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상자 안의 머리 (14)
태주의 말에 정한의 행동이 뻣뻣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정한의 그 어색함을 태주는 이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딱딱한 발음.
이전에 전화로 연기하는 것을 들었던 때와 같았다.
본인도 그것을 알았기에 정한은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태주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도깨비와 대화하던 중간중간, 당신은 약속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는 말에 큰 반응이 없었어요. 궁금한 척 정도는 했지만요.”
약속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정한은 비교적 시큰둥했다.
마치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듯, 그렇게 행동했다.
정한이 본격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도깨비가 그걸 이틀 안에 가져오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확신을 할 수는 없죠.”
정한은 계속 불안해하고, 도깨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주는 완벽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빠듯하기는 하지만 태주는 도깨비가 말한 날짜를 지키겠다고 했다.
오직 정한을 조금 떠보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손님은 제가 이틀로 기한을 확정을 지을 때조차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를 신뢰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사실 뭐 할 말은 없지만,”
하지만 신뢰한다면 정한이 저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는 걸 보면 저희가 이틀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계신 건 아닌 거 같고요.”
정한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알고 계셨던 거죠? 그 약속.”
정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이 답이 되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 * *
“내일 저녁에, 이곳에서 뵙겠습니다.”
정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떠났다.
마지막 말에 대한 말만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태주가 한 질문에 낯빛으로 대답한 이후, 정한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정한은 정환이라는 친구를 거의 신격화하고 있었다.
정환은 정한에게 친구였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우상이었다.
그렇기에 아마도 정환의 약속을 이어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정한에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정한이 저런 상태가 되었는지 태주는 몰랐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반응을 보아하니 어디서 문제가 비롯되었는지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는 흔한 일이지.”
태주는 씁쓸하게 말했다.
흔하다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하기에 별일 아닌 거라고 스스로 착각하곤 한다.
이정도 고통은 누구나 겪는 것이니, 그냥 참으면 된다고.
그러나 그런 걸 참는다고 될 리가 없다.
무조건 참는다고 몸이 나아지지 않듯,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밤도 잠들기는 글렀네.”
시간은 많았기에 태주는 느긋하게 물을 끓였다. 앞으로 이틀간 잠을 안 잘 거라 생각하니 평소보다 더 느긋해졌다.
최소한 커피 한두 잔 마실 시간은 있다.
“끄으으으…”
태주가 물을 끓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쪽에서 월이가 나왔다. 월이는 피곤한 듯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 구석구석을 늘렸다.
“아우, 지겨워.”
몸을 한번 탈탈 털어준 뒤 월이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늘 앉는 자리, 월이의 고정석이였다.
“누나는?”
“한 오 분쯤 더 걸릴 거 같아.”
월이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 더 빨리 올 수도 있고. 그 도깨비가 방해하는 것도 아니니까.”
월이는 한 번 더 몸을 길게 뻗었다. 작게 뿌득 하는 소리가 났다.
“나머지는 위험하지 않으니 먼저 가 있으라고 해서 나왔어.”
“그래. 별말 없었으면 잘되고 있는 거겠지.”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가 다루는 온갖 기술들은 대부분 월이는 고사하고 태주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태주가 문외한이 아니라 간신히 원리 정도를 이해하곤 했지만, 그래도 그걸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설프게 주변에 있어 봐야 방해만 된다.
“너도 고생 많았다. 꽤 힘들었을 텐데.”
태주는 자연스럽게 따듯한 유자차를 만들며 말했다.
“이정도야 뭐.”
월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이며 몸의 긴장을 푸는 것을 보면 꽤 피로를 느꼈던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를 보호하는 일은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었다.
“후,”
월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알게 모르게 피곤했을 거야. 그거 마시고 올라가서 쉬어.”
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차를 홀짝이던 월이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응?”
“그런데 그 약속이라는 게 뭐야?”
“약속이 뭐냐고?”
“응. 너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잖아.”
아무래도 그게 많이 궁금했던 듯 월이는 반쯤 감겼던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물었다.
“그건 뭐… 나중에 알려 줄게.”
태주는 주저하며 말했다.
“엥? 어째서? 왜?!!”
월이는 불만인 듯 입을 비죽거렸다.
“나는 그게 궁금해서 더 열심히 했단 말이야.”
오늘 저녁에는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월이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알려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아니, 뭐 비밀을 유지해야 할 중차대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태주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말로 하면 조금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것들이라.”
태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실제로 조금 그렇지.”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 시아가 나와 말했다.
“아, 고생했어요.”
시아는 많이 피곤한 건지 의자에 거의 몸을 던지듯 앉았다. 철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확 주저앉아 의자와 한 몸이 된 듯했다.
말이야 태주가 가장 많았지만, 일은 시아가 가장 많았기에 피곤할 만했다. 거의 녹아내리는 모습을 본 태주는 시아에게도 유자차를 내줬다.
“하지만, 뭐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어차피 남의 일인데.”
시아의 말에 월이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그럼 누나가 하지 그래요?”
“오늘은 일이 많아서 피곤하네-.”
시아의 모르쇠에 태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그리고 늘 이런 설명은 자신의 몫이다.
태주는 자신이 마실 커피를 내리곤 시아 맞은편 의자에 가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뭐, 말하자면 그런 거지.”
“그런 거라니?”
월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음,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고 해야 할까.”
태주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어린 날의 치기 같은 거지.”
“그렇게 말하면 하나도 못 알아듣거든?”
“도깨비가 하는 말도 가끔은 맞는군. 넌 말을 너무 어렵게 해.”
한쪽은 모르고, 한쪽은 알면서 태주를 야유했다.
결국, 더 뺄 수도 없었다. 태주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마 정환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생각한 가치가 있는 건 그냥 십 년 뒤에도 다 같이 모이는 거였을 거야.”
“응?”
월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시아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실제로도, 뭐 좀 가치 있다면 있는 일이지. 십 년 뒤 다 같이 모여서, 상자를 파내고, 과거 이야기를 좀 하고, 즐겁게 떠들고. 변치 않는 우정이랄까…?”
생각보다도 너무 별것 아니었는지 월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하기 좀 낯부끄러웠던 거야.”
“그래, 이제 막 중학생에서 벗어난 녀석들이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했겠나.”
시아가 덧붙였다.
십 년 전의 약속이라는 긴 기간과 지금은 성인이 되어 나타난 손님의 모습 때문에 대단한 거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약속할 수 있는 것이 대단한 것이었을 리 없다.
당시의 그들은 월이보다도 어렸던, 십 대 남학생들이었다.
그렇기에 태주도, 정한도, 시아도 듣다 보니 그게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별거 아니네.”
월이는 흥미가 떨어진 듯 다시 유자차를 홀짝였다.
“그런데 말이야.”
태주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응?”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정말로 가치 있는 거기도 해.”
“뭐가? 그게?”
“구하려 든다고 구해지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 귀하다면 귀한 거지.”
십 년 뒤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만나 놀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 발단은 아이들의 별생각 없는 약속이었다고는 해도, 실제로 돈으로 살 수 없기는 하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십 년간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단 말이지.”
시아는 태주의 말에 풋 하고 웃었다. 태주는 그런 시아를 한 번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틀을 줘도 볼 수 없다면, 한 달을 줘도 볼 수 없다고 한 거야. 게다가 어차피 다 나오는 건 불가능해.”
사회인이 된 친구들이란 그런 것이다. 각자가 책임이라는 무게가 생겼기 때문에, 쉽게 떨치고 올 수가 없다.
“듣고 있자니 손발이 조금씩 간질간질 한데.”
월이는 조금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으면 그냥 알려 주면 되는 거 아냐?”
월이는 그 점이 의아했는지 물었다.
“음….”
태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지.”
“왜?”
“왜냐하면, 본인도 알고 있거든.”
“알고 있었다고?”
월이의 말에 시아가 끄덕이며 답했다.
“정확히 안다기보다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였겠지.”
“그래. 아마 딱 그 정도의 생각. 하지만 도깨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턴 짐작하고 있었던 거 같아.”
태주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당장은 그래서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정한이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알았다는 점에서 의문의 반 정도는 이미 해결한 셈이다.
“그래도 낙관적으로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나? 아직 모르겠는 점이 너무 많으니까.”
시아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반 정도는 이미 해결했다는 말은 뒤집으면 반 정도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왜 정한의 태도는 그리도 극단적이었던 것인지, 왜 정환을 거의 신성시하는 것인지, 왜 그리도 관계를 이어가는 데 있어 저자세를 유지하는지.
이것들의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결국은 도깨비에게 원하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사실 그래서 지금부터 좀 조사를 해보려고요.”
두 사람은 말없이 따듯한 차를 마셨다.
태주가 두 사람이 하는 일을 할 수 없듯 두 사람도 태주의 일을 도울 수 없다.
“고생하겠네.”
월이는 안쓰러운 눈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솔직히 이틀이 빠듯하긴 한데,”
태주는 커피를 조금 마시며 말했다.
“뭐, 죽기야 하겠어요?”
입에 씁쓸한 맛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의자에 몸을 기댄 태주는 조금 후회했다.
“괜히 허세부리지 말고 하루 더 늘려볼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