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괴담 전문 사무소 : 상자 안의 머리 (13)
정한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정환이와 같을 리가 없어요.”
“응?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도깨비는 심드렁한 채 말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느낀 거지,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야? 내가 너를 그 녀석으로 착각한 게 아니라면 보여줘야 할 것이 바뀌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게 정한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였던 모양인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깨비에게는 크게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좋아. 어쨌든 네가 한 번 질문했으니,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야.”
도깨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정리해보니 좀 알 것 같냐? 약속이 뭐였는지?”
정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한탄하듯 말할 뿐이었다.
“그럼 지금의 대화는 별 가치가 없는 대화였다는 거군.”
도깨비의 말은 차가웠다.
“실망스럽구나.”
그러나 어쨌든 도깨비의 질문은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음에 질문하게 된 것은 정한 쪽이었다.
“제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린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 않을 건가요?”
정한의 물음에 도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여줄 것을 보여준다면 굳이 다른 사람을 찾아갈 이유는 없지.”
도깨비는 정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약속을 지키고 싶냐?”
“…그러고 싶어요. 아직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어느 정도 혼자서 고민을 했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그만두더라도 누군가가 같은 일을 겪을 거라면, 이 자리에서 끝내는 것이 맞았다.
태주는 중간에 끼어들어 말했다.
“하지만 의지와 능력은 분명 다른 문제죠. 그럼 조금 질문을 바꿔서, 정한 씨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모르겠어요.”
“정 불가능할 것 같다면 저희는 약속을 파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요.”
태주는 도깨비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깨비는 그런 말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직 정한만 주시할 뿐이었다.
“지키고 싶어요.”
무언가에 홀린 듯 정한은 말했다.
“이번에 하는 말은 네가 하는 약속인 거다.”
도깨비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번엔 정한이 질문할 차례다.
서로 한 번씩,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있었다.
“…제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죠.”
정한의 말에 도깨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질문이야?”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정한은 식겁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뭔가 자신의 차례를 놓칠 뻔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약속의 기한이 언제까지일까 싶어서요. 저는 언제까지 지키면 되는 걸까요?”
불안한 목소리로 정한은 물었다.
“기한이라.”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도깨비였지만, 이번엔 잠시 고민을 했다.
“이틀 주마.”
“네? 이틀이요?”
정한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건 너무 짧아요.”
그래도 일주일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한은 당황했지만, 도깨비는 기간을 늘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미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어. 여기서 더 기다려 줄 이유는 이제 없다고.”
도깨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한 걸요.”
정한은 도깨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데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준비하는 것까지 하려면 이틀의 시간으론 불충분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니 고작 이틀 만에는 무리에요.”
그러나 도깨비는 사납게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네?”
도깨비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치 손쉽게 그걸 준비할 수 있으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십 년 뒤, 그 상자를 열면서 볼 수 있을 거라고 네 친구 녀석이 말했었지!”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그 친구가 없잖아요?”
“본인이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저 말은 분명히 지금쯤 준비가 되어있을 거라는 말이잖냐. 그러니 찾는 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도깨비의 말이 아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정한이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도깨비는 힌트를 주듯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거의 십 년 동안 자다 깨다 하면서 생각을 좀 했지. 상자 안에 있으면서 할 일이라는 게 생각 정도밖에는 없었거든. 눈 깜박거리며 노는 것도 한두 번이고 말이야!”
심지어 에너지 절약을 위해 머리만 남긴 채 도깨비는 버티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생각만 했는데도 그게 뭐였는지 정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이겠지 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지.”
도깨비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 무겁지 않은 것, 가격이 높지도 않을 것,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것, 그러나 아주 희귀한 것.”
도깨비는 선심 쓰듯 말했지만, 정한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에 맞는다면 이틀이라는 시간은 충분할 거다. 말해 봐. 내가 더 오래 기다려야 할 이유가 뭔지 말이야.”
도깨비는 말하며 턱을 들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얇은 선이 남아 있었다.
도깨비 자신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는지 기억하라는 그런 행동이었다.
정한은 대답하지 못했고, 도깨비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간을 더 줄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십 년을 기다렸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네놈이 기절했을 때도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일주일을 더. 나는 꽤 오래 기다려줬어.”
“그건…”
정한이 도깨비의 말에 대꾸하려 하자, 도깨비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어느 정도는 내 오해도 섞여 있었으니 그만큼 늦어진 건 문제 삼지 않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준비 기간을 늘려 달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아니겠나?”
도깨비는 흉흉한 눈으로 정한을 바라봤다. 방금, 자신이 약속하기 전에 보여줬던 눈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혹은 부서져도 상관없는 물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이전까진, 그래도 너는 약속을 억지로 떠넘겨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는 스스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으니 이제는 그렇게 대할 수 없지.”
실제로 이전까지의 도깨비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유했다.
하지만 이제 정한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 장본인이 되었으니, 도깨비가 참을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 둘밖에 없었다면, 도깨비는 분명 정한의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아니, 조금의 틈이라도 보였더라면, 분명 도깨비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오직 그 행동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무소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장면은 불 보듯 뻔했다. 정한은 엄청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맨 처음 도깨비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정한이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자, 뒤에서 시아가 어깨를 붙잡아줬다. 덕분에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일단 거기서 멈추시죠.”
보다 못한 태주가 도깨비를 제지했다. 이미 정한은 겁을 먹었기에, 그 이상 말을 걸어 봐야 협박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렇게 다그쳐 봐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진 않을 텐데요.”
못마땅한 목소리로 태주는 말했다. 도깨비도 그걸 알았는지 혀를 한번 크게 차고는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과한 요구를 했나?”
“이틀이라는 시간 말이죠?”
도깨비의 말에 태주는 정한을 힐끗 보며 말했다. 태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넉넉한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도깨비는 눈을 부라렸지만, 태주는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있다고 해서 그걸 보여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도깨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와 한번 붙어 보기라도 하려는 거냐?”
홈그라운드에, 전원이 다 모인 상태였기에 만에 하나라도 질 가능성은 없지만 태주가 원하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그래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애초에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에요.”
태주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더 생긴다 해도 의미가 없을 거라는 말이죠.”
그 말을 하자 도깨비는 눈을 크게 떴고, 정한은 눈이 흔들렸다. 태주는 그 반응 역시 놓치지 않았다.
“제 생각에는 이틀이 지나도 보여줄 수 없다면 열흘이 지나도 못 보여 드릴 겁니다. 더 많은 시간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건 그런 의미에요.”
태주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앞으로 이틀 동안 이곳에 계신다는 걸 조건으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으음?”
도깨비는 눈을 크게 떴다.
“너, 그게 뭔지 짐작이 가냐?”
“네.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도깨비의 질문에 태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생각보단 별 것 아닐걸요.”
* * *
도깨비는 태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월이와 시아는 도깨비가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처리를 하기 위해 작은 방에 남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번에도 태주가 정한을 바깥으로 안내하게 되었다.
정한은 둘만 남게 되자마자 곧바로 질문했다.
“정말로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세요?”
침착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누가 봐도 정한은 지금 전혀 침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슬아슬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죠.”
이틀을 들여도 준비할 수 없다면 열흘을 주건, 한 달을 주건, 혹은 십 년을 주건 가져올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미뤄질수록 더 가져오기 힘들 수도 있다.
“빠듯하지만 이틀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도깨비 말대로 본인이 꽤 기다려 준 셈이기도 하고요.”
태주는 정한이 불안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안하신가요?”
“…네.”
정한은 바싹 마른 입술을 조금 씹었다.
“…정말로 그게 뭔지 짐작을 하고 계신 건가요?”
정한의 말에 태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짐작은 갑니다.”
태주의 말에 정한은 다시 한번 입술을 씹었다. 크게 긴장한 것 같은, 그런 태도였다.
그 태도를 보고 태주는 조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사실도 짐작이 가네요.”
태주는 아예 몸을 돌려 정한을 마주 보며 말했다.
“사실은 알고 계셨죠?”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태주는 정한은 당황했다.
“약속 말입니다.”
태주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떤 미소도, 웃음기도 없이 말했다.
“사실은 도깨비와 대화를 할 때쯤에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다.”
태주의 말을 들은 정한은 발을 멈췄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이상하거든요.”