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지네의 아이 (17)
잠시간의 어지럼증을 겪은 뒤, 태주가 가장 먼저 일어나 말했다.
“어서 움직이자. 최대한 빨리 시아 누나한테 비녀를 가져다줘야 해.”
“왜요?”
태주의 말에 한설이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한 건 임시조치였거든. 주술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건 시아 누나뿐이야. 비녀를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면 네 언니가 깃드는 것도 더 편해질 거야.”
“그 과정을 제가 볼 수 있나요?”
“오히려 네가 빠지면 안 될걸?”
태주의 말에 한설은 안심한 듯 비녀를 가슴에 폭 안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건 아직 불안할 터였다.
그러나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러다 쓰러지겠는데.”
월이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세 사람이 산에서 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꺾여 있는 나뭇가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길은 어제보다도 더 험했다. 게다가 이젠 벌레까지 있었다.
그나마 월이가 다시 올라오며 다른 흔적들이 생겼기에 다행이었다.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됐냐?”
나뭇가지들의 상태가 난장판이 된 것을 처음으로 본 태주는 황당함을 느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월이는 자신이 내려갈 땐 이미 나뭇가지들이 잔뜩 부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길을 잃게 하려는 시도였을 거라며 태주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무 위로 뛰어서 왔구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대단하네.”
태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표정이 진심이라는 걸 본 월이는 신이나 우쭐대며 말했다.
“이 정도쯤이야!”
“솔직히 이번엔 좀 멋있었다. 마지막이 좀 안 좋았지만.”
그냥 칭찬만 하는 것이 낯간지러운 듯 태주는 장난스럽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월이는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며 다시 헛구역질했다.
“웁…. 그, 그건 잊어버리는 거로 하자.”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한설은 눈을 동글동글 뜨고는 월이를 쳐다봤다.
“뭘 잊어버려?”
“대, 대답 안 할래….”
월이는 한설의 얼굴을 외면하곤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입속에 지네의 무언가가 들어왔었다는 걸 더 생각하다가는 다시 구역질이 시작될 것 같았다.
월이의 뒷모습을 보며 갸웃거리는 한설에게 태주가 다가가 속닥이듯 말했다.
“궁금하면 나중에 언니나 지네한테 물어봐. 그 둘은 봤거든.”
“어, 정말요?”
“야, 다 들리거든!!”
세 사람은 그런 대화를 하며 천천히 산속을 걸었다. 그러나 그것이 산행 중의 마지막 대화였다.
더 말하기에는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다.
* * *
태주는 반쯤 탈진한 채 정류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월이 역시 많이 지친 듯 표지판을 지팡이 삼아 서 있었다. 그나마 한설이 똑바로 서 있긴 했지만, 힘들어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으하, 드디어 왔다.”
태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는 천천히 버스정류장 앞에 섰고, 천천히 창문이 열렸다.
“보아하니 잘 해결된 모양이네.”
시아는 한설의 손에 있는 물건을 보고는 말했다.
“일단은요. 그런데 저걸,”
“내가 처리하면 되는 거지?”
눈치 빠른 시아의 답에 태주는 피식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와, 너희 고생 진짜 많이 했구나…?”
시아는 세 사람의 행색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꼴은 더 말이 아니었다. 처음 한설이 산에서 나왔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온몸에 흙먼지와 나뭇가지들이 덕지덕지였다.
“말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진짜 하루 만에 한 일치고는 좀 많은 일이었다.
태주는 차에 발을 올리며 뒤를 돌아봤다.
“안 타?”
설이와 월이는 무슨 대화를 하는지 버스정류장 옆에 서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어어, 잠시만~.”
월이는 느긋하게 그렇게 답하고는 버스정류장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처음보다 짧아진 표지판을 힘껏 땅에 박아 넣었다.
“이거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나?”
태주가 질문했지만 월이는 막무가내였다.
“뭐 어때. 기념이야 기념.”
잘 보이는 곳도 아니고 정류장 뒤편이면 확실히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했다. 태주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좀 힘들었네.”
그렇게 말한 월이는 손으로 표지판을 툭툭 쳤다.
“고생했다.”
“어… 고생했다?”
한설 역시 따라 했다. 월이와는 다른 이유였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한설도 이 표지판에 신세를 좀 진 편이다.
확실히 뭔가 따라 하고 나니 마음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둘은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다 했으면 빨리 와! 피곤하잖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에 탔다. 이번엔 멀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가는 내내 잘 자신이 있었다.
한설은 몸을 세우곤 멀어지는 산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산이다. 경계는 부서졌고 그 안에 남은 것은 없었던 것이 되었다.
“무슨 생각해?”
월이가 한설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 그냥.”
작은 신호등에 차가 멈춰섰고 한설은 다시 앞을 봤다.
한설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비녀는 아직도 따듯했다.
세 사람을 보며 한설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번 뒤를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는 한설의 눈에는 설핏 푸른 기운이 지났다.
* * *
“여기가 네가 쓸 방이야.”
“네, 감사합니다!”
태주는 사무소 건물을 소개해준 후 한설이 쓸 방의 문을 열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이번 사건도 끝났다.
소장이 요구한 이번 보수는 이곳에 고용되는 것이다. 모두가 예상하던 대로였다.
“앞으로 우리가 살 집, 내가 쓸 방이라는 거죠?”
한설은 딱히 태주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한설의 표정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비녀가 쥐어진 채였다.
“이제 쉬어. 그건 내일에나 처리할 수 있겠다. 다들 피곤했는지 곯아떨어졌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칵.
한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태주가 문을 닫았고, 그것 본 한설은 침대에 살포시 걸터앉았다.
그리곤 손에 쥐고 있던 비녀를 내려다보았다.
“언니… 나 열심히 할게. 언니가 거기서 나올 수 있게 말이야.”
한설은 씻을 때 잠시 빼고는 비녀를 쭉 쥐고 있었다.
“보고 싶어….”
* * *
똑똑,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에 한설이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똑똑.
다시 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잠시 생각하던 한설은 노크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일어났다.
“들어오세요!”
“들어갈게~.”
문을 두드린 것은 월이였다.
한설은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문 앞으로 향했다.
문은 방문 안쪽으로 열리는 문이었고 그걸 몰랐던 한설은 문에 곧장 얼굴을 부딪쳤다.
쿵!
“아야!”
“뭐야? 왜 거기 서 있었어?!”
월이가 깜짝 놀라 외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 조금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는 한설이었다.
“어… 눈앞이 반짝거려….”
“미안… 괜찮아? 그러게 왜 그런 데 서 있고 그래?”
월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문 앞에 서 있어도 괜찮았거든…. 헤헤.”
월이는 한설의 손을 치워 이마를 확인했다. 살짝 붉을 뿐 혹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냥 같이 일 층에 가서 태주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까 했지.”
“일 층?”
“응! 배도 조금 고프고.”
월이는 나름 한설을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 보였다. 아마 일 층을 자신이 소개해주고 싶어 핑계를 만든 듯했다.
“우리 일 층이 엄청 편하거든! 커피도 태주한테 타 달라면 타주고. 다른 음료도 만들어 줘!”
“나 커피 안 마셔봤는데… 맛있을까?”
한설은 말로만 듣던 커피라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 듣기로는 향기롭지만 쓰다고 하던데 먹어본 적은 없었다.
“음, 글쎄. 커피가 맛없으면 다른 거 마셔도 되니까. 일단 내려가 보자.”
“그런데 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한설은 시아가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태주가 말했던 그 안정화 작업이라는 걸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아 언니는 아직 자고 있어. 일어나면 아마 일 층으로 내려올 거야.”
“그런 거야?”
월이의 말에 한설은 월이를 따라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계단을 통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에는 어느새 태주가 내려와 앉아 있었다. 혹시나 올지 모를 손님이 있다면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어라, 벌써 일어났어?”
“응응! 배고플 거 같아서 내가 데려왔지.”
“피곤하면 좀 더 자도 괜찮을 텐데.”
“아니에요. 많이 쉬었어요!”
한설은 그렇게 답하면 다시 한번 일 층의 카페를 둘러봤다.
“나 그거 줘. 오레오 프라페!.”
월이는 태주에게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한설은 월이가 말하는 어려운 이름을 듣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뭐야?”
“어… 엄청 달고 맛있는 거야! 설이도 같은 거로 만들어 줘!”
또 있어 보이는 이름의 음료를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태주는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절대 만들어 주지 않았겠지만, 한설에게는 처음인 음료일 테니 그냥 별말 없이 만들어 주기로 했다.
씨익 웃는 월이의 표정을 보면 아마 노린 것 같았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갔다.
뭔가를 갈고 섞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에 한설은 놀란 듯 월이의 팔을 잡았다.
소리만 들으면 아그작빠그작거리는 뭔가 좀 심상치 않은 소리이긴 했다.
“이게 음료수를 만드는 소리인가요? 이 이상한 소리가?”
한설의 질문에 월이가 대신 대답했다.
“이상한 게 아니구 딱딱한 걸 가는 소리야.”
태주는 금세 두 잔을 만들어 냈다.
그리곤 한설에게는 웃으며 건네주고 월이에게는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월이는 태주에게만 보이게 혀를 살짝 내밀었다.
“우와…. 이 하얀 건 뭔가요?”
둘의 대치를 끊고 한설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그건 생크림이야!”
그렇게 말하곤 월이가 시범을 보이듯 스푼으로 크림을 떠먹었다.
한설은 그 모습을 보곤 따라서 생크림을 한 입 떠먹었다.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몽글몽글한 느낌과 과일보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나는 그거 섞어 먹는 게 더 맛있더라.”
한설이 맛에 깜짝 놀라 한 번 더 떠먹으려 할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였다.
복장이 달라졌기에 한설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시아는 편해 보이는 녹색 추리닝에 검은 슬리퍼 차림이었다. 이전의 단정했던 복장과는 딴판이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시아 씨… 맞죠?”
“‘시아 씨’가 맞긴 한데, 그렇게 정중하게 부를 필요는 없어. 월이처럼 언니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차라리 시아 님도 좋겠구나.”
시아의 장난에 태주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한설은 장난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어… 그럼 시아 님? 시아 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이상한 호칭을 골라버리는 한설에 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네? 시아 님. 왜 그러시죠?”
“그, 그만. 당연히 언니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어째서 ‘님’으로 부르는 거야? 어색하니 제발 그냥 언니라고 불러!”
그 호칭이 꽤 낯간지러웠는지 시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설이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그게, 언니는 조금….”
언니라는 것은 한설에게는 단순히 진짜 언니를 의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거의 어머니에 가까운 그런 느낌을 주는 단어였다.
“…그럼 언니라는 호칭은 안 해도 좋으니까 시아 님이라고는 부르지 마. 이거 기분이 영 이상한데.”
시아의 말에 한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은 시아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며 빨대를 휘휘 저었다.
그리곤 월이를 따라 빨대를 한번 쭉 빨았다. 생크림과 달리 굉장히 차갑고 또 달았다.
한설은 시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아 님 말대로 이거 정말 맛있네요!”
“그래, 다행이네. 아니, 그보다 시아 님이라는 호칭을 좀 어떻게 해 줘….”
의도치는 않았지만 시아와 한설은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태주는 따듯한 미소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월이는 웃음을 참는 것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역시 미소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언니라고 부르기가 그러면 그냥 시아 언니 정도로 하면 안 될까?”
“음… 일단 그 정도면 저도 안 어색하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