”
태주는 손가락으로 아직도 구석에서 중얼거리는 월이를 가리켰다.
“그 흡혈귀가 공주라고 부르던 그 친구요.”
“정말요?!”
연화는 조금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다. 흡혈귀의 팔을 자르고, 그 자리에서 쓰러트리지는 못했다지만 상대가 도망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면 그만큼 든든한 것이 또 없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래서 태주는 일부러 거기에 대고 이 말부터 했다.
“물론 공짜는 없지만요.”
그 말에 연화는 웃던 표정 그대로 굳었다.
“여긴 사무소예요. 그리고 그건 일하는 사람이 모여 있다는 말이죠. 누가 말했더라? 잘하는 건 공짜로 해 주면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그 사람의 의견에 저희는 전적으로 동의해요.”
태주는 웃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공짜가 아니에요. 당연히 뭔가를 받아내죠.”
“…저 돈이 없는데요.”
“뭐, 돈으로 받지는 않습니다. 아,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범죄는 안 저지르니까요.”
늘 혼자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투덜거리는 태주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연화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럼 뭘 받으시는데요?”
“글쎄요.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받는 편인데… 이번엔 일단 도움부터 조금 받아볼까요?”
“도움이요?”
“네, 도움이요. 아무래도 그 흡혈귀에 대해 지금 가장 잘 아시는 건 연화 씨잖아요? 사소하다고는 해도 도움을 받아보려고 해요.”
연화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무슨 도움을 드리면 되죠? 위험한 건 아니죠?”
“그 전에 일단은 알리바이 만들기부터 시작할까요? 전화로 거짓말을 좀 합시다.”
“거짓말이요?”
“네. 꾀병이요. 집에다가 전화하는 건 아무래도 저희가 할 수는 없잖아요?”
태주가 연화의 집에 그런 전화를 하면 보이스피싱이나 납치범 취급이나 당할 거다. 결국은 본인이 직접 연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통할까요?”
“전형적인 레퍼토리지만, 이게 사실 잘 통하거든요.”
태주는 사악하게 웃었다. 물론 일부러 가장한 태도다. 연화는 괜히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사실 말투에 비해 별 대단한 걸 시키고 있지는 않다. 연화는 미심쩍어하는 태도로 물었다.
“일단 정말로 그것만 하면 되나요?”
“네, 지금은요. 어쨌든 저희가 거짓말 한 적이 있었나요?”
태주는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말에 연화는 짜게 식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이들에게 한번 당한 기억이 있다.
“…방금 그 말로 더 못 믿게 됐는데요.”
“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